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69)화 (69/393)

<던전리셋 69화>

*   *   *

“이건 미친 짓이야.”

구호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정다운이 하는 일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막사 구석에서부터 땅굴을 파 들어가고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흙 뭉치기! 흙 뭉치기! 흙 뭉치기!”

푹팍 푹팍!

“땅은 위험하다고! 여긴 망자의 땅이야. 언제 갑자기 망자 비석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라고!”

뚝.

구호열의 말에 정다운은 땅굴 파기를 잠시 멈추고 흥명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석이 땅속에서도 나올지는 파 봐야 알죠!”

“아니, 비석이 없더라도! 땅속에 해골 병사들이 묻혀 있을 거 아냐!”

“아직까진 안 보이는데요? 게다가 이 마을은 원래 비석 안 생긴다면서요. 그럼 이 아래도 없겠죠, 뭐.”

“아오, 답답해. 그게 계속 그럴지 어떻게 알아? 갑자기 땅굴 파는 옆에서 누가 쑤욱 튀어나오면 어쩌려고 그러지?”

구호열은 동의를 구하기 위해 애절한 눈빛으로 류호열과 윤진수를 쳐다봤다.

“애들아. 누가 쟤 좀 말려 봐. 지금 나만 걱정돼? 내가 너무 꼰대인 거야?”

그에 류승우가 특유의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달랬다.

“호열 형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서 다운이한테 갑옷 단단히 입혀서 내려보냈잖아요. 혹여나 괴물들이 나와도 몇 번은 방어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요, 아저씨. 그만 포기하고 이거나 도와요. 일하기 싫어서 걱정하는 척하는 거 다 알아요.”

“아니, 난 그게 아니라…….”

정곡을 찌르는 윤진수의 말에 구호열은 금세 시무룩해져서 그들 옆으로 다가가 털푸덕 주저앉았다.

그러곤 진짜 하기 싫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진짜 곰손이라 이런 거 너무 어렵다니까 그러네.”

“어른이 돼서 자꾸 핑계나 댈 거예요?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랬어요. 오늘 쌀밥 먹기 싫어요?”

“…….”

따박따박 옳은 말만 골라서 하는 초딩의 말에 사십 먹은 아재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렇다.

사실 그들은 지금 정다운이 맡긴 중대한 사명을 수행하고 있었다.

바로 벼 탈곡!

저번 날 정다운이 구해 온 벼에서 오늘 먹을 쌀을 거두고 있었던 것이다.

많이도 필요 없이 딱 오늘 저녁에 먹을 한 끼분이 목표였다.

“다운이 형이 이게 진짜 쌀인지 직접 확인해 봐야 한댔잖아요. 아저씨는 안 궁금해요?”

“그래. 나도 너무 궁금해 죽겠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

“자, 형님. 여기 이거 이렇게 손바닥으로 싹싹 비비시면 돼요. 껍데기가 다 벗겨질 때까지요.”

류승우가 나락(껍데기가 있는 쌀) 한 줌을 구호열의 손에 꼬옥 쥐여 주었다.

따뜻했다.

어젯밤 정다운이 설치해 둔 태양석인지 뭔지로 열심히 벼를 건조시킨 덕분이었다.

“형님. 다운이가 그러는데 막 추수한 나락은 원래 수분이 많아서 바짝 건조부터 시키고 껍데기를 까야 우리가 아는 ‘쌀’이 되는 거래요. 너무 신기하지 않아요?”

“쟤는 뭐 그런 걸 다 알고 있대?”

“어릴 때 시골 살았었대요.”

류승우는 대화하면서도 몹시 성실하게 나락을 비비고 있었다.

스킬까지 썼는지 속도도 몹시 빨라서 거의 인간 탈곡기 그 자체였다.

구호열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승우야, 넌 이거 재밌나 보다.”

“네. 이러고 있으니까 마음이 차분해지는 게 참선하는 기분이에요. 혹시 적성에 맞는 걸까요?”

그렇게 말하곤 본격적으로 각 잡고 앉아 나락을 비비는 류승우.

그 모습이 너무 경건하고 안정적이어서 저대로 해탈이라도 할 기세였다.

구호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휴, 얘도 정상은 아니야. 이놈이나 저놈이나.”

[지금 아저씨 마음은 내가 아주 잘 알죠.]

답답해하는 구호열의 곁에 토끼가 나타나 세상 다 산 노인네의 표정으로 어깨를 토닥였다.

이쪽은 이미 해탈한 지 오래였다.

[저 오류 종자가 땅을 팔 땐 아무리 말리고 윽박질러도 소용없어요. 본능 같은 거니까요. 거의 지렁이임.]

“지렁이라니, 너무하네!”

밑에서 정다운이 발끈했다.

