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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리셋 (51)화 (51/393)

<던전리셋 51화>

[아무래도 난이도를 좀 올려야겠군.]

바분은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로 했다.

최종 보스와 외뿔 멧돼지들이 또 없어진 이상, 이대로라면 저번 게임처럼 약해 빠진 생존자가 대거 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실 생존자의 숫자보다도 그들이 너무 약하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쯧. 제물은 양보단 질이 더 중요한데 말이지.]

바분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아무래도 다수의 약자보단 소수의 강자를 만드는 편이 생명 에너지를 더 많이 얻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다수의 강자를 만드는 게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최종 보스와 외뿔 멧돼지들이 없어진 만큼, 생존자들을 단련시킬 다른 방도가 필요하긴 했다.

[괴물들의 숫자를 늘릴 순 없지만, 괴물들을 강하게는 만들 수 있지.]

바분의 눈빛이 음험하게 빛났다.

자신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토끼와는 달리, 던전 3개를 동시에 관리하는 네임드 도우미였다.

스테이지-2에서 사용하고 있는 권능을 이쪽에도 미리 적용시킨다면 난이도가 대폭 올라갈 것이다.

바분은 최종 보스가 사라진 텅 빈 보스 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제단 위에 손을 얹었다.

[내 생명 에너지를 써야 하는 게 좀 아깝긴 하지만, 실적이 낮아지는 것보단 낫겠지.]

파아앗!

제단 위로 환한 빛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몹시도 불길한 빛이었다.

*   *   *

끝. 났. 다.

토끼는 노랗게 물든 자신의 앞발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했어? 수고했네.”

정다운은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곤 토끼에게서 들기름을 넘겨받아 바로 옆방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거기엔 거대한 기름 솥 몇 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가 바로 알파가 말한 ‘원시적인 함정’, 펄펄 끓는 기름이 쏟아지는 함정이었다.

처음 이곳에 정다운이 들어왔을 땐, 오랜 세월 동안 차갑게 식어 버린 기름이 켄타우로스 골렘 머리 위에 쏟아졌었다.

하지만 기능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그 뒤 여러모로 실험해 본 결과, 이 함정에 새겨진 기능은 총 3가지였다.

1) 기름을 들이부어 외부인을 공격한다.

2) 빈 솥에 기름을 다시 채운다.

3) 기름을 끓인다.

특히나 3번째인 기름을 끓이는 기능은 참으로 쏠쏠했다.

불을 지피지 않아도 저절로 솥이 뜨거워지며 기름이 끓는 것이다.

처음엔 솥 자체에 특별한 힘이 있나 싶었는데, 함정 밖으로 가지고 나가 보니 평범한 솥에 불과했다.

“그럼 이것도 결국 마법적인 함정인 셈인데, 왜 이 함정만 쓸 수 있는 거지?”

<이 함정의 진체가 천장 위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파손이 덜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하.”

마찬가지로 입구 쪽에서 화살 다발을 쏴 대던 함정도 벽 속에 숨겨져 있어서 파손이 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었다.

“아무튼, 내가 궁금한 건 이거야. 여기에 다른 기름을 넣어도 함정이 작동할까?”

<‘기름’이라면 가능할 겁니다.>

그 말에 씩 웃는 정다운.

원래 이 솥에는 올리브유를 떠올리게 하는 식물성 기름.

즉, ‘식용유’가 들어 있었다.

그래서 저번엔 여기서 감자튀김도 튀겨 먹지 않았던가.

“만약 이 함정 기름을 들기름으로 대체한다면 어떨까?”

그럼 이걸 이용해 들기름을 무한히 리필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해 보면 알게 되겠지.’

정다운은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솥 하나를 비우고, 그 안에 들기름을 들이부었다.

그리고 스킬 발동!

“함정 설치!”

[함정을 재설치합니다.]

씨익.

분명히 ‘재설치’라고 했겠다?

스킬이 성공하자, 정다운은 솥에 있는 들기름을 다시 다른 그릇에 전부 옮겨 담았다.

그리고는 텅 빈 솥에 대고 다시 스킬을 발동했다.

“리셋!”

[함정을 리셋합니다.]

파앗!

