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56화>
유적지를 무너뜨리는 법?
“무너질 때까지 부수면 되지.”
방법은 참 쉽다.
기둥을 집중적으로 부러뜨리되, 천장을 지지하는 벽을 찾아내 그것부터 작살내면 된다.
무너지는 천장에 깔리지 않게 동선 확보를 하면서, 맷집도 재생력도 훌륭한 골렘들에게 시키면 이처럼 쉬운 일이 또 없었다.
“크워어어!”
“오옴! 오오옴!”
콰직! 우르릉! 콰르릉!
“잘한다! 이쪽 기둥도 부숴!”
“크워어!”
그리고 함부로 건드렸다간 다 같이 깔려 죽을 것 같은 복잡한 구조물들은 정다운이 직접 나서면 그만이었다.
“돌 깨기! 돌 깨기! 돌 깨기! 돌 깨기! 돌……!”
따당! 땅! 땅!
쩌적! 쩍! 쩌저적!
“넘어간다아-!”
쿠르르릉!
보라! 이 뿌듯한 모습을!
견고한 돌벽들이 지진이라도 나듯이 그의 호령에 맞춰서 금을 타고 척척 깨져 나간다!
그동안의 모든 노가다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다 같이 으쌰으쌰 힘을 합쳐 최종 유적지를 파괴하고 있는데,
쿠르릉!
그의 앞에 수많은 메시지가 나타났다.
[<돌 깨기> 스킬이 9레벨로 발전했습니다.]
[<돌 깨기> 스킬이 10레벨로 발전했습니다.]
[최초 업적 달성!]
“유적 파괴자!”
어느 누구도 감히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당신의 업적에 던전이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 보상 : ?????
“……아니, 보상 상태가 왜 이래?”
아무래도 던전도 대체 이런 일에는 무슨 보상을 줘야 할지 생각해 본 적 없던 게 아닐까.
차라리 스킬이라도 주지…….
* * *
쿠르릉!
[……어?]
불타는 늑대 숲 위에서 허둥대고 있던 바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콰르르릉!
저 멀리 최종 유적지가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어, 어어? 저, 저, 저게 뭔!?]
바분은 경악했다.
눈을 씻고 봐도 현실은 그대로였다!
[아니잇-! 유적지는 또 왜 저러는 거야!?]
바분은 목청이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며 유적지를 향해 날아갔다.
저건 또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제단은? 제단은 무사한가!?]
바분은 정신없이 보스 룸이 있던 곳을 헤맸다.
유적지가 무너지더라도 가장 중요한 제단만이라도 구해야 했다!
제단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그동안 애써 모은 생명 에너지가 자연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감.
제단이 있던 보스 룸은 가장 먼저 무너져 있었다.
[아, 안 돼! 제단! 제단은 어디 있는 거야!]
무너진 유적지 위에서 미친 듯이 땅을 파헤치는 바분.
하지만 땅 파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결국 그는 폭발해 버렸다.
[크아악!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광기에 찬 바분의 절규가 스테이지-1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자, 이동 중이던 참가자들의 발걸음이 움찔 멈췄다.
“……와아. 저 도우미가 저렇게 당황하는 거 처음 봤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불안한 표정으로 수군거리는 참가자들.
그 가운데, 진상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단 한 명. 식신 오동민만이 작게 탄성을 터뜨리고 있었다.
‘와아. 형, 진짜 쩐다……. 갑자기 나타나서 나더러 조금만 천천히 이동하라더니, 대체 저 앞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 거지?’
[이제 다 끝났으니까, 숲에 불 좀 꺼지고 들어가면 될 거임.]
깜짝?
‘어? 누구!?’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오동민이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저 멀리 수풀 너머로 촐랑촐랑 뛰어가는 토끼의 뒷모습이 보였다.
시크한 뒷말이 이어졌다.
[흥. 괴물들 다 타 죽어서 이번 놈들은 게임 아주 날로 먹겠네. 나중에 멀쩡한 무기들이 좀 보이면 주워 가든가 해.]
‘아, 넵! 고마워요, 토끼 님!’
[흥, 됐고. 며칠 사이 더 뚱띠해졌네. 대체 얼마나 처먹은 거야?]
‘헤헤. 먹다 보니 포만감 5백 넘었어요.’
[자랑이다, 돼지야. 참고로 늑대 고기는 독성이 있어서 탈 나니까 함부로 주워 먹지 마.]
‘앗, 넵! 감사합니다!’
[흥.]
