<던전리셋 77화>
“안 됩니다.”
그래, 당연히 안 되겠지.
생각할 것도 없이 단호하게 거절하는 오창석 촌장의 반응에 정다운은 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쌀밥 1000공기면 어때요?”
“……!”
촌장은 순간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밥 1천 공기라고?
하루 3끼 한 공기씩만 먹는다 치면, 혼자서 1년은 먹을 수 있는 양 아닌가.
“……안 됩니다.”
어렵사리 거절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는 오창석 촌장이었다.
쌀밥이라니! 그 따끈하고 김이 모락모락하던 하얀 쌀밥!
지난밤 전투 중에 정다운이 동료들에게 거하게 차려 준 한상차림을 보며 얼마나 군침을 흘렸던가!
3년이 넘도록 쌀밥 한 번 구경 못 해 본 한국인에게 있어 그 비주얼은 정말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하지만 안 될 말이지. 내가 미쳤어?’
‘도살자의 칼’이 어떤 물건인가.
동료들을 버리고 도망쳐 온 자신에게 홀로서기를 가능하게 해 준, 더없이 소중한 친구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소중한 보물을 겨우 식량에 팔아넘기라는 말인가?
절대 그럴 수는…….
“그럼 2000공기.”
움찔?
“3천.”
우, 움찔?
“5천.”
“7천.”
“1만.”
“……저한테 왜 이러세요.”
자꾸만 판돈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오창석 촌장은 결국 울상을 지었다.
정다운은 진지했다.
“우리 촌장님 평생 밥걱정 없이 살게 해 드리려고요. 도축 안 해도 되게.”
“아니, 반찬은 어쩌라고요…….”
“반찬도 좀 드릴까요? 고기반찬?”
“고기 썰려면 식칼이 있어야…….”
“그건 제가 대신 썰어 드릴게요.”
[……님들 지금 뭐 함? 프로포즈? 님들이 결혼하면 세기의 커플로 최초 업적이라도 뜰 듯.]
옆에서 토끼가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며 옆에 있던 윤진수와 보상이 뭘까에 대해 토론을 시작했다.
오창석 촌장은 이쯤 되니 오싹할 지경이었다.
협박에는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는 게 최고라는데, 어마어마한 물량으로 당근을 밀어붙이니까 그 자체로도 충분히 공포였다.
‘밥 1만 공기면, 10년 치 식량이잖아. 이 사람은 대체 뭐지? 설마 그만한 양을 선뜻 내줄 정도로 식량이 많다는 건가?’
그 식량이 바로 발밑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는 건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다.
토끼가 결국 중재에 나섰다.
[님, 그냥 포기해요. 식량이 아무리 귀하고 탐나도 자기 무기를 팔아 치울 바보라면 여태까지 살아 있지도 못했을 거임.]
“쳇. 그런가.”
정다운이 수긍하자 토끼는 신이 났다.
[그럼요. 이미 충분히 얻은 게 많잖아요. 뭐 그런 것까지 탈탈 뺏어 먹으려고 하셈? 님은 사람도 아님. 악마다. 아크마다.]
“하긴, 맞는 말이야. 네가 쳐 맞는 말.”
[아얏, 아얏!]
거절해서 마음이 쓰였는지 오창석 촌장은 눈치를 보며 정다운에게 말했다.
“제 식칼을 내 드릴 수는 없지만, 대신 어디서 얻었는지는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어차피 정다운 씨라면 충분히 얻을 기회가 있을 겁니다.”
“어딘데요? 이 근처예요?”
정다운의 눈이 반짝였다.
오창석 촌장은 부담스런 표정을 지으며 저 멀리 어딘가를 가리켰다.
“마침 오늘 다녀오셨던 제2던전에 있습니다. 최종 유적지를 돌다가 우연히 구할 수 있는 물건이지요.”
“아, 아까 거기요?”
의외로 보물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네. 저는 이제 들어갈 수 없는 유적지라도, 정다운 씨라면 아직 기회가 있지 않습니까. 위치라면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는 스테이지-4의 마지막 던전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이었다.
제2던전의 최종 유적지는 이미 공략을 해서 그 앞에까지는 갈 수 있어도, 들어가는 건 시스템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정다운은 조금 다른 의미로 기뻐했다.
“오! 감사합니다. 그 편이 저한텐 더 좋지요!”
[와우, 님 횡재했네요? 이번 스테이지라 천만다행이네요.]
