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58화>
정다운은 들키기 전에 어떻게든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덜덜덜덜.
몸이 사시나무 떨 듯이 떨려 왔다.
아무리 용감한 사람이라도 이 끔찍한 살기를 정면에서 마주하게 되면 다들 이런 꼴이 될 것이다.
하늘의 무법자 범독수리 그리피오스는 그런 존재였다.
‘최대한 소리 없이 돌아가야…….’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데,
꾸욱.
무언가를 밟고 말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갑자기 발밑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삐이이익-!
“엄마야!?”
화들짝 놀라서 발밑을 보니 이 동굴에 어울리지 않게 녹색의 이파리들이 자라고 있었다.
아니! 바위에서 자라는 풀이라니?
<비명초입니다! 밟으면 소리를 지르는 괴물 식물이에요!>
이런 미친!
‘왜 하필 그런 게 여기에 자라고 있어!?’
<원래 음기와 양기가 혼재된 곳에서 자라는 식물인데, 옛날엔 보통 마녀의 시약으로 썼습니다!>
그런 설명 하나도 안 궁금하고, 그냥 운도 지지리 없었다!
놀란 건 그리피오스 쪽도 마찬가지였다.
“캬하악……!”
정다운을 발견한 그리피오스는 흉악한 이를 드러내며 전신의 털을 바짝 곤두세웠다.
어찌나 놀랐는지 꼬리털까지 빳빳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는데, 정작 꼬리는 밑으로 말아 감춘 상태!
영락없는 겁먹은 고양이 꼴이었다.
하지만 그 덩치가 2층짜리 주택 수준이다 보니 절대로 귀여워 보이지 않았다.
그 압도적인 공포를 마주한 정다운은 거의 패닉이었다.
‘어, 어떡하지!?’
‘크르릉!?’
서로 당황한 상황!
그리피오스도 갑자기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그 모습 그대로 꼼짝하지 않았다.
날개는 화살에 찢겨 넝마가 되었고, 몸은 여기저기가 마비되어 둔해졌다.
하늘의 포식자 범독수리가 꼴사납게 추락사로 죽을 뻔한 것이다.
한데 간신히 절벽에 발톱을 박아 넣어 둥지까지 기어 올라왔더니, 자신의 보금자리에 불청객이 있었다.
그렇게 숨 막히는 대치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갑자기 눈치도 없이 토끼가 뒤에서 낄낄거리며 나타났다.
[크으! 그 명장면을 안 보시다니! 그 꼴을 님도 같이 봤어야하는데! 내가 그리피오스를, 어? 화살을 쫙! 어? ……어?]
우뚝?
자신의 무용담을 생색내기 위해 밑으로 내려온 토끼도 그리피오스를 발견하고 고장 난 로봇처럼 딱 멈춰 버렸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정다운은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건 그리피오스도 마찬가지!
저 토끼야말로 조금 전 자신을 죽을 뻔하게 만든 주범 아니던가!
놈이 극도로 분노하며 달려들었다.
“크르렁!”
“으악!? 골렘들 출동! 앞을 막아!”
“크워어!”
“오옴!”
그리피오스의 앞을 7기의 흙 골렘들이 용맹하게 막아섰다.
“크르렁!”
퍼억! 콰직!
상처 입은 맹수는 평소보다 더욱 무자비하게 골렘들을 뭉개 버렸다.
토끼가 감탄했다.
[과연 스테이지-4는 클래스가 다르구나! 시골에서 상경한 최종 보스 따위는 한 방에……!]
“넌 누구 편이야?!”
[헐, 맞다!? 흙돌이들 이겨라! 어차피 여긴 날기도 힘드니까 우리가 유리해! 치사하게 숫자로 밀어붙이자!]
퍼뜩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토끼가 바위 뒤로 몸을 숨기고 쌍수를 흔들며 골렘들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녀석의 난리 브루스에 정다운은 완전히 제 페이스를 찾았다는 것이었다.
“게, 게이트 설치!”
파앗!
[게이트를 설치합니다.]
조금만 동굴을 거슬러 올라가면 게이트가 있는데도, 도저히 거기까지 갈 정신이 없었다.
항상 에너지 절약을 강조하던 알파조차 이번엔 아무 말 못 하리라!
<몇 발자국만 더 가면 게이트가 있습니다!>
하는구나!?
정다운이 소리쳤다.
“알파! 여기로 함정도 통과할 수 있어?”