오동민의 깍듯한 인사에 토끼는 코웃음 치며 그 길로 총총 사라져 버렸다.
살면서 참가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게 될 줄이야…….
괜히 머쓱해진 토끼였다.
* * *
“이걸 어디다 둬야 잘 뒀다고 소문이 날까!?”
용의 신전으로 돌아온 정다운은 희희낙락하며 새로 들여온 가구(?)를 어디에 배치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게 뭐라고 고민해요? 그냥 아무 데나 두면 되지.]
“토끼 넌 너무 주인 의식이 없어. 관리자씩이나 됐으면 신전을 제집처럼 여기란 말이야.”
[앗, 그렇군? 나 관리자였어. 에헴, 그럼 어디다 둘까요?]
퍼뜩 놀라며 얼른 태세를 전환하는 토끼.
이를 지켜보던 알파가 말했다.
<기존의 제단 바로 옆에 두시고, 생명 에너지가 담긴 수정 구슬부터 제물로 바치시지요.>
“그럼 강화 시스템 못 쓰는 거 아닐까?”
<절반 정도만 흡수하고 돌려놓으면 됩니다.>
그 말에 정다운은 골렘들을 시켜 코끼리 등에서 종말의 제단을 내려놨다.
그 위에 둥둥 떠 있는 보랏빛 수정 구슬을 조심히 두 팔로 안아 들자, 안에서 보랏빛 액체가 찰랑였다.
“이게 다 생명 에너지란 말이지? 지금까지 계속 모였던 거면 얼마나 많은 거지? 혹시 이걸로 에르테아도 부활시킬 수 있는 거 아냐?”
<그 정도 양은 아닙니다.>
[맞아요. 턱도 없음. 여기에 계속 쟁여 두는 게 아니라 일정 기간마다 생명 에너지를 상부에 헌납하거든요.]
“그래? 그건 좀 아쉽네.”
<그래도 이 정도면 신전을 복구하기엔 충분한 양입니다.>
정다운은 수정 구슬을 생명의 제단 위로 올리며 외쳤다.
“자아, 제물을 바칩니다!”
파아앗!
그러자 그 순간 수정 구슬 안에 담긴 보랏빛 액체가 황금빛으로 색이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꿀꺽!
황금빛 액체의 절반이 쑥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엄청나군요! 바로 무너진 곳들을 리셋하러 가시지요!>
“오케이!”
그 말에 정다운은 수정 구슬을 다시 종말의 제단 위로 올렸다.
그러자 그 순간,
번쩍!
놀랍게도 종말의 제단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들며, 아까 떠올랐던 업적 창이 다시 나타나는 게 아닌가.
[최초 업적 달성!]
“유적 파괴자!”
어느 누구도 감히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당신의 업적에 던전이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 보상 : ?????
[이건 또 뭐임?]
물음표로 도배된 보상 내용에 토끼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정다운을 쳐다봤다.
[님, 이젠 하다하다 업적 창까지 오류 나게 하셨음?]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아무리 그래도 보상이 없는 건 솔직히 너무한 거 아니냐?”
[너무하기는 뭘. 던전을 파괴한 사람한테 던전이 뭐가 이쁘다고 보상까지 주겠어요?]
“아…… 그런가? 그럼 인정. 내가 미안하네.”
그런데 그때였다.
업적 달성 창의 문자들이 갑자기 엉망으로 흐트러지더니, 완전히 새로운 내용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최초 업적 달성!]
“유적 개척자!”
파괴가 있다면 창조도 있는 법!
잊혀진 유적지를 새롭게 발굴한 당신의 놀라운 개척 정신에 던전이 크게 감탄합니다.
- 보상 : 제단 소유권 이전
[헉.]
<헉.>
번쩍!
모두가 놀라는 가운데, 보랏빛이었던 수정 구슬이 완전한 황금빛으로 변해 버렸다.
“어? 이거 왜 이래?”
종말의 제단에선 은은한 황금빛이 흐르고 있었다.
생명의 제단으로 변한 것이다!
“이래저래 오류투성이네.”
정다운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오류 난 보상 처리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업적이 달성된 듯했다.
그런데 의외로 알파가 엄청 기뻐하는 게 아닌가.
<이럴 수가! 제단의 소속이 우리 쪽으로 넘어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제단이 2개가 된 겁니다! 마음껏 기뻐하셔도 좋습니다!>
“……기뻐해야 돼?”
정다운은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토끼도 대흥분 파티를 벌일 기세였다.
