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60)화 (60/393)

<던전리셋 60화>

당연한 말이지만 땅속은 어둡다.

땅 위도 밤이 되면 칠흑처럼 어두워진다.

그래서 언제나 정다운에게 횃불은 필수품이었다.

땅굴에서는 항상 횃불을 들고 다녀야 했고, 중요한 길목에는 전등처럼 횃불을 꽂아 두곤 했다.

하지만 횃불은 기름이 다 닳으면 꺼지기 마련.

그때마다 일일이 기름을 리필해 주는 건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다.

게다가 횃불이 타면서 산소를 잡아먹으니 환기구도 항상 신경 써야 했다.

그런데 만약 이 태양석으로 횃불을 대체한다면, 그 모든 수고로움을 다 생략할 수 있었다.

“돌 깨기!”

쩌적!

정다운은 실험 삼아 동굴 한 구석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 태양석 한 덩어리를 올려놨다.

그러자 횃불 못지않은 밝기로 주변이 확 밝아졌다.

“좋은데!?”

이름 그대로 진짜 태양처럼 이글이글 불타는 건 아니지만, 한가로운 오후 창가로 내리쬐는 따스한 햇볕 느낌이다.

말하자면 자연광에 가까웠다.

“이쯤 되면 거의 에디슨 전구 수준의 대발견인데? 여기저기 박아 놓으면 엄청 환하겠다.”

횃불처럼 공기 중의 산소를 잡아먹을 염려도 없어서 더 편했다.

정다운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둥지에 있는 태양석을 전부 챙겼다.

게다가 생각해 보니 여기는 리셋이 적용되는 곳 아닌가!

그 말은 이렇게 다 싹쓸이해 가도 나중에 다시 살아난 그리피오스가 또 이만큼의 태양석을 둥지에 모아 둘 거라는 뜻이었다.

“앞으로 스케줄을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

현재 정다운이 던전이 리셋될 때마다 반복하는 스케줄은 이러했다.

1. 최종 보스 골렘 훔쳐 오기.

2. 보스 룸 앞에 있는 외뿔 멧돼지 전부 잡아 오기.

3. 연못에서 물고기 잡아 오기.

4. 물엿 꽃(식인 꽃) 뽑아 오기.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시켰다.

5. 그리피오스 둥지에서 태양석 훔쳐 오기.

“앞으로는 리셋 때마다 꼬박꼬박 여기 들러야지.”

<설마 이곳을 또 방문하실 생각이십니까? 위험합니다. 그리피오스는 절대 우습게 볼 괴물이 아닙니다.>

“처음이 어렵지, 이젠 요령이 생겼으니까 문제없다고.”

굳이 범독수리처럼 용맹해졌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는 더 이상 범독수리가 두렵지 않았다.

애초에 직접 힘겨루기로 싸울 생각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이번처럼 곳곳에 게이트들을 미리 설치해 두면, 이 동굴 전체가 그리피오스를 위한 함정이 되는 것이었다.

“역시 사람은 밝은 데서 살아야지. 햇빛을 받아야 기분도 좋고, 비타민D도 생기고.”

게다가 이게 진짜 태양빛이라면, 다른 용도로도 활용이 가능했다.

그의 시선이 아까 자신을 위험에 빠뜨렸던 이상한 식물에게로 향했다.

“알파, 저거 아까 이름이 뭐랬지?”

<비명초라고 합니다.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특별한 소리를 질러 공포심을 자극하는 불길한 식물입니다.>

“공포심을 자극한다고?”

<아까 보시지 않았습니까. 비명 소리를 듣고 범독수리마저 겁을 먹은 것을.>

“아, 어쩐지 아까 꼬리까지 말더라니. 나 때문에 놀라서 그런 게 아니었구나. 나야 이미 겁먹은 상태였고.”

그러면 그리피오스는 공포심을 느끼고도 그렇게 덤벼들었다는 건가? 역시 용맹한 범독수리다웠다.

그보다 풀이 비명을 지른다니, 역시 이 세계엔 신기한 게 참 많다.

하지만 그가 더 신기해하는 건 비명초가 동굴에서 자라는 것치고는 너무 파릇파릇하고 싱싱하다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이거 태양석 때문에 이렇게 잘 자란 건가?”

<그럴 겁니다. 본래 비명초는 햇볕이 잘 드는 무덤가나 교수대 밑에서 발견되는 불길한 식물입니다.>

알파가 자꾸 불길한 걸 강조했다.

“그러게. 불길하네. 햇볕이라고?”

말과는 다르게 그의 눈은 웃고 있었다.

그 말은 결국 태양석 빛이 광합성을 시켜 줬다는 말 아닌가.

