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75화>
정다운이 던전까지 가는 길을 만들어 주겠다는 소식은 바로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뭐? 던전까지 육교를 만든다고?”
“와, 진짜 그렇게 직행 도로가 생기면 던전에 다녀오기가 엄청 편하겠는데?”
“화살 정도야 방패로 막으면서 이동하면 되니까!”
이렇게 환호하며 기대하는 사람들이 절반이었고.
“진짜 그렇게 해도 되나?”
“도로 위에서도 망자 비석이 튀어나오는 거 아닐까?”
“그러게. 어차피 같은 흙이잖아. 갑자기 보라색으로 변할 것 같아.”
우려하는 사람들도 절반이었다.
그 말엔 정다운도 동감이었다.
“일리가 있어. 그럼 일단 조심히 만들어 가다가, 비석이 올라온다 싶으면 얼른 허물어 버리지, 뭐.”
편하게 생각한 그는 바로 마을 밖으로 이동했다.
장벽 너머엔 한창 마을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해골 병사들의 장비를 수거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기세가 좀 수그러들었을 뿐, 여전히 땅 밑에서는 새로운 망자 비석들이 쑥쑥 올라오고 있었으니까.
그럼 그걸 바로바로 원거리 공격수들이 나서서 처리하고, 그 틈에 민첩한 사람들이 주변에 널린 아이템들을 주워 모으는 방식이었다.
그 모습에 토끼가 혼자 낄낄거렸다.
[꼬락서니들하곤. 아주 땅거지들이 따로 없네. 아얏, 왜 또 때림!?]
“아, 미안. 나한테 하는 말인 줄 알았어.”
[아, 뭐래. 님은 그냥 쥐며느리고요. 아얏, 으악!]
소속이 바뀌어도 맞을 소리만 골라하는 건 그냥 성격인가 보다.
아무튼 전투의 여운이 식기도 전에 저렇게 사람들이 부지런을 떠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나중에 정다운을 주든 본인들이 갖든 간에, 최대한 빨리 장비들을 수거하지 않으면 그대로 다 썩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이 보라색 땅 위에서 죽으면 우리도 바로 해골 병사가 된댔지?”
[넴. 바로 썩어 문드러져서 흙으로 돌아가죠. 칼을 꽂아 둬도 바로 녹슬기 시작하고요.]
“햐, 진짜 신기한 곳이네.”
[뭐지, 이 변태는? 이 저주받은 땅을 보면서 눈을 왜 그렇게 뜸?]
정다운의 눈이 초롱거리는 걸 보고 토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저주고 뭐고, 진짜 신기하긴 했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해골 병사들의 잔해도 다 바스러져 땅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러다가 밖으로 다시 기어 나올 땐 이 뼈다귀들이 전부 멀쩡해진다는 거 아냐. 장비들도 다시 멀쩡해지고? 던전 리셋 비슷한 건가?”
[음,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라요. 이건 진짜 저주예요. 사실 이곳엔 슬픈 전설이 있죠.]
토끼는 오랜만에 도우미 모드로 돌아왔다.
[아주 오랜 옛날, 이 땅 위에는 부귀영화를 자랑하던 영광스런 황금의 대제국이 있었어요. 그러다 폭망했음.]
“갑자기? 왜 망해?”
[너무 부패하고 타락해서 저주를 받았거든요. 생육(生育)하고 번성할 기회를 박탈당한 거죠.]
이른바, ‘부패(腐敗)의 저주’였다.
“낳고 기르는 게 다 안 된다고? 사람도?”
[네. 사람이며 가축이며 더 이상 번식이 불가능했어요. 농사를 지어도 다 썩어 버리고요. 죽으면 언데드가 되기까지 하니, 멸망은 한 순간이었음.]
토끼는 마침 바닥에 꿈틀거리며 다가오는 뼈다귀 손을 발로 뻥 걷어차며 말했다.
[사실 이 망자들 중에 대부분은 그 시절에 죽어 간 제국민들이에요. 참가자들도 많지만요.]
“호우! 그런 거구나. 그런데 넌 이런 얘기를 어떻게 다 알아?”
[에헴. 이 정도야 도우미로서의 기본 소양임. 아얏, 이번엔 왜 때려요!?]
“아, 쏘리. 손맛이 좋아서 습관이 됐나 봐.”
[……?]