<또 생명 에너지를 이런 데 낭비하시다니…….>

알파의 불평은 가볍게 무시하고 기대감에 가득 찬 눈으로 리셋된 솥 안을 들여다보자-

“오, 됐다!”

놀랍게도 솥에는 새롭게 생겨난 들기름이 찰랑이고 있었다!

정다운은 짜릿한 기분을 느끼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는 이제 기름 공장이다!”

실험 성공이었다!

앞으로는 이제 일일이 기름을 짜지 않아도, 얼마든지 들기름을 무한히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건 겨우 시작에 불과해. 이제 나는 참기름이든 고추기름이든, 일단 만들어 내기만 하면 얼마든지 기름을 리필할 수 있게 된 거야.”

<몹시도 비효율적인 시스템이군요. 고작해야 기름을 얻기 위해 생명 에너지를 낭비하시다니.>

“어허, 고작이라니? 인간에게 먹는 기쁨이 얼마나 큰 행복인데? 게다가 이번에 내가 깻잎을 찾고 나서 크게 깨달은 점이 있어.”

<무슨 깨달음입니까?>

“풀은 맛있다는 거.”

<…….>

정다운의 세상 진지한 표정에 알파는 말을 잇지 못했다.

“고기는 항상 옳지만, 인간은 고기만으로는 살 수 없어. 채식도 같이 해 줘야 영양 밸런스가 맞는 거야.”

그 말에 토끼가 곁으로 다가오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포만감만 올라가면 체력이 유지되는데 뭔 영양 밸런스까지 따져요? 괜히 참가자들한테 상태 창이 붙어 있는 게 아니라고요.]

“그래 봐야 퍼센트 수치잖아. 같은 100퍼센트라도 몸이 건강해지면 더 잘 싸울 수 있을걸?”

[그렇긴 하죠.]

그 말엔 토끼도 동의했다.

“게다가 살기 위해 먹는 것과 먹기 위해 사는 것 중에 뭐가 더 행복하겠어?”

정다운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너무 오랜만에 깻잎과 기름장, 삼겹살의 조합을 맛봤더니, 그동안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아쉬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깻잎도 좋지만 역시 쌈에는 상추가 기본이라고! 게다가 기름장도 원래 들기름이 아니라 참기름이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임?]

“그러니까 찾아와.”

[뭘요?]

정다운이 갑자기 돌아보자 토끼는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뭐든. 직접 먹어 보고 먹을 만한 풀이다 싶으면 다 뜯어 와. 판별은 내가 한다.”

[아 놔.]

정다운은 함정 스킬을 이용해 본격적으로 이곳에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토끼의 대모험이 시작되었다.

*   *   *

역할이 분담되었다.

정다운이 바위산에 남아 절벽을 깎는 동안, 토끼는 스테이지-1을 돌아다니게 되었다.

[관리자까지 된 이 몸이 왜 여기서 풀이나 뜯고 있어야 하는 거지…….]

오물오물. 아작아작.

토끼는 풀밭에서 풀을 뜯으며 신세 한탄을 했다.

직위는 분명 올랐는데 전보다 신세는 더 처량해진 기분은 왜일까.

그런데…… 그것과 별개로 풀이라는 게 참 다양한 맛을 지녔다는 걸 알게 됐다.

[이건 좀 쓰고, 이건 맵고, 이건 또 쌉싸름……. 오? 이건 맛은 없는데 향이 제법…… 헉?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퍼뜩 정신 차려 보니 뼈 씹는 뽀뀨처럼 정신없이 풀을 뜯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다.

[으아아. 아니야, 아니라고! 나는 특별한 토끼라고!]

갑자기 자괴감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응?]

토끼의 시야로 한 무리의 다크모들이 참가자들을 습격하는 모습이 보였다.

키히힛! 키힛!

“으아악!”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때아닌 학살이 일어나고 있었다.

[호오. 저 녀석들 봐라?]

다크모들의 맹활약에 토끼의 눈매가 날카롭게 빛났다.

애초에 다크모들은 도구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외에는 특출 난 점이 없는 놈들이었다.

힘도 약하고, 맷집도 약하다.

그래서 뒤로 갈수록 놈들의 손에는 흉흉한 무기와 방어구가 쥐어져 있었다.

