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52화>
정다운은 오늘도 돌을 깬다.
“돌 깨기! 돌 깨기! 돌 깨기!”
따당! 쩌적! 쩍! 쩍!
돌을 깨고, 소지품에 넣고.
계단을 다듬고.
이것의 무한 반복일 뿐인데, 이게 왜 이렇게 재밌을까?
혹시 취미 생활로 뜨개질이나 자수를 즐기는 사람들이 이런 기분으로 하는 걸까?
반복 노가다에 몰입하고 있으면 머릿속이 비워지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장점이 있었다.
이걸 보고 토끼는 언젠가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는…… 낯선 세상에 홀로 남겨진 외로움과 공포에서 도망치기 위해 노가다에 더욱 집착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물론 아니었다.
쩌적! 쩍! 쩍!
‘크으! 이게 또 손맛이 죽여준단 말이지!’
역시 노가다는 언제나 옳다.
오랜만에 노가다에 집중하고 있으니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흙벽돌로 가득하던 소지품 안이 점점 돌로 채워지는 걸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게다가 가끔씩 뒤를 돌아보면, 지금까지 만든 돌계단들이 주르륵 길게 이어져 있는 모습이 어찌나 뿌듯한지!
그러는 사이 돌 깨기 레벨도 상당히 올라 어느덧 7레벨이 되어 있었다.
“어우 씨, 스릴 쩌네.”
정다운은 요즘 절벽 아래로 펼쳐진 구름의 바다 밑으로 들어와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새하얀 안개 속에서 무작정 밑으로 파 내려간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또 스릴 아니겠는가!
갑자기 발밑이 무너지면 그대로 추락한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벌렁거리면서도, 반대로 살아 있다는 짜릿한 기분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게 바로 익스트림 스포츠!
“……는 개뿔. 어후, 무서워 죽겠네. 애들아, 내가 떨어질 것 같으면 바로 잡아 줘야 된다?”
“크워어.”
“꾸왁.”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항상 정다운의 곁엔 고릴라 골렘과 타조 골렘이 따라다녔다.
“돌 깨기! 돌 깨기!”
그렇게 한참 동안 구름 속을 헤매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정다운의 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스테이지-4 지역에 진입했습니다.]
“……헐?”
정다운은 너무 놀라서 한참을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 있었다.
“이, 이렇게 연결이 되는 거였어? 다짜고짜 스테이지 4라고?”
너무 놀라서 말도 잘 안 나왔다.
설마 죽음의 산맥을 사이에 두고 스테이지-1과 스테이지-4가 맞닿아 있었을 줄이야!
물론 그 경계선이 너무 엄청나다 보니 바로 옆에 있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종말의 용은 이 세계를 자신의 놀이터로 만들어 버린 것 같군요. 대체 이 땅에 무슨 짓을 해 놓은 건지…….>
씁쓸해하는 알파와는 달리 정다운은 의욕이 넘쳤다.
“아무튼 방향은 잘 잡은 것 같네. 이대로 내려가면 동료들을 따라잡을 수 있겠어!”
갑자기 스테이지-4라고 해서 조금 놀라긴 했지만, 스테이지-2인 것보단 훨씬 좋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설마 스테이지-1보다 4배로 위험하다는 뜻은 아니겠지?”
등골이 으슬으슬했으나, 일단 계속 내려가 보기로 했다.
위험하다 싶으면 다시 올라가면 그만 아닌가.
“돌 깨기!”
쩌적!
그렇게 몇 칸 더 내려갔을 때였다.
“흡!?”
갑자기 정다운의 얼굴색이 변하며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무심코 들이킨 안개의 상태가 갑자기 변한 것이다!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
<수면 독입니다! 다시 위로 올라가십시오!>
후다닥!
정다운은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경고! 참가자는 스테이지 지역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류! 스테이지-4 지역을 벗어났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오류 창이었다.
다시 스테이지 밖으로 나오자 구름에서 독성이 사라졌다.
평범한 구름으로 돌아온 것이다.
“……푸하! 정화!”
파아앗!
서둘러 코에 남아 있는 수면 독을 정화하자 정신이 또렷해졌다.
“와. 하마터면 그대로 잠들 뻔했네.”
아찔한 순간이었다.
