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54화>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반파되어 버린 폐허 더미 위에는 멍하니 앉아 있는 전쟁 난민들이 있었다.
“와…… 진짜 무서웠다.”
“뀨우우.”
정다운은 오들오들 떠는 뽀뀨를 품에 안아 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괴물 한 마리가 쳐들어왔을 뿐인데 신전의 절반이 날아가 버렸다.
이 지경이 됐는데도 아무도 안 다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으으, 아까 봤어요? 나 진짜 잡아먹힐 뻔했잖아요.]
“나야말로 못 봤냐? 난 목젖까지 봤다.”
식은땀을 식히며 서로의 영웅담(?)을 나누는 인간과 토끼였다.
<죽었을까요?>
충격이라도 먹었는지 한참을 조용하던 알파가 처음으로 꺼낸 말에 정다운의 시선이 낭떠러지로 향했다.
“글쎄. 설마 소금 먹고 죽었을 리는 없고, 떨어져 죽지 않았을까?”
토끼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피오스가 하늘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없어요. 아마 안 죽었을 듯.]
“저 밑에 있는 구름이 알고 보니 수면 독이더라고. 잠들지 않았을까? 아니지. 이 높이에서 떨어지는데 퍽이나 졸리겠네.”
[수면 독이요? 흠, 그런 게 있었군?]
정다운은 밑에서 있었던 일들을 토끼에게 다 얘기해 주었다.
그러자 토끼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경악했다.
[헐? 진짜로요? 이 밑에서부터 스테이지-4 지역으로 넘어간다고요!?]
“너도 몰랐어?”
[내가 어떻게 알겠음? 난 애초에 이 죽음의 산맥에 올라와 본 적도 없었다고요. 으, 그게 사실이라면 죽고 안 죽고가 문제가 아닌데?]
“내 말이 그 말이야.”
정다운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녀석이 죽었더라도 어차피 다시 리셋할 테니까.”
바로 그게 문제였다.
범독수리 그리피오스는 스테이지-4 지역에 속해 있는 괴물이라 리셋도 될 것이다.
<그럼 또 쳐들어올 수도 있다는 거군요.>
[으윽, 그런 위험한 괴물이 이 밑에 돌아다니고 있었을 줄이야.]
조금 전 기억을 떠올리며 치를 떨던 토끼는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여태까진 한 번도 올라오지 않았던 걸까요?]
“그야…….”
정다운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 세월동안 이곳이 안전했던 이유라면 역시, 독 구름이 길목을 막고 있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걸 자신이 정화해 버렸으니, 독 구름에 구멍이 뚫렸으니…….
[님 때문이었네!]
<ㅁ이ㅊㄴ ㅅㅐㄲㅏㅑㅏ!>
“워워.”
정다운은 동시에 울컥하는 녀석들을 열심히 뜯어 말렸다.
“독 구름이 리셋되면 구멍도 막힐 거야.”
[그 전에 다시 올라오면요?]
“…….”
정곡을 찔려 버렸다.
알파가 한탄을 했다.
<옛날이 그립군요. 이럴 때 가고일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정말 든든했을 텐데.>
“가고일?”
<신전을 지키던 가디언의 이름입니다. 평소엔 움직이지 않는 석상이지만, 침입자가 나타나면 절대 용서하지 않았죠.>
또 뜨끔.
‘그것도 내가 부셨…… 지만, 절대 말하지 말아야겠다.’
이건 뽀뀨와 둘만의 비밀인 걸로 하자고 굳게 다짐했다.
“뀨우?”
‘어허, 쳐다보지 마.’
그때,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
“아, 혹시 그 가고일을 리셋시킬 수는 없을까?”
<신전이 예전 성세를 되찾는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선 불가능합니다. 가고일은 고도의 마법 생명체. 파괴하기도 어렵지만 만들기도 어렵습니다.>
‘그 어려운 걸 내가 파괴했지 말입니다…….’
심지어 핵 찾겠다고 아예 산산조각을 내 버렸었다.
아무리 후회해 봐야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 * *
정다운은 신전의 보수 공사를 시작했다.
골렘들을 시켜 무너진 잔해들을 구석으로 싹 치우게 하고.
자신은 절벽으로 가서 그리피오스가 무너뜨린 전망대부터 다시 설치했다.
그리고 미니맵을 열어 주변을 탐색했다.
