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70화>
화아악!
제단에서 시작된 황금빛 기운이 지하 공간 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신전의 영역이 선포되었습니다. 앞으로는 통칭 ‘지하 신전’으로 명명됩니다.>
참고로 바위산에 있는 첫 아지트의 정식 명칭은 ‘대신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알파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신전의 방어를 위해 함정을 설치해야 합니다. 함정을 바로 설치하시겠습니까?>
“함정? 이 깊은 땅속에 누가 쳐들어온다고?”
<외적의 침입에서 제단을 보호하는 것은 신전의 필수 요소입니다. 관리 스킬에 괜히 ‘함정 설치’가 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일단 밥을 먹자.”
<네?>
정다운은 바로 계단을 올라가 막사에 남아 있던 구호열을 찾았다.
“호열 형님. 쌀밥 어떻게 되어 가요?”
“오, 지금 막 뜸을 들이고 있는 참이야. 슬슬 한번 먹어 볼까?”
낚시가 취미였던 구호열은 없는 살림에도 제법 능숙하게 쌀을 짓고 있었다.
밥솥은 찌그러진 철제 방패 2개를 서로 맞붙여서 쓰는 중이었다.
“어우, 이거 씻긴 한 거예요?”
“음, 나름?”
“정화!”
파아앗!
“흐흐, 이거 오랜만이네. 정화 스킬이 있었지?”
정다운은 깔끔하게 밥솥 전체에 정화를 걸고 조심히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푸확! 하고 뜨거운 김이 올라오며, 그 아래로 촉촉하고 아름다운 빛깔을 뽐내고 있는 새하얀 쌀밥이 드러났다.
“오오! 이거 진짜 쌀인 것 같은데요!?”
“그, 그러게?”
“어디 한입 먹어 볼까?”
곧바로 한 주걱 푸욱 떠서, 입으로 호호 불며 가져가는 정다운.
그 뜨거운 걸 한입에 쏙 넣는 순간, 그의 눈이 번쩍 떠졌다.
“헐?”
고소하고 찰진 이 맛!
고향의 맛!
정다운은 당황해서 외쳤다.
“혀, 형님! 이거 진짜 쌀밥인데요!?”
“흐냠! 진짜네? 이런 제기랄! 대체 얼마 만에 먹어 보는 쌀밥이냐!”
바로 따라 먹어 본 구호열의 눈에서 또 눈물샘이 폭발했다.
방년 40세 노총각. 한창 눈물이 많아질 감수성 넘치는 시기였다.
“쌀이다! 이거 진짜 벼였어!”
“만세! 쌀이다!”
신이 난 정다운과 구호열이 한달음에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이렇게 되면 모든 건 계획대로였다!
정다운은 열심히 류승우와 윤진수가 쭉정이를 골라내고 있는 논을 가리키며 말했다.
“알파, 함정은 바로 저걸로 정했다!”
<……네?>
사실 ‘함정’이라는 게 구덩이만 잘 파 놔도 함정 아니겠는가.
정다운은 곧바로 논 위로 올라가서, 길고 좁은 구덩이를 줄줄이 파냈다.
이걸 가리켜 전문 용어로 ‘고랑’이라 부른다.
“이게 농부의 입장에선 물길이겠지만, 걸려 넘어지는 입장에선 함정 아니겠어?”
그런 데다 마침 그 위에 벼가 무성히 자라고 있어서 시야까지 가려 주고 있었다.
“즉, 엄청나게 빠지기 쉬운 구덩이 함정인 거지.”
[아니, 뭐. 그렇게까지 엄청난 건 아닌 것 같…….]
대기업에 다니던 전직 도우미가 함정의 어설픔에 태클을 걸었지만, 그는 뻔뻔했다.
“어허, 원래 우리 같은 영세업체 입장에서는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인 거야. 함정 설치!”
<함정을 설치합니다.>
번쩍!
빛이 터지며 벼가 자라고 있는 논 전체가 함정으로 설정되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논이 훼손되더라도, 혹은 ‘벼’가 다 추수되더라도, 얼마든지 리셋 스킬로 복구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즉, 무한의 곡창 지대가 되는 셈이지! 아직 스케일이 좀 작지만 이 지하 신전은 앞으로 지속적인 쌀 생산지가 되는 거야!”
[또 오버하시네.]
오버가 아니었다!