<물론 가능합니다. 화살 발사대를 이쪽으로 꺼내 오시려는 겁니까?>
“그럴 시간 없어!”
그 어느 때보다도 머리가 핑핑 돌아가고 있었다.
괜히 시간 끌다간 골렘들만 다 잃게 생겼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피오스의 강인한 근육과 발톱이 흙 골렘들을 모래성 허물 듯이 박살 내고 있었다.
저러다 핵이 손상 가기라도 하면 끝장!
“잠깐 다녀온다!”
그는 곧장 게이트 안으로 뛰어들었다.
[와, 자기만 도망치기냐?! 나도 같이 가요!]
깜짝 놀란 토끼가 그의 뒤를 따라 게이트로 발을 들이려는 순간, 툭 하고 정다운이 다시 나타났다.
[응? 왜 돌아왔……?]
뭐라도 들고 왔나 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정다운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골렘들, 엎드려!”
그 말에 골렘들이 싸우다 말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밟혀 죽더라도 상관없다는 그 모습에 그리피오스는 주저함 없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크르렁!”
놈의 목표는 이 집요한 침입자들을 다 짓이겨 버리고, 저 뒤에 숨어 자꾸 시끄럽게 구는 작은 인간 놈까지 한입에 꿀꺽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리피오스와 새로 열린 황금빛 게이트가 딱 일직선상에 놓였다.
이때를 기다렸다!
정다운이 소리쳤다.
“발사!”
쐐애액!
그 순간 갑자기 게이트 안에서 무수한 화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크히익!?”
표뵥!
퓨바바박!
난데없이 시작된 화살 세례에 그리피오스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로 직접적으로 뚫고 들어오는 관통 옵션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토끼조차 당황했다.
[헐? 이거 뭐임? 뭔데?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화살 발사대 바로 앞에 게이트를 설치하고 오셨습니다!>
[……으잉?]
토끼의 표정이 순간 멍해졌다.
그러니까 지금…… 저 위에서 쏜 화살들이 게이트를 통과해 이쪽으로 넘어오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 이렇게 무식한 방법을!?]
<그러게 말입니다!>
알파는 울고 싶은 심경이었다.
게이트는 절대 공짜가 아니다.
사람이든 골렘이든 단일 개체가 게이트를 통과할 때마다 생명 에너지가 계속 소모되는 것이다.
일종의 통행료인 셈.
그런데 지금 화살 하나하나마다 그 통행료가 전부 붙고 있었다!
<이렇게 비효율적인 방식이라니, 차라리 함정을 가져오시지!>
태생부터 관리자인 알파나 토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치의 극치!
“내 입장에선 골렘들이 더 비싸!”
그 비싼 골렘들은 지금 정다운의 명령에 따라 엉금엉금 바닥을 기어서 이쪽으로 피신해 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그리피오스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어찌나 고통스러운지 동굴들을 다 무너뜨릴 기세였다.
“크르락! 크르렁!”
쿵쾅! 콰쾅!
하지만 점점 체내에 누적되고 있는 마비 독 때문에 처음에 비해 확실히 움직임이 둔해져 있었다.
어떻게든 화살 세례를 피해 보려고 발버둥을 쳐 봤지만, 날개가 찢겨서 동굴 밖으로 나가는 건 애초에 불가능!
그리고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정다운이 아니었다.
덜덜 떨리는 다리를 질질 끌고, 퇴로를 흙벽돌로 꽉꽉 막아 버렸다.
그리고 다시 다른 위치로 이동해 게이트를 추가로 하나 더 설치했다.
[게이트를 설치합니다.]
그리고 게이트 경로를 바꿔서 이쪽에서도 화살들이 나오게 설정했다.
그러자 그리피오스의 움직임을 따라 화살들이 양쪽에서 번갈아 가며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쐐애액!
퓨뷰뷱! 파바바박!
“크라락!”
‘좋았어! 하나 더!’
[게이트를 설치합니다.]
자, 이젠 게이트 세 개!
각도도 세 군데!
이것이 바로 화살 샤워!
“크히익!”
화살이 다 떨어져 중간중간 리셋도 했다.
토끼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자, 잔인해……. 내 생전에 그리피오스를 동정하게 될 줄이야.]
반면에 정다운은 신이 났다.
‘와, 이거 진짜 쩌는데? 이러니까 완전히 전투 스킬 같잖아!’