“쯧. 미니맵이 너무 단순하단 말이야. 괴물들 종류도 좀 알려 주면 얼마나 좋아?”
아쉽게도 절벽 밑으로 보이는 이 많은 빨간 점들 중에 어떤 게 그리피오스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토끼야. 혹시 스테이지-4 리셋이 언제 되는지 알 수 있어?”
[아뇨.]
“그럼 일단 한번은 다시 온다는 가정하에 최대한 방어 수단을 구축해야겠네.”
일단 무너진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계속 리셋 스킬을 반복했다.
그런데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리셋에 필요한 생명 에너지가 부족합니다.>
“젠장. 사냥부터 다녀와야 하나? 여길 다 복구하려면 대체 얼마나 제물이 필요하지?”
이래저래 막막한 상황.
그런데 토끼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알파 님. 혹시 식량이 아니라도 제물을 바칠 수 있을까요?]
<동물이든 식물이든 상관없습니다. 생명 에너지만 있다면.>
[그럼 무기도 돼요?]
그러면서 토끼가 주섬주섬 ‘소지품’을 열어 웬 무기들을 꺼내자 정다운이 물었다.
“이건 뭐야?”
[내가 다크모들한테 빼앗아 온 무기들임. 그런데 이거 그냥 평범한 무기가 아니에요.]
원래 다크모들의 무기는 조잡한 잡동사니 수준이라 대단할 게 없었다.
하지만 알파는 그 안에 담긴 생명 에너지를 바로 알아보고 감탄했다.
<강화 무기들이군요! 이건 충분히 제물로 사용이 가능합니다.>
“강화 무기라고? 그게 뭔데?”
정다운이 어리둥절해하자 알파가 즉각 설명해 주었다.
<강화 무기란, 생명 에너지를 사용해 무기에 특별한 마법을 부여한 겁니다.>
“마법을 부여한다? 그런 게 있던가? 던전 돌면서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바로 그 부분이 문제예요.]
토끼가 심각한 표정으로 강화 무기들을 내려다보며 설명했다.
[본래 강화는 스테이지-2부터 등장하는 시스템이에요. 그런데 그걸 그 미친 바분 놈이 이쪽으로 끌어왔어요.]
“강화 시스템?”
[네. 괴물들이 들고 있는 무기를 마법으로 강화시키는 거죠. 바분은 스테이지-1의 레벨을 스테이지-2 수준으로 억지로 끌어올린 거임.]
그 말에 정다운이 표정을 굳혔다.
“레벨을 억지로 올렸다고? 설마 그거…… 우리 때문인가?”
[왜 아니겠음?]
역시 네임드 도우미는 다르다고 해야 할까.
최종 보스의 부재로 던전의 난이도가 낮아지자 바분이 아주 초강수를 둔 것이었다.
비정규직 도우미 토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대응이었다.
[그런데 그놈은 지금 큰 착각을 하고 있어요. 스테이지-2만 관리해서 그런지, 던전 초짜들이 얼마나 약해 빠졌는지를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음.]
토끼는 진지한 얼굴로 단언했다.
[다크모들에게 강화 무기를 쥐여 주다니. 이래 버리면 분명 이번 참가자들 중에선 생존자가 거의 나오지 않을 거예요. 기껏해야 식신 꼬맹이 정도?]
<아무튼 잘됐습니다. 일단 이 무기들이라도 제물로 바치시지요.>
[…….]
그딴 거 관심 없고, 알파에겐 오로지 신전의 안위가 중요했다.
하지만 정다운의 입장은 또 달랐다.
새로운 아이템을 얻었는데 확인부터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뭐가 어떻게 강화되었다는 거지?”
무기들을 유심히 살펴보던 그가 나이프 하나를 슬쩍 집어 든 순간이었다.
번쩍!
<업적 달성!>
“강화 장비 습득!”
- 보상 : ‘정보’ 확인 가능
“어?”
뜬금없이 업적을 달성해 버렸다!
겨우 아이템을 손으로 만졌다는 이유만으로 달성되는 업적이라니?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이 토끼에게로 향하자, 전직 도우미의 대답이 들려왔다.
[원래대로라면 스테이지-2에서 달성하게 되는 기본 업적이에요. 강화 무기에도 참가자들처럼 상태 창 낙인이 찍혀 있거든요.]