이렇게 춥고 까마득한 절벽에서 잠들었다간 입이 돌아가는 수준에서 끝날 리 없었다.
정다운은 힐끔 아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설마 이 밑으로는 전부 독 구름인 건 아니겠지?”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스테이지를 넘어가지 못하게 경계를 구분해 둔 건가.”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생각해 보면 스테이지-1도 사막이나 괴물 쥐들로 사방이 둘러쌓여 있지 않았던가.
참가자들을 던전 안에 가둬 두기 위해 이런 방책을 마련해 둔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이런 방책이라면 대환영이지.”
씨익 웃는 정다운의 새하얀 이가 환하게 드러났다.
독이라니? 오랜만의 레벨 업 기회 아닌가.
* * *
정화 스킬은 진짜 레벨을 올리기가 힘들다.
레벨이 낮을 때야 독버섯 수준으로도 경험치를 쌓을 수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레벨이 거의 고정되어 버린 비운의 스킬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눈앞을 가득 메운 독이라니? 노다지가 따로 없었다.
“정화! 정화! 돌 깨기! 돌 깨기!”
단조롭던 노가다에 과정 하나가 추가되자 좀 더 재밌어졌다.
정다운은 천으로 만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정화 스킬을 주기적으로 걸어 방독면 수준으로 만들었다.
그러곤 한 손으로 돌을 깨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정화 스킬을 펼치며 계속 밑으로 내려갔다.
“정화! 정화! 돌 깨기! 돌 깨기!”
정말이지, 엄청난 밀도의 수면 독이었다.
하지만 스킬을 계속 중첩해서 걸자 솜사탕 녹듯이 독 구름이 사라져 갔다.
독 구름에 구멍이 듬성듬성 뚫리기 시작했다.
“오. 이쯤 되면 그냥 구름일 때보다 오히려 더 편한데?”
신기하게도 한번 정화된 구름은 그 자리가 메워지지 않았다.
시야 확보 효과가 있었다.
급기야 레벨 업까지 했다.
[<정화> 스킬이 초급 9레벨로 발전하였습니다.]
“나이쓰!”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레벨 업의 효과는 극명히 드러났다.
독 구름에 생기는 구멍의 크기와 속도가 엄청나게 차이 난 것이다.
정화 스킬은 레벨이 올라가면 더 강한 독을 정화할 수 있게 되고 정화되는 속도도 더 빨라진다.
스테이지-4에 어떤 위험한 놈들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 기회가 있을 때 최대한 레벨을 올려 두는 게 좋았다.
이 모든 구름이 다 독이라 생각하니, 손 닿는 곳만 정화할 수 있다는 게 안타까웠다.
생각 같아서는 토끼에게 매달려 구름 속을 헤집고 날아다니고 싶을 정도였지만, 아쉽게도 토끼에게 그럴 만한 힘은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정화> 스킬이 초급 10레벨로 발전하였습니다.]
“아싸!”
그 지지부진하던 스킬이 결국 하루 만에 10레벨을 찍고 말았다!
이렇게 끔찍하게 많은 독을 정화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대로 한 번만 더 레벨 업 하면 중급이 되는 건가!?”
갑자기 엄청난 기대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정화는 다른 스킬들과는 다르게 ‘등급’ 표시가 매겨지는 스킬이었다.
가장 처음에 주어진 스킬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이걸 가리켜 ‘메인 스킬’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지금으로도 충분히 쏠쏠하게 써먹고 있는 스킬인데, 중급이 되면 과연 얼마나 좋아질까?
하지만 아쉽게도 레벨 업은 거기서 끝이었다.
구름층을 뚫고 아래로 내려와 버린 것이다.
정다운은 발 아래로 펼쳐지는 엄청난 경관에 눈앞이 아찔했다.
하지만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캬아! 역시 숲이었구나.”
숲과 나무들이 소꿉놀이 장난감들처럼 자글자글 모여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마침 바위산 주변을 날고 있던 거대한 괴물이 정다운을 발견한 것이다.
흡사 독수리와 사자를 반반 합쳐 놓은 듯한 괴물이었는데, 그를 보자마자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엄청난 포효를 터뜨렸다.
크르렁!
“……!”
오싹!
온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의 끔찍한 살기였다!
순간적으로 정다운의 몸이 굳어 버리자, 알파가 다급히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범독수리 그리피오스입니다! 빨리 위로!>
“크르렁!”