토끼는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작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데 이 근방의 비석들을 다 부쉈는데도 왜 땅 색깔이 아직도 보라색일까?”
“그건 앞으로도 비석들이 계속 생성될 거라는 의미지요.”
때마침 오창석 촌장이 다가오며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를 보시면 얼룩덜룩하게 보라색이 아닌 땅들이 더러 있지요? 운 좋게도 저주의 영향권에서 비켜난 곳들입니다. 저런 곳에선 비석이 올라오지 않는답니다.”
저주에서 비켜난 땅.
그중에 가장 넓은 곳에 바로 틈새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창석 촌장은 이번엔 다른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저희가 주로 가는 던전은 저쪽입니다.”
“네.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요?”
정다운은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확인하고 흙벽돌을 척척 투하하기 시작했다.
바로 보라색 땅 위에 말이다.
“자아, 어디 보자. 어차피 변할 거라면 빨리 변해라. 괜한 고생 안 하게.”
엄밀히 따지면, 정다운이 꺼내는 흙벽돌은 ‘부패의 저주’와는 전혀 무관한 흙이었다.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결과는 바로 나왔다.
“어?”
“아아…….”
오창석 촌장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정다운의 흙벽돌이 아래부터 점점 보라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흙이라서 저주가 타고 올라오는 건가? 그럼 정화!”
파앗!
정다운이 얼른 다가가 흙벽돌을 정화하자, 보라색이 꾸물꾸물 다시 밑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스킬을 멈추자 다시 스멀스멀 보라색이 기어 올라오는 게 아닌가!
“어이씨, 요놈 봐라? 정화! 정화!”
파앗! 번쩍 번쩍!
꾸물꾸물. 스멀스멀.
[힘내라, 힘! 이기는 편 우리 편!]
줄다리기가 시작되자, 토끼가 쌍수를 들고 응원했다.
하지만 결국 정다운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와, 안 되겠는데?”
[헐. 벌써요? 의지박약이시네. 왜 사냐? 아얏.]
“쓰읍. 너 네임드가 되고 나서 요즘 너무 나대는 것 같다?”
[헷. 요즘 좀 신남.]
토끼를 한 대 때려 준 후 정다운은 바로 계획을 수정했다.
흙이 안 된다면…… 돌은 어떨까?
“해골들 주제에 설마 돌까지 깨고 올라오진 않겠지.”
정다운이 이번에 꺼낸 건 바로 돌이었다.
바위산 계단을 만들면서 나온 것들이라 아주 깔끔하게 각진 벽돌들이었다.
처처처척!
그의 손짓을 따라 이번엔 보라색 땅 위에 보도블록이 두두두 깔렸다.
“……도, 돌도 많으셨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오창석 촌장은 이걸 감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한 표정이었다.
아니, 얘는 대체 뭐 하는 인간인데 소지품에 돌과 흙을 이렇게 많이 들고 다닌단 말인가?
정다운은 뻔뻔한 얼굴로 콧대를 한껏 치켜들었다.
“이것도 다 제 새끼들이지요. 이 반듯하고 정갈한 모서리를 보시죠. 사람의 손으로 깼다고 하기엔 너무 예쁘지 않습니까?”
“아, 네…….”
“물론 이것도 정산해 주실 거죠?”
“네? 아, 네, 그야…….”
[답정너시네. 흙팔이도 모자라서 이젠 돌팔이 장사임?]
둘의 일방적인 대화에 토끼가 낄낄댔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흘렀고, 정다운이 꺼낸 돌은 놀랍게도 보라색으로 변하지 않았다.
“오, 이건 괜찮은 것 같은데?”
“아, 정말이네요! 돌까진 저주가 타고 올라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창석 촌장도 감탄을 터뜨렸다.
정다운은 예리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비석이 돌을 깨고 올라올 수 없으니, 저주도 올라오지 못하는 거야. 훗, 내 예상대로군. 어쩌면 이 저주는 흙에서 올라오는 특별한 미생물에 의해…….”
[뻥치시네. 그런 게 어딨음? 그냥 얻어걸린 거면서, 아얏.]
“아무튼 그럼 이걸로 간다.”
하지만 이렇게 돌로만 쌓아서 만들면 부실해서 다리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흙 뭉치기 스킬로 전체를 한 덩어리로 합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 하기로 했다.
1) 바닥에 돌판을 깔아 저주를 차단한다.