어차피 벼를 추가로 계속 심으면 쌀 생산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때마다 생명 에너지가 소모되겠지만!
<맙소사. 수확물을 제물로 바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제물을 소모해 농산물을 리셋할 생각이십니까? 원래 이러라고 있는 리셋 스킬이 아닌데.>
“에이,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좀 봐주라. 내가 언제 일일이 농사짓겠어? 자꾸 그러면 그냥 여기 눌러살면서 귀농해 버린다?”
<…….>
정다운의 넉살 좋은 협박에 알파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자꾸 딴지 걸면 거의 모내기부터 농사지을 기세였다.
<……아무튼 이제 마지막 단계입니다.>
“뭐가 또 남았어?”
<이곳을 직접적으로 관리할 관리자를 임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오옷!]
반짝!
그 말에 토끼가 눈을 빛내며 옷매무새를 고치기 시작했다.
[크흠, 엣헴. 으흥흥.]
괜히 휘파람이나 부르고 딴청을 피우면서 구겨진 나비넥타이를 고쳐 매고 모자의 먼지도 터는 토끼.
그러곤 진급을 앞둔 이등병처럼 자세를 바로 잡고, 곁눈질로 정다운이 자신을 부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날벼락이 떨어졌다.
“혹시 승우 형을 관리자로 임명할 수 있어?”
[뭣이라고!?]
화들짝!
믿는 도끼에 발등을 대차게 찍혀 버렸다!
하지만 정다운 입장에선 당연한 질문이었다.
동료들이 관리자가 되면 종말의 용이 찍은 낙인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류승우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보고 관리자를 하라고? 그게 돼?”
[안 됨!]
<불가능합니다.>
토끼와 알파의 대답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어? 진짜 안 돼?”
[당연히 안 되죠! 관리자는 무슨 개나 소나 되는 건 줄 알아요? 종족을 초월한 개나 소라면 모를까!]
“……뭔 개소리야?”
“종족을 초월한, 뭐?”
토끼의 말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관리자는 나처럼 종족 한계를 뛰어넘은 특별한 토끼나 될 수 있어요. 그런데 님들은 아직 인간을 초월하지 못했잖아요?]
<그 말대로입니다. 관리자가 되기 위해선 먼저 초월자가 되어야 합니다.>
“초월자?”
알파가 깔끔하게 정리를 해 주었다.
예컨대, 토끼로 태어났다면 토끼의 한계를 뛰어넘은 존재.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뛰어난 존재를 ‘초월자’라고 부른다.
둘 중에 뭐가 더 어렵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인간 쪽이 훨씬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종말의 용 진영에는 동물 출신의 관리자들이 많아요. 미물일수록 자신의 ‘격(格)’을 높이는 게 쉽거든요.]
격 같은 건 잘 모르겠고, 땅이나 파며 살던 무지렁이가 머쓱하게 손을 들었다.
“그럼 나도 초월자인 거네? 신전의 주인이 됐으니까?”
[님은 그냥 오류 종자고요.]
<…….>
더 말해 뭐 하랴.
정다운은 용의 시련을 이겨 내고 스스로의 격을 증명해 신전의 주인이 되었다.
이래저래 상황이 꼬여서 오류투성이였지만, 결과가 그런 것을 어쩌겠는가…….
[아무튼 우리 중에 관리자가 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는 거임! 그러니까 나 관리자 시켜 줘요! 시켜 달라고오!]
“흐음, 어쩔까.”
정다운은 끝까지 고민했다.
솔직히 말하면 토끼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게 좀 꺼려졌다.
‘좀 정이 들긴 했어도, 얼마 전까지 종말의 용의 하수인이었던 녀석에게 자꾸 힘을 실어 준다는 게 좀…….’
그러다 괜히 배신이라도 하면 어쩌란 말인가.
차라리 그럴 바엔…….
“뽀뀨?”
“음?”
그때 마침 땅바닥을 뽈뽈거리며 지나가던 뽀뀨와 정다운의 눈이 딱 마주쳤다.
갸웃?
“뀨?”
“으음?”
토끼는 불길한 기분을 느끼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에헤이, 아니죠? 아니야. 솔직히 그건 진짜 아닌 듯.]
“흐으음?”
하지만 뽀뀨를 쳐다보는 정다운의 표정이 너무 대쪽 같아서 몹시 불안했다.
[아니, 님 지금 무슨 허튼 생각을 하시는 거임? 아무리 내가 못 미더워도 그건 진짜 아니에요.]