하지만 그 순간 이미 괴물의 앞발이 엄청난 속도로 정다운의 몸을 잡아채려 하고 있었다.
“소, 소지품!”
콰직!
괴물은 갑자기 앞에 나타난 흙벽돌을 정다운 대신 잡아채고 한 방에 우그러트렸다.
그 틈에 정다운은 덜덜 떨리는 다리를 재촉해 구름 위로 다시 올라갔다.
그러자 바로 뒤에서 괴물의 발톱이 절벽을 긁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콰득! 콰드득!
“크르렁!”
‘으악! 으아아!’
정다운은 정신없이 계단을 내달렸다!
너무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서 게이트를 설치할 여유도 없었다.
“막아!”
“크워어!”
그 말에 고릴라 골렘이 그리피오스의 앞을 막아섰다.
크기로 보면 막상막하!
하지만 괴물의 발톱은 흙 따위 얼마든지 박살 낼 수 있었다.
“크르렁!”
“크워어!”
콰직!
고릴라의 한쪽 팔이 와그작 뭉개졌다.
하지만 그 순간 반대편 주먹이 그리피오스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퍼어억!
“크르륵!?”
그리피오스의 몸이 크게 휘청이며 뒤로 날아올랐다.
큰 날갯짓에 엄청난 광풍이 불어닥쳤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피오스 자신에게도 독으로 작용했다.
대기가 크게 요동치며 근처에 있던 독 구름을 들이마시게 된 것이다.
“크르릉.”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자, 결국 그리피오스는 추격을 멈추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흐아아, 이번엔 진짜 죽을 뻔했다.”
신전으로 돌아온 정다운은 참고 있던 숨을 한 번에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찌나 무서웠는지 식은땀으로 전신이 흠뻑 젖었다.
갑자기 확 뛰어 버린 난이도에 정신이 번쩍 든 정다운이었다.
‘스테이지-4가 이 정도였다니……. 저거 잡몹일까, 최종 보스일까?’
갑자기 동료들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저런 미친 괴물을 상대로 류승우는 아직 살아 있을까?
만약 살아 있다면, 과연 그는 얼마나 강해져 있을까?
* * *
“저 괴물은 또 뭐지?”
류승우는 갑자기 들려온 괴물의 포효에 본능적으로 전투태세를 갖췄다.
저 멀리 하늘 위로 마치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괴물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에 사자의 몸통을 하고 있는 괴물이었는데, 멀리서 보기에도 너무도 공포스러웠다.
[저 괴물은 너희가 당장 상대할 게 아니니 신경 끄도록. 땅 밑으로는 잘 내려오지 않는 놈이다.]
“휴우.”
도우미의 말에 다들 안도하는 참가자들이었다.
* * *
“아무래도 그놈과 싸우는 건 너무 위험해. 싸우다 추락해도 죽고, 발밑이 무너져도 죽어.”
결국 정다운은 계획을 수정하기로 했다.
조금 수고스럽더라도 절벽 안쪽에 땅굴을 뚫기로 말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그 무서운 괴물이라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조금 수고스럽겠지만 절벽에 붙어서 그놈과 싸우는 것보단 낫겠지.”
바로 실행에 옮겼다.
“돌 깨기! 돌 깨기!”
절벽 안쪽이 점점 아파트 비상구처럼 되어 갔다.
[<돌 깨기> 스킬이 8레벨로 발전했습니다.]
“헐, 벌써?”
이번엔 생각보다 빨리 레벨 업을 했다.
아무래도 바위산을 뚫고 내려가는 행동이 좀 더 어려운 업적이라 그런 게 아닐까?
“좋았어! 이러면 더 빨리 내려갈 수 있지!”
하지만 정다운은 몰랐다.
콰득! 콰득!
그가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건너편에서는 반대로 위험한 괴물이 절벽을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하필이면 정다운이 정화해 둔 독구름의 터널을 따라서 말이다.
콰드득!
마침내 바위산 꼭대기까지 도착한 그리피오스는 눈앞에 보이는 용의 신전을 향해 포효를 터뜨렸다.
“크르렁!”
[나 돌아왔, 엄마야!?]
때마침 신전으로 돌아온 토끼가 그리피오스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