마침 흙층이 끝나고, 그 밑으로 단단한 암석층이 나타나 잠시 멈춘 참이었다.

그는 곡괭이를 꺼내며 말했다.

“지렁이는 돌도 못 깨잖아! 돌 깨기! 돌 깨기!”

[너무한 부분이 그거였음!?]

“돌 깨기! 돌 깨기!”

쩌적! 쩍! 쩍!

돌 깨기 마스터 정다운의 앞에선 돌이나 흙이나 모두가 공평했다.

게다가 그는 더 이상 망치로 쇠꼬챙이 머리를 쳐서 번거롭게 돌을 깨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얻은 1강 무기들 중 가장 먼저 챙겨 둔 게 바로 이거였다.

[무쇠 곡괭이 +1]

- 내구도 : 23/100(%)

- 옵션 : 단단함(1레벨)

“크으! 역시 광산 일에는 곡괭이가 딱이구나!”

조금 무겁긴 하나 한 번만 휘둘러도 스킬을 쓸 수 있다는 건 너무 좋았다.

아니, 지금 무겁다고 했나?

<곡괭이가 무거우십니까? 그렇다면 바로 옵션을 추가하시죠.>

“그럴까?”

역시 제물을 많이 받아먹었더니 알파도 통이 커졌다.

무슨 홈쇼핑 광고처럼 즉석에서 강화를 추천하는 게 아닌가.

그 말에 정다운은 주저 없이 게이트를 열고 생명의 신전으로 건너가 바분에게서 훔쳐 온 제단 앞에 섰다.

“강화 시스템 오픈!”

<강화 시스템>

- 옵션 1 : 단단함 (2레벨)

- 옵션 2 : 가벼움 (1레벨)

- 옵션 3 : 방수 (1레벨)

곡괭이의 강화 가능한 옵션들 중에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어 있었다.

이 옵션들은 ‘깃털 장화’를 제물로 바쳐서 신전에 등록된 옵션들이었다.

“가벼움과 방수가 추가됐구나. 근데 방수는 왜 곡괭이 옵션에 껴 있지?”

<녹 방지 기능이 아닐까요?>

“그럴싸하네. 그렇다면…… 가벼움.”

정다운은 주저 없이 곡괭이에 가벼움을 추가해 2강을 만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곡괭이를 빗자루처럼 가볍게 붕붕 돌리며 스킬을 쓰기 시작했다.

“자, 그럼 계속 파자! 돌 깨기! 돌 깨기! 오오, 가벼워!”

돌 깨기 마스터의 손에 가볍고 단단한 곡괭이가 들리자, 이 땅에 진정한 석신(石神)이 도래했다.

아니, 차라리 땅의 신이라 부르는 게 더 어울릴 것이다.

쿵! 쾅! 쩍! 쩌적!

어차피 천장이 암석층이라 무너질 걱정도 없었다.

혹시 몰라 열을 맞춰 돌기둥들을 남겨 놔 천장을 받치게 했다.

그렇게 지하 공간이 엄청난 속도로 넓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10평, 20평이던 곳이 점점 넓어지다가, 그 넓이가 무려 100평을 넘겼다.

아차 싶어서 손을 멈췄다.

“어이쿠, 너무 넓나? 마을에 갑자기 싱크 홀 생기는 거 아닌가 몰라.”

<괜찮습니다. 지반도 충분히 견고하고, 기둥도 많고. 무엇보다 신전은 넓을수록 좋습니다.>

“아하, 그렇군? 그렇다면 돌 깨기! 돌 깨기!”

쩌적! 쩍! 쩍!

알파의 욕심은 끝이 없고, 정다운은 같은 작업을 반복한다.

그러다 지하 공간이 슬슬 200평이 넘어갈 때쯤.

위에서 윤진수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형! 쌀 다 깠어요! 이제 뭐 하면 되죠!?”

정다운이 작업을 멈추고 소리쳤다.

“그럼 밥 차려야지! 거기 누구 밥 할 줄 아는 사람 있어?”

“호열 아저씨가 낚시 다니면서 야외에서 밥 많이 해 봤대요!”

“오케이! 그럼 나머지 둘은 계단으로 내려와!”

“예이!”

계단이야 이미 땅굴을 파면서 완벽히 세팅되어 있었다.

류승우와 윤진수는 땅굴 계단을 밟고 내려오다가, 뻥 뚫린 지하 공간의 스케일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우리 불렀…… 헉? 언제 이렇게!?”

“우와……! 여기 뭐야? 여기 원래 동굴이라도 있었어요?”

천연 동굴이라고 하기엔 지하 공간이 너무 인공적으로 네모난 형태였다.

게다가 천장 곳곳에는 태양석이 콕콕 박혀 있어서, 지하인데도 불구하고 대낮처럼 환했다.