“음, 이렇게 하면 되나? 정보 확인!”
그 말에 들고 있던 나이프 옆에 작은 창이 하나 나타났다.
[다크모의 녹슨 단도 +1]
- 내구도 : 14/100(%)
- 옵션 : 절삭력 (1레벨)
정다운이 눈을 반짝였다.
“절삭력? 아이템에 스킬이 붙어 있는 느낌이구나.”
[맞아요.]
“이름 옆에 ‘+1’은 뭐야?”
[강화를 1번 했다는 뜻이죠.]
“그럼 2번도 강화할 수 있다는 뜻인가?”
[네. 강화를 중복할수록 생명 에너지가 2배씩 소모되지만요.]
“그렇군. 어디 다른 것들도 다 확인해 보자. 좀 쓸 만한 게 있으려나?”
[다크모의 무딘 식칼 +1]
- 내구도 : 53/100(%)
- 옵션 : 출혈 (1레벨)
[다크모의 나무 몽둥이 +1]
- 내구도 : 81/100(%)
- 옵션 : 단단함 (1레벨)
[다크모의 나무 송곳 +1]
- 내구도 : 79/100(%)
- 옵션 : 관통력 (1레벨)
“오, 무기마다 옵션이 다르게 붙어 있구나. 직접 써 볼까?”
가죽을 하나 꺼내서 절삭력 옵션이 있는 단도로 직접 잘라 봤다.
쓱.
“오?”
녹이 슬었는데도 불구하고 예리하게 잘려 나가자, 정다운이 탄성을 터뜨렸다.
“대단한데? 이런 물건들이 지금 대량으로 스테이지-1에 풀렸단 말이지?”
[네. 바분으로서는 대출혈을 감수한 셈이죠.]
“흐음, 그렇단 말이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일단 이 무기들부터 제물로 바치시지요.>
알파의 재촉에도 정다운은 한참을 골똘히 고민했다.
“알파. 우리도 같은 유적지인데 강화 시스템 같은 거 없어?”
그의 시선이 그리피오스를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화살 함정으로 향해 있었다.
“저 화살들만 강화할 수 있으면 그리피오스의 가죽 정도는 쉽게 뚫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지만 불가능합니다.>
“왜?”
<누누이 얘기하지만, 신전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전의 주인이 대마법사라도 됐다면 또 모를까.>
“바분은 그럼 마법사야?”
정다운이 쳐다보자, 토끼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도우미는 그냥 던전 시스템을 사용하는 거임. 바분이 한 일이라곤 제단에 손을 얹고 생명 에너지를 불어넣은 것 밖에 없어요.]
“제단?”
그의 시선이 이번엔 보스 룸의 중앙으로 향했다.
그곳엔 마법진이 그려진 검은색의 제단이 조용히 세워져 있었다.
“저쪽 제단은 저렇게 똘똘한데, 우리 거는 맨날 밥만 축내는구나.”
졸지에 식충이 취급을 당하게 된 제단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정다운이 딱 결론을 내렸다.
“오케이. 그럼 제단을 훔쳐 오면 되겠네.”
……응?
지금 이 인간이 무슨 헛소리를 한 거지?
[네? 지금 뭐라고?]
<잘못 들었습니다?>
순간 이상한 말을 들은 기분에 어안이 벙벙해져 버린 토끼와 알파였다.
그런데 보아라. 저 정다운의 표정을!
씨익-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사악하게 웃고 있었다.
“유적지의 모든 생명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 바로 제단이라며? 그럼 제단을 통째로 뜯어 오면 강화 시스템이든 생명 에너지든 다 해결되는 거 아냐?”
그는 그리피오스를 막아 내는 동안 알파가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오히려 혼란스러운 쪽은 토끼와 알파였다.
[어? 그, 그게 말처럼- 응? 말이…… 되나?]
<가능…… 할 것 같기도?>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니 그의 말에 허점이 없었다.
태생부터가 유적지의 관리자였던 토끼와 알파의 입장에선 완전히 허를 찌르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 그렇군요. 본래 제단을 건드리는 건 몹시 불경스러운 짓이지만, 종말의 용 따위…….>
“알 게 뭐야. 그치?”
씨익, 하고 환하게 웃는 정다운.
그 모습에 토끼도 마주 웃고.
알파도 웃었다.
“마지막으로 크게 한번 털어 먹고,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