[왜라니요! 이건 진짜 엄청난 일이에요! 제단이 2개라는 말은 다른 지역에 여기 같은 유적지- 아니, 신전을 하나 더 건설할 수 있다는 말이라고요!]
“……?”
아니, 그래서 어쩌라는 걸까.
[그러니까! 분점을 차릴 수 있다는 말임! 여기가 본점이고!]
“그래서 그게 나랑 뭔 상관이……?”
긁적.
잠시 정리를 해 보자.
“그러니까…… 제단이 1개 더 있으니까 오동민처럼 다른 루트로도 제물을 바칠 수 있는 창구가 생겼다는 말이지? 멀티를 깔 수 있다는 말이네?”
[그렇죠.]
<바로 그 말입니다.>
정다운이 하나 더 물었다.
“그래서? 어차피 어디서든 게이트 열어서 여기로 돌아올 수 있는데, 뭐 하러 다른 데다 분점을 차려? 제물은 어차피 나만 바칠 텐데?”
<……?>
[……음?]
삽시간에 알파와 토끼의 흥분이 가라앉았다.
뼛속까지 관리자여서 일단 기뻐하긴 했는데, 그의 말대로 딱히 메리트가 없었던 것이다.
정다운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딱 봐도 던전이 보상 줄 게 없으니까 생색이라도 낸 거네. 아무튼 그래서, 강화 시스템은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거 맞지?”
<……네. 소속만 바뀌었을 뿐, 기능은 그대로일 겁니다.>
알파는 조금 시무룩해 보였다.
생각해 보니 오동민도 제물 한번 이쪽으로 보낸 적이 없었다.
용의 사도가 생기든 제단이 생기든, 현실은 폐허가 된 신전 하나뿐인 것이다.
“그럼 일단 신전부터 복구하자고.”
정다운은 신전을 돌아다니며 무너진 곳들을 바로바로 복구해 나갔다.
[리셋합니다.]
[리셋합니다.]
[리셋합니다.]
…….
“이거 은근 귀찮네. 나는 전체 리셋 같은 건 없나?”
<스킬 레벨을 올리시면 됩니다. 그러려면 제물을…….>
“눼이 눼이.”
역시 기승전제물! 그리피오스 때문에 무너진 곳들이 순식간에 복구가 됐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그리피오스가 올라오는 길목을 막기로 했다.
“어차피 쳐들어오는 길은 하나야. 독 구름이 정화된 터널 바로 위쪽으로 함정을 설치해야겠어.”
어차피 그가 설치할 수 있는 함정 중에 그리피오스에게 피해를 입힐 만한 건 단둘뿐이었다.
끓는 기름과 화살 벽.
골렘들을 시켜 이 두 가지를 다 낭떠러지 끝으로 옮기면서 그가 투덜댔다.
“아무래도 이건 뭔가 이상해. 함정 설치 마법이라면 좀 주문 한 방에 짠! 하고 함정이 생겨나야 되는 거 아냐?”
<그건 마법사들의 방식이라 당신에겐 불가능합니다. 함정 설치 스킬은 엄밀히 따지면 함정 등록 스킬에 가깝습니다.>
“그럼 옛날에 신전의 주인들은 다 마법사였던 거야?”
<아닙니다. 마법사가 아닌 존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노예들을 시켜 함정을 건설하곤 했지요.>
“……뭔가 슬픈데.”
지금은 그 노예가 주인이 된 셈이라, 식인 꽃을 심든 구덩이를 파든 함정을 스스로 만드는 수밖엔 없었다.
아무튼 절벽 끝에 기름 함정과 화살 함정을 옮겨 놨으니 일단 안심이었다.
그리피오스가 올라오면 그 위로 끓는 기름이 퍼부어지고 화살 세례를 맞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대론 너무 약하다.
이제 드디어 강화 시스템을 사용할 타이밍이었다.
그는 제단으로 돌아가 황금빛 수정 구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눈앞에 조금 전 보고 온 화살 벽의 모습이 보였다.
“강화.”
[함정을 강화합니다.]
꿀꺽!
그 순간 수정 구슬에 찰랑이던 황금빛 액체의 높이가 움푹 낮아졌다.
그리고 화살 벽 위로 은은한 빛이 감돌며 꼬리표가 하나 붙었다.
[화살 발사대 +1]
- 내구도 : 100/100(%)
- 옵션 : 관통 (1레벨)
“됐다!”
[됐다!]
<됐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정다운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이거 강화 몇 번까지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