“그러게. 스테이지-2나 3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히히. 이젠 리셋할 때마다 챙겨 올 수 있겠음.]
“……?”
그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는 오창석 촌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고 정다운이 굳이 그에게 자신의 상황을 일일이 설명해 주진 않았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럼 이렇게 하면 되겠네.”
정다운은 결정을 내렸다.
무엇보다 제2던전이라 너무 다행이었다.
마침 그곳은 류승우들이 이번에 공략하러 갈 던전이었으니까.
* * *
“뭐? 우리만 던전에 들어가라고?”
류승우는 정다운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응. 나는 여기 남을게.”
“형, 왜 그래요? 이제야 겨우 다시 만났는데, 또 헤어지자고요? 그냥 같이 가요. 우리가 지켜 줄 게요.”
윤진수가 서운한 표정으로 정다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지만, 그는 이미 마음을 굳힌 후였다.
구호열도 물었다.
“무슨 이유가 있니?”
“여기 남아서 따로 할 일이 있거든요. 조금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서요.”
“무슨 일인데?”
“음, 그건…… 실패하면 괜히 쪽팔리니까 나중에 던전에서 돌아오면 보여 드릴게요.”
“대체 뭔 꿍꿍이인지…….”
구호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짓궂은 말썽쟁이처럼 웃으며 대답하는 걸 보니 걱정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던전 안이 위험하지, 여기는 지금 스테이지-4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럼 촌장님이 말씀해 주신 식칼은 어떻게 하려고? 그거 구하러 가겠다는 것 아니었어?”
“우리가 찾아올까?”
“아냐. 최종 유적지부터는 나도 합류할 거야. 그 근처까지 가면 단톡으로 위치 알려 줘.”
“알려 주면? 혼자 찾아오겠다고? 그건 너무 위험해!”
류승우가 펄쩍 뛰며 놀라는 모습에 정다운이 손사래를 쳤다.
“어우, 내가 왜? 토끼를 보낼게.”
[엥? 나요? 내가 던전 돌아다니다가 괜히 이쪽 도우미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서로 뻘쭘할 텐데요.]
토끼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사냥도 도와주기 힘들어요. 내 손에 피를 묻히면 격이 떨어지거든요.]
종말의 용 밑에서는 파괴와 살생을 통해 에너지를 얻었지만, 지금 토끼는 반대 입장이라, 그러면 오히려 손해였다.
“그럼 넌 대체 하는 게 뭐냐? 숨 쉬기?”
정다운이 마뜩잖은 표정으로 쳐다보자 토끼는 뻔뻔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숭고한 사명을 커밍아웃했다.
[죽음과 파괴보단 생명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죠. 먹고, 싸고 자는 일! 하지만 난 격조 높은 토끼라 똥 같은 건 안 쌈.]
“이 놈팽이가…….”
한숨이 나왔지만, 어차피 처음부터 녀석에게 많은 걸 바라진 않았다.
엄지손가락으로 놈팽이를 힐끗 가리키며 동료들에게 말했다.
“아무튼 이 녀석보고 나중에 찾아가라고 할게. 이런 놈팽이라도 게이트는 열 수 있으니까.”
[아항? 그런 계획이시군? 하긴, 게이트 여는 거야 님보다 훨씬 많이 해 봤으니 자신 있어요. 오키 오키.]
토끼가 최종 유적지 근처에 게이트를 열면 정다운은 바로 그쪽으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 계획을 이해한 류승우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러네. 확실히 그러는 편이 안전하고 좋을 것 같아. 다만, 나는 걱정이야. 그러다 점점 네가 도태될까 봐.”
정다운은 지금 잔머리를 써서 고생을 다 생략하고 알맹이만 쏙 먹겠다는 심보였다.
하지만 던전에서는 고생을 해야 스킬 레벨도 오르고, 새로운 스킬도 생긴다.
그렇게 계속 성장을 하지 않으면 점점 무서워지고 위험해지는 난관들에게서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다.
[옳소! 백번 들어도 맞는 말임. 게으르면 도태되어 죽는 게 인생사죠.]
“응, 네가 백대 쯤 쳐 맞는 말이지. 난 하루를 살아도 게으르게 살 거야.”
[이 프로 게을러 같으니! 아얏. 쒸익쒸익. 아얏.]
괜히 째려보다 한 대 더 맞은 토끼였다.
정다운은 자신을 걱정해 주는 동료들이 너무 고마웠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남고 싶었다.