“이 돌만 있으면 땅속이나 실내에서도 농사를 지을 수 있겠는데?”

<물론 가능한 일입니다. 실제로 옛날에는 지하 미궁 같은 곳에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서 태양석을 사용하곤 했습니다.>

이쯤에서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그런데 비명초는 무슨 맛일까?”

<무슨 그런 불길한 말씀을! 이건 마녀들의 마법 시약입니다!>

그냥 해 본 소리에 알파가 질색하며 말렸다.

하지만 대답은 엉뚱한 데서 들려왔다.

[먹을 만해요.]

“음?”

토끼가 입맛을 다시며 다가왔다.

뒤를 보니 어느새 범독수리 깃털이 다 뽑혀 있었다.

[에헴. 내가 또 깃털 뽑기의 달인임.]

“너 비명초 먹어 봤어? 언제?”

[흔하진 않지만 스테이지-1에도 조금 자라거든요. 저번에 깻잎 뜯고 다닐 때 궁금해서 한번 먹어 봤어요.]

“맛은 어때?”

[좀 떫긴 한데, 오래 씹고 있으면 의외로 달달한 맛이 나더라고요.]

<그런 거 가르쳐주지 마십시오!>

[참가자들 중에 워낙 먹을 게 없다 보니 비명초까지 뽑아 먹는 사람들도 있었거든요. 아마 정화 스킬 걸면 뽑을 때 비명도 안 지를걸요.]

“오호?”

솔깃한 말이었다.

토끼의 말대로 풀 위에 정화를 걸고 조심히 하나를 뽑아 보니, 의외로 그 밑에는 익숙한 모습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무잖아?”

중간에 사람 입처럼 생긴 주름이 있는 것 외에는 평범한 무였다.

눈이라도 달렸으면 징그러웠을 텐데 입만 있어서 의외로 귀여웠다.

어쩐지…… 신용 없어도 대출을 해 줄 것 같았다.

거두절미하고 깍둑썰기로 썰어서 먹어 봤다.

맛도 무였다.

정다운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제길. 식초가 있었으면 치킨 무도 만들었을 텐데.”

세상 서러웠다.

*   *   *

자, 그럼 이제 그리피오스 치킨을 만들어 보자.

정말 오랜만에 보는 닭, 아니, 새고기다 보니 정다운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해 먹어도 다 맛있을 것 같았다.

구워 먹으면 굽네 독수리.

연기로 익히면 훈제 독수리.

물에 삶으면 삼매탕(?).

“마늘이 없으니까 삼매탕은 패스하고, 굽네랑 훈제 둘 다 해 먹자고.”

앞다리와 날개밖에 없어도 그 양이 엄청나게 많아서 이것저것 다 해 먹어 보기로 했다.

[난 뭘 하면 되죠!?]

두근두근!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표정으로 보조를 자처하는 토끼를 보며 정다운은 웃음이 났다.

“일단 씻어서 먹기 좋은 사이즈로 나누자.”

그렇게 요리가 시작되었다.

<주재료>

그리피오스의 앞다리와 날개

 

<요리 순서>

1) 올리브유에 소금, 설탕, 향긋한 풀을 넣어 소스를 만든다.

2) 고기에 소스를 앞뒤로 꼼꼼히 발라, 간을 맞추고 비린내를 잡는다.

3) 넓은 나뭇잎으로 고기를 포장한 후, 하루 정도 서늘한 곳에 재워 둔다.

4) 뜨겁게 달군 그릴 위에 올리고, 훈제 중간중간 올리브유를 발라 주며 예쁘게 익힌다.

토끼가 고개를 갸웃했다.

[고기를 재워 줘요? 이미 죽은 고기한테 그렇게까지 상냥할 필요 있음?]

“……너도 그냥 자라.”

[히익? 나도 먹으려고요!? 이런 나쁜!]

“…….”

그냥 말을 안 섞는 게 좋겠다.

아무튼 고기가 하루 동안 재워지는 동안, 훈제용 화로를 만들기로 했다.

“온돌 설치!”

[온돌을 설치합니다.]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화로를 통째로 온돌로 만들었다.

그리고 아궁이에 불을 활활 지폈다.

그런데 여기서 알파가 의외의 조언을 했다.

<연료에 태양석을 조금 첨가하시면 화력이 더욱 강해질 겁니다.>

“어? 진짜?”

정다운은 깜짝 놀랐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태양석은 불의 온도를 높여 줍니다. 고대의 대장장이들이 용광로를 만들 때 즐겨 사용했던 연료입니다.>

“와우, 이게 의외로 석탄 같은 거였구나.”

태양석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의외가 아니었다.

괜히 태양의 조각이라고 불리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럼 어디 한번?”