정다운은 그 한가운데 서서 곡괭이를 어깨에 턱 걸치며 말했다.

“자, 이제부터가 중요하니까 좀 도와줘야 돼.”

“우리가 도와줄 일이 있어?”

“응. 이제부터 여기 바닥에 흙을 깔 거거든. 혹시 모르니까 형이랑 진수가 무기 들고 양쪽에서 경계 좀 서 달라고.”

“흙을 깐다고? 아, 여기서도 비석이 나올까 봐 그러는 거구나.”

“정확해.”

정다운이 우려하는 것이 바로 그거였다.

기껏 신전을 지어 놨더니 괴물들이 소환되면 큰일이었다.

정다운은 바로 소지품 창을 열었다.

그러곤 ‘벼가 자라는 흙벽돌’(99)을 밖으로 꺼냈다.

휙! 척!

휙! 척척척척척!

정다운의 손짓에 따라 흙벽돌이 가로 세로 줄지어 나열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신전 터에 벼가 쭉쭉 심겨진 네모난 ‘논’이 탄생했다.

“짠. 벼 농장 완성.”

“와…….”

감탄이 절로 나오는 마법과도 같은 광경!

하지만 순수하게 감동하고 있는 윤진수와는 다르게 류승우는 유심히 정다운의 손짓을 관찰하고 있었다.

“어제 막사 리모델링할 때도 봤지만, 이건 스킬이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소지품을 이용한 거야?”

역시 류승우였다. 겨우 두 번 만에 이 기술의 정체를 정확히 알아본 것이다.

“응. 그냥 물건 꺼내는 요령이야. 형도 연습하면 될걸?”

“흠. 나도 되려나? 줄지어 바닥에 내려놓는 방식이지? 아니, 던져 놓는 건가? 휙 하고 휙. 흠…….”

류승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소지품 창 앞에서 손을 계속 까딱였다.

하지만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에 토끼가 딴지를 걸었다.

[뭔 부질없는 연습임? 어차피 님은 흙덩이 들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어따 쓰겠어요.]

“하긴.”

류승우는 쿨하게 미련을 털어 버리고 논 옆으로 가서 섰다.

“아무튼 다운아. 우리는 여기서 이 논에 비석이 올라오나 안 올라오나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거지?”

“놀면 뭐 해? 지켜보면서 쭉정이도 좀 골라내 줘.”

“음?”

정다운이 손가락으로 논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위엔 벼만 심겨져 있는 게 아니었다.

오동민이 발견한 곳을 통째로 뽑아 온 거라서, 원시 상태 그대로 쭉정이들과 잡풀들이 한데 섞여 제멋대로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저대로 놔두면 쌀로 들어갈 양분을 쭉정이들이 다 뺏어 갈 거야. 그럼 밥맛이 없어지니까 벼만 남기고 다 뽑아 줘.”

“오케이. 맡겨 둬.”

류승우는 군말 없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논 위로 들어갔다.

몸 쓰는 일은 자신 있었다.

그러면서 윤진수에겐 별도의 지시를 내렸다.

“진수야, 넌 위험하니까 따라 들어오지 말고 멀리 떨어져서 엄호만 해 줘. 언제 비석이 나타날지 모르니까.”

“예압!”

그 말에 윤진수는 바로 뒤로 물러나 진지한 표정으로 원거리 공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해골 병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비석도 올라오지도 않았다.

결정적으로 땅 위에 식물이 자라고 있는데도 부패되지 않고 있었다.

[오, 여긴 저주의 영역이 아닌가 본데요? 땅속이라 그런가, 아니면 마을 아래라서 그런가.]

“뭐든 상관없지. 아무튼 다행이야. 그럼 여기에 신전을 만들어도 안전하겠는데?”

정다운은 곧바로 제단을 이쪽으로 옮겨 왔다.

그리고 논에서 멀리 떨어진 적당한 곳에 위치를 잡았다.

“이쯤이 어떨까?”

<미흡하긴 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기둥과 기둥 사이.

천장과 바닥 사이.

다소 투박하지만 고대의 파르테논 신전의 내부가 어쩌면 이렇지 않았을까?

아기자기한 맛은 없어도 정다운은 이 투박함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토끼야, 이렇게 보니까 여기 무슨 전설에나 나오는 버려진 지하 도시 같지 않아?”

[그러게요. 여기서 해골 병사들까지 기어 나오면 딱 어울렸을 텐데, 아쉽네요.]

“어차피 돌바닥이라 나오고 싶어도 못 나올걸?”

낄낄대는 토끼를 뒤로한 채 정다운은 제단 앞으로 가서 섰다.

그러곤 그 위에 손을 올리고 심호흡을 했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는 선포할 차례.

그가 말했다.

“이곳을 생명의 용 에르테아의 두 번째 신전으로 선포한다.”

번쩍!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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