“걱정하지 마. 고생도 좋지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 아니겠어? 유적지부턴 나도 같이 고생할게.”
“알았다. 네가 어련히 다 생각이 있겠지. 믿겠다.”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류승우는 정다운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 * *
다음날 아침, 결국 류승우들은 정다운을 남겨두고 바로 던전으로 떠났다.
마을에 있던 사람들 중 그를 따르겠다는 10명 정도의 인원과 함께.
정다운은 자기가 결정한 일이지만 마음이 조금 적적해서 식량이라도 잔뜩 들려 보냈다.
[님 진짜 괜찮음? 열심히 고생해서 재회했는데, 며칠 만에 이별이네요.]
“한 달도 안 되서 다시 볼 건데 뭐.”
정다운은 적적한 마음을 잊기 위해서라도 바로 소일거리를 찾아 움직였다.
“자아, 이제 한번 시작해볼까?”
[굳이 마을에 남은 이유가 뭐임?]
“이번에 쌀밥을 먹어보고 중요한 게 빠졌다는 걸 깨달았거든.”
[엥? 뭔데요?]
뜬금 없는 이유가 튀어나오자 어리둥절한 토끼였다.
정다운은 심각한 얼굴로 지난 일을 반성하고 있었다.
“촌장님이 이번에 거절한 이유가 뭘까 생각해봤지. 역시 쌀밥만으로는 메리트가 없기 때문 아닐까?”
[엥? 그냥 무기가 아까워서인 것 같은…….]
“밥에는 역시 찌개가 있어야 돼.”
[찌…… 뭐요?]
“한국인이라면 역시 찌개지.”
[……?]
점점 알쏭달쏭해지는 결론.
정다운은 지하신전으로 내려가서 소지품 창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나타난 건 놀랍게도 보라색으로 물든 네모난 흙벽돌이었다.
토끼와 알파가 동시에 경악했다.
[히익!? 저주받은 흙이다!]
<맙소사! 어째서 신전 안에 그 불결하고 저주받은 흙을 들이시는 겁니까?>
“잠깐 실험해 볼 게 있어서 조금 퍼 왔지.”
<대체 무슨 실험을!? 네크로맨서라도 되실 생각이십니까!>
정다운은 지하 신전 한구석에 저주받은 흙벽돌 하나를 내려놓고 한참을 멍하니 지켜봤다.
“다들 어떻게 생각해? 이 흙을 이렇게 저주받은 땅 밖으로 가져와도 저주가 계속될까?”
[당연하죠! 색깔을 보셈! 겁나 보라색이네!]
토끼는 그 증거로 칼 하나를 푹 꽂았다.
그러자 점점 녹이 슬어 가기 시작했다.
[자, 내 말이 맞죠? 부패의 저주는 그대로임!]
<흠. 그건 흥미로운 주제군요.>
알파는 정다운의 생각을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이 어설픈 신전의 주인이 드디어 신전을 위한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게 아닐까?
<설마 망자를 생성하는 비석을 신전의 함정으로 설치하고 싶으신 겁니까?>
[헐? 그런 방법이? 소오름! 설마 님, 골렘들처럼 망자들까지 부하로 끌어들일 생각이심!?]
토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말 사악하고도 엄청난 아이디어 아닌가!
하지만 알파는 부정적이었다.
<안타깝습니다. 신전의 방어력을 높이겠다는 그 생각은 갸륵하지만, 결론만 얘기하자면 불가능합니다. 부패의 저주는 생명의 신전과 맞지 않습니다.>
저주는 저주일 뿐.
함정 스킬로 설치할 수는 없었다.
그 증거로, 지금 아무리 기다려도 이 보라색 흙에서 비석이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망자도 소환되지 않을 겁니다.>
[쯧쯧. 이번엔 님이 생각을 잘못 했네요. 망자의 저주는 망자의 땅 자체에 걸린 거임. 이 흙은 그저 저주에 물들었을 뿐.]
토끼와 알파가 정다운의 옆에서 열심히 떠들고 있었지만, 정작 그는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근데 아까부터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임? 왜 던전 콩을 솥에 삶아요? 오늘 저녁은 콩 반찬임? 그러기엔 양이 너무 많은데?]
“응? 아, 이거?”
그제서야 정다운이 뒤를 돌아봤다.
표정이 몹시 해맑았다.
“메주 만드는 중인데? 이 보라색 흙을 이용하면 푸욱 잘 삭을 것 같지 않아?”
[……?]
<……?>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