알파의 말대로 태양석을 잘게 조각내서 아궁이 안에 집어넣어 봤다.

그러자 효과는 대단했다.

타닥타닥.

화르륵!

“앗뜨!”

갑자기 뜨거운 열기가 확 얼굴을 덮치자, 정다운은 깜짝 놀라며 뒤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런데 머리 타는 냄새와 함께, 졸지에 앞머리가 뽀글뽀글해져 버리고 말았다.

토끼가 깔깔거렸다.

[푸핫! 스타일 죽이네요. 평생 그렇게 사셈.]

“아씨, 남자는 머리빨인데.”

정다운이 울상을 지으며 아궁이를 노려보자, 그 안에선 시뻘건 불길이 뱀의 혀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력이 대단했다.

그 모습에 알파가 흡족해하며 말했다.

<좋군요. 보고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납니다. 고대의 대장장이들은 이런 식으로 화력을 끌어 올려 전설의 무구를 제련하곤 했습니다.>

“응? 전설의 무구? 나 지금 그냥 치킨 구워 먹으려는 중인데, 왜 갑자기 그리 거창한 말을……?”

정다운이 떨떠름하게 이견을 제시했지만 알파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사실 불을 다루는 것이야말로 대장장이의 기본 중의 기본. 그런데 당신은 온돌 스킬로 화력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으니, 대장장이로서의 첫걸음을 뗀 셈입니다.>

“저기요? 나 지금 그냥 요리 중이라니까? 뭔 대장장이……?”

[흠, 역시 그렇게 되나.]

그 말에 토끼가 옆에서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흙 다음엔 돌. 이번엔 금속까지 녹일 수 있게 되다니. 님은 역시…….]

“역시 뭐?”

[뼛속까지 생산직이었어. 과녁은 개뿔.]

“…….”

이런 젠장?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니, 이쯤 되면 그냥 원시인인 아님? 인류의 기원을 혼자 찍고 계시네.]

토끼는 결국 한 대 맞았다.

*   *   *

며칠 후.

[히잉, 나 지금 눈물 나려고 그래요.]

“뚝 하고 먹어.”

[어떻게 그래요. 눈물 나게 맛있는데…….]

으어엉.

으냠냠냠.

정다운과 토끼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그리피오스 치킨을 뜯어 먹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맛있습니까?>

먹방계의 소외 계층 알파가 어리둥절해서 묻는 말에 그들이 동시에 소리쳤다.

[치킨은 진리임!]

“진리지!”

<벌써 며칠째 같은 음식만 먹고 있는데도 안 질리십니까?>

“네가 반년이 넘도록 치킨을 굶다가 먹는 기분을 알아?”

<……?>

정다운은 벌써 며칠째 치킨을 손에서 안 놓고 있었다.

계단을 깨는 중에도 쉬지 않고 날름날름 꺼내 먹었다.

범독수리처럼 용맹해진 덕분인지, 더 이상 낭떠러지가 무섭지 않아서 여유만만이었다.

그리피오스의 고기는 육질이 정말 환상적이었다.

한입 물면 쭈우욱 결을 따라 찢겨지는 이 다리 살은 아주 사람을 그냥 미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의외로 사자처럼 생긴 부위는 너무 질겨서 먹기가 힘들었다.

맛을 떠나서 무슨 생 타이어를 씹는 것처럼 턱이 너무 아팠다.

결국 그 부위는 전부 제물로 바쳐 대량의 생명 에너지로 바꿔 버려 알파만 희희낙락이었다.

그보다 오늘은 사실 특별한 날이었다.

무슨 날이냐면, 바로 정다운의 오랜 노가다가 결실을 맺는 날이었다.

“돌 깨기!”

쩌적!

지난 두 달간 대장정의 마지막 계단이 지금 막 완성되고야 말았다.

그렇다! 드디어 그들이 죽음의 산맥에서 내려온 것이다!

“크으, 드디어 도착!”

지상에 첫발을 디딘 정다운은 손으로 콧잔등을 쥐고 고개를 쳐들었다.

“아씁, 나 눈물 날 것 같아.”

[이건 그냥 웁시다. 이 징그러운 인간아. 진짜로 죽음의 산맥을 넘어올 줄이야. 이런 건 업적 같은 거 안 주나?]

“그러게. 인간적으로 뭐 하나 좀 주지.”

[이건 솔직히 던전이 잘못했네. 뭐라도 좀 주지. ‘죽음의 산맥 정복!’ 같은 업적이라든가, ‘걸어서 저 땅끝까지!’라든가. 누가 제발 이 징한 인간한테 별점이라도 좀 주자.]

토끼조차 감동할 만한 업적인데, 던전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하지만 결실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번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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