2) 그 위에 흙벽돌을 쌓아 높이를 올린다.
처처처처척!
방식이 정해지자, 진행은 순식간이었다.
망자의 땅을 가로지르며 쭉쭉 생겨나기 시작하는 육교.
정다운은 아예 안전을 위해 켄타우로스 골렘 위에 올라타고 이동하며 2미터 높이의 벽을 쭉쭉 이어 나갔다.
아이템을 수거하고 있던 사람들은 멍한 표정으로 그 놀라운 광경을 지켜봤다.
“햐, 날 밝을 때 보니까 더 신기하네…….”
“저건 대체 무슨 스킬일까?”
“땅의 요정인가?”
스킬이 아니라곤 추호도 생각 못 하는 그들이었다.
정다운도 굳이 일일이 붙잡고 정정해 주진 않았다.
[스킬인 편이 더 멋있으니까 착각하게 냅 두죠.]
<저도 찬성입니다. 이렇게라도 신전의 주인으로서 위신을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땅의 요정이라는데?”
알파까지 나서자 정다운은 허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땅의 요정(?)답게 어느 순간 육교를 만드는 일에 재미가 들려 버렸다.
하면 할수록 창의력이 샘솟았다.
“음.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가로등이 있어야겠어! 어두울 때 갑자기 화살이라도 날아오면 너무 위험할 거 아냐. 횃불이라도 꽂아 두자.”
치덕치덕.
그의 손이 흙을 뭉그러뜨리자, 순식간에 자유의 여신상이 들고 있을 것처럼 생긴 횃불 받침대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육교 곳곳에 횃불 받침대가 생겨났다.
사실 이럴 때야말로 태양석이 딱이었지만, 이런 데다 낭비하긴 아까웠다.
“촌장님, 횃불 가진 거 많아요? 나 따라다니면서 여기다 횃불 좀 꽂아 주세요.”
“……마을 사람들에게 각출해 오겠습니다.”
많을 리가.
보통 횃불은 자기 쓸 것만 몇 개 만들어 두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정다운에게 횃불이란 땅굴에서 끊임없이 사용해야 하는 소모품.
심심할 때마다 소일거리 삼아 만들어 둔 게 한가득이었다.
“그럼 일단은 나한테 있는 걸로 몇 개 꽂아 둘게요. 나중에 기름 다 소모되면 알아서 충전하세요.”
“넵.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휴. 감사하긴요. 다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
이럴 수가! 이렇게 좋은 사람이라니!
정다운의 말에 오창석 촌장은 엄청 감동하고 말았다.
그는 항상 눈치만 보며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던 자신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위인이었다.
갑자기 스스로가 부끄러워져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정말이지……. 이 던전에 정다운 씨 같은 사람만 있다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진심이 우러나오는 말에 정다운은 어리둥절했다.
‘아니, 횃불 좀 줬다고 뭐 이렇게까지 감동하지?’
원래 쌀독에서 인심 난다고 하지 않던가.
가진 게 워낙 많은 정다운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것을 퍼주고 있었다.
……라는 건 개뿔.
‘지금이다!’
이때다 싶어서 정다운이 눈을 번뜩였다.
마치 먹잇감을 낚아채는 범독수리처럼 잽싸게 기회를 포착했다.
그가 몸을 배배 꼬며 검은 욕망을 내비쳤다.
“그래서 말인데요- 촌장님? 저번에 보니까, 도축할 때 쓰시던 식칼이 무척 탐이 나, 아니, 좋아 보이던데……. 그 칼은 뭔가요?”
“네? 아아, ‘도살자의 칼’ 말씀이시군요. 제 보물이지요. 마침 도축하기 좋은 옵션이 붙어 있어서 제 스킬과…… 음?”
흠칫?
오창석 촌장은 순간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눈치 스킬이 발동된 것이다!
“거기서 당장 피하십시오!”
“……네?”
“위험해!!”
그가 갑자기 버럭 소리치자, 정다운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문득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육교는 거의 다 만들어져 던전 코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위험이 도사린 푸른 초목.
그곳에서부터 주먹만 한 대포알들이 무서운 기세로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
순간 정다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어디로 날아올지가 정확히 눈에 보여서 본능적으로 그중 하나를 척 잡아 버렸다.
“어씨, 깜짝이야. 응? 이건?”
손에 잡힌 대포알의 정체를 확인한 정다운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럴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