<그렇군요. 확실히 관리자는 많을수록 좋습니다.>
[히익?]
“오?”
[아니, 이분들이 지금 뭐래는 거야!?]
급기야 알파까지 합세하자, 점점 안절부절 못하는 토끼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안타깝지만 이 땅다람쥐는 아직 그러기엔 격이 부족합니다. 좀 더 수련을 쌓아야 할 겁니다.>
“쳇.”
[흐아아, 살았다아……!]
토끼는 아찔한 표정으로 땀을 훔쳤다.
하지만 정작 뽀뀨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고개만 갸웃할 뿐이었다.
“뀨우?”
‘젠장, 내가 이런 놈을 상대로…….’
토끼는 뽀뀨와 경쟁해야 하는 현실이 세상 서러웠지만, 아무튼 최종 승자는 자신이라 다행이었다.
정다운은 별수 없이 토끼를 관리자로 임명했다.
“옛다.”
<관리자를 임명합니다.>
[오오오!]
토끼의 몸이 황금빛 기운에 감싸여 공중으로 둥실 떠올랐다.
눈을 지그시 감고 공중에서 우아한 자태로 회전하면서, 녀석의 몸집이 조금씩 커져 가기 시작했다.
[크큭. 나는……! 이렇게 더 강해진다!]
번쩍!
마침내 녀석이 변했다!
날씬하고 쫙 빠진 섹시한 귀.
풍만하고 탱탱한 궁둥이.
그 끝에 달랑이는 동그랗고 폭신한 꼬리까지!
[음하하! 이게 바로 나다! 내가 바로 초월 토끼님이시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소감을 말했다.
“뭐야, 그냥 살찐 토끼네.”
“하얀 돼지네.”
“……토끼 고기는 맛있을까?”
“오늘 저녁은 쌀밥에 살찐 토끼 고기인가?”
[어허, 무슨 그런 실례의 말씀을!]
토끼는 의기양양하게 바닥에 착 내려섰다.
녀석은…… 키가 한 뼘 정도 커진 어른 토끼가 되어 있었다.
전보다 턱시도도 화려해졌고, 나비넥타이의 재질도 훨씬 고급스러워져 격조가 느껴졌다.
[후후,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도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나도 이름을 가질 수 있게 되었거든요.]
“이름을?”
[드디어 나도 네임드가 될 자격을 얻은 거임!]
의아해하는 정다운의 앞에 토끼가 척, 하고 중세 기사처럼 우아하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이 마스터. 부디 저에게 이름을 지어 주시겠습니까? 최대한 고귀하고 멋진 걸로요.]
야망으로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토끼의 눈빛을 보며 정다운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토끼야.”
[아싸. 최대한 쌈빡한 이름으로 부탁드려요.]
“응. 토끼라고.”
[……네?]
“……왜?”
[……?]
그렇게 이름이 정해졌다.
<상태 창>
이름 : 토끼
칭호 : 중급 관리자
체력 : 100/100 (%)
포만감 : 100/100 (%)
네임리스였던 이름 항목에 ‘멋진 이름’이 추가되어 있었다.
[으아악! 이게 뭐야! 이러면 다를 게 없잖아-!]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하고 토끼는 절규했다.
아주 잠시…… 슬프고 아련한 꿈을 꾼 기분이었다.
<두 번째 신전이 훌륭히 완성되었습니다. 신전이 추가되면서 새로운 기능들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새로운 기능들이라고?”
솔깃한 말이었다.
<먼저 신전의 관리자 채널이 확장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사도들과 관리자들과의 동시 귓말이 가능해집니다.>
“응?”
아니,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윤진수가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이거 혹시! 단톡방 말하는 거 아니에요? 여럿이서 동시에 대화가 가능한?”
“아!”
바로 그 말이었다.
모두의 눈이 반짝였다.
“좋은데?”
“그러게?”
인터넷도 전화기도 없는 던전에서 서로 연락 가능한 수단이 생긴다는 건 아주 좋은 일이었다.
그런 데다 추가로 생각만으로 ‘여럿이서’ 의사를 주고받을 수 있다고?
“전투 시에 손발을 맞추기가 엄청 편리하겠는데?”
“그러게. 용의 사도 엄청 좋은 거구나.”
<……다들 제물을 바치는 건 안중에도 없나 보군요.>
알파는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