요즘 점점 스킬은 늘어나는데, 그중에 제대로 된 전투 스킬은 하나도 없어 아쉬운 참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남부럽지 않은 전투 스킬이 탄생해 버린 것이다!
‘물론 에너지 효율이 똥망이라 자주 쓸 순 없어도, 이 정도면 엄청 멋진 원거리 스킬 아닌가!?’
덜덜덜덜.
여전히 사시나무 떨 듯이 전신이 떨리고 있었지만, 표정만은 의기양양했다.
상대는 범독수리 그리피오스.
원래라면 겨우 화살 따위로 상대할 수 있는 괴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무수한 말벌들에게 원산폭격을 당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하필 그 벌침들에는 저마다 관통과 마비 독 옵션이 걸려 있어서 그 충격을 배로 증폭시키고 있었다.
그 결과…….
“크하악!”
얼마 후, 그리피오스가 눈을 까뒤집으며 거대한 동체가 무너지고 말았다.
쿠우웅-!
산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 동굴을 뒤흔들었다.
그 순간 동굴 안으로 숨 막히는 적막이 찾아왔다.
[……주, 죽었음?]
토끼가 입을 열었고, 대답이 들려왔다.
<업적 달성!>
“범독수리 사냥꾼!”
하늘의 무법자 그리피오스를 사냥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당신의 뛰어난 기개와 용맹스런 무용담에 던전이 승리의 나팔을 붑니다.
- 보상 : 범독수리처럼 용맹해집니다.
<최초 업적 달성!>
“날아가는 새를 화살로 잡다!”
당신의 화살이 하늘의 무법자 그리피오스를 추락시켰습니다!
당신의 소름끼치는 활 솜씨에 던전이 경악합니다.
- 보상 : 앞으로 당신의 눈에 ‘과녁’이 보입니다.
“자, 잡았다!”
정다운은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성을 질렀다.
[헐. 업적이 두 개나?]
토끼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래도 이번엔 충분히 이해가 되는 정상적인(?) 업적이었다.
무려 스테이지-4의 괴물을 사냥한 것이다! 그것도 그리피오스를!
이것은 실로 엄청난 업적이었다.
정다운도 놀랐다.
“아니, 이 고생을 했는데 겨우 ‘범독수리처럼 용맹해진다.’가 끝이야?”
그 영향인지, 아까부터 덜덜 떨리던 몸은 완전히 진정되어 있었다.
그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이게 다라고? 용감해지고 끝인 거야?”
너무 보상이 형편없어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게다가 최초 업적도 아니라니? 애초에 생긴 것만 무섭지, 스킬도 안 줄 정도로 별거 아닌 괴물이었나 봐.”
[그럴 리가요. 특히 지금처럼 대단한 업적을 냈을 때는…….]
“대단하기는? 아무래도 여기 있는 참가자들은 이 정도 괴물쯤은 다들 쉽게 잡나 봐.”
역시 스테이지-4는 수준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시무룩해진 정다운을 보며 토끼는 할 말을 잃었다.
물론…… 참가자들 중에는 분명 범독수리를 사냥한 사람도 있긴 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스테이지-4에선 아니겠지.’
여기는 스테이지와 외부를 나누는 경계 지역.
보통 이런 데 터를 잡고 사는 괴물들은 애초에 죽이라고 있는 놈들이 아니었다.
참가자들이 던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감당할 수 없는 문지기들을 배치해 두는 것이다.
마치 괴물 쥐들처럼.
바로 그런 놈을…… 정다운이 지금 잡아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 보상이 결코 평범할 리 없었다.
“그래도 화살로 잡은 사람은 내가 처음인가 봐! 이건 최초 업적이네?”
정다운은 두 번째 업적을 보고 표정이 환해졌다.
그런데 내용이?
당신의 소름끼치는 활 솜씨에 던전이 경악합니다.
“……이거 마치 내가 활이라도 쏴서 맞춘 것 같은 말투인데?”
[그러게요. 심지어 추락시킨 건 아까 내가 한 일인데요. 이것도 또 오류인가?]
<함정의 소유권은 온전히 신전의 주인에게 있습니다. 관리자는 그저 거들 뿐.>
다소 오해가 있는 것 같지만, 업적의 내용에는 이상이 없었다.
화살로 죽인 것도 사실이고, 추락시킨 것도 사실이니까.
에너지 효율 면에 있어선 소름 끼치게 사치스럽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 보상도 역시 스킬은 아니었다.
“과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