애초에 참가자들이 다 어디서 무기를 얻겠는가? 다 다크모 같은 놈들을 죽이고 빼앗는 것이었다.

물론 대부분은 녹슨 단검이나 낡은 방패 같은 것들이었지만, 운이 좋으면 상당히 쓸 만한 무기도 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저 무기들은 너무 쓸 만해 보이는데? 어떻게 된 거지?]

토끼는 다크모들의 장비가 수준 이상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칼날의 예리함이라든가 방패의 방어력은 겨우 다크모들이 들고 있을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설마 강화 장비는 아니겠지? 에이, 그럴 리가.]

문득 든 생각이 있었지만 토끼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무기 강화는 스테이지-2부터나 존재하는 시스템이었다.

처음부터 괴물들의 손에 강화된 무기가 들려 있으면,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참가자들에겐 재앙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스테이지-1에 존재하는 아이템들 대부분이 노멀 등급인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게임으로 치면 튜토리얼.

무기 사용법부터 하나하나 숙지해 가는 걸음마 단계에 강화 무기라니?

아무리 바분이라도 그런 미친 짓을 벌일 리는 없었다.

[끌끌. 훌륭하군.]

‘어머나, 깜짝이야!’

갑자기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토끼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바분이 나타나 버린 것이다!

‘제, 젠장. 망했다.’

뒷골이 서늘해졌다.

참가자들이 있는 곳이라면 도우미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들키기 전에 도망쳐야 했지만, 하필이면 자신이 서 있는 위치가 너무 적나라하게 풀밭 한가운데여서 쉽지 않았다.

‘어, 어쩌지? 어쩌지? 어디로 도망치지!?’

토끼가 땀을 뻘뻘 흘리며 도망갈 틈을 찾는 사이, 바분은 다크모들을 보며 한껏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그래, 죽여라! 유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확실히 숫자를 줄여 놓는 거다!]

던전 도우미의 직업병을 하나 꼽는다면, 바로 저 혼잣말이 아닐까?

[끌끌끌. 녀석들, 강화 무기를 들더니 아주 신이 났군.]

그 말에 토끼가 눈을 부릅떴다.

‘헐, 진짜 강화 무기였어? 이 미친놈아! 스테이지-1에 강화 시스템을 도입하면 어떡해!?’

그런데 그때.

휙.

[음?]

바분이 갑자기 토끼가 서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움찔.

젠장, 눈이 마주쳐 버렸다.

토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식은땀만 흘릴 뿐.

[……토끼?]

바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곳엔 새하얀 토끼 한 마리가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턱시도 따위는 입고 있지 않은 순결하고 귀여운 토끼였다.

입에 풀도 물고 있었다.

오물오물. 아작아작.

‘나, 나는 토끼다. 누가 봐도 그냥 토끼다.’

도저히 도망칠 곳을 찾을 수 없었던 토끼는 결국 자신의 긍지를 벗어 던지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흐음?]

바분의 눈초리가 더욱 게슴츠레해졌다.

그럴수록 토끼는 땀을 뻘뻘 흘리며 눈의 힘을 풀고 초점을 없앴다.

오물오물. 아작아작.

‘제발 그냥 가던 길 가라.’

초점 없는 눈.

쉴 새 없이 오물거리며 풀을 되새김질하는 입.

자, 보아라. 이만하면 영락없는 토끼 아닌가.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진정한 도우미라면 던전에 사는 동물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다.

아작아작?

‘자, 자꾸 씹으니까 단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맛있는 풀을 발견해 버렸다.

[……쯧. 하찮은 미물 주제에 그래도 살아 보겠다고 참 열심히도 먹는구나.]

필사적인 메소드 연기가 통한 건지, 바분은 이내 토끼에게서 관심을 접고 다른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토끼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을 수 있었다.

[흐아아, 진짜 죽을 뻔했다. 내가 왜 이따위 풀떼기들 때문에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냐고!]

아작아작.

그래도 이 풀은 맛있어서 입이 심심할 때마다 씹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진짜 저게 강화 무기라고? 강화 시스템을 끌어왔다고?]

마침 다크모들 중 일부가 이쪽으로 다시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토끼의 입꼬리가 차갑게 말려 올라갔다.

자신이 당한 수모를 화풀이하기엔 딱 좋은 상대였다.

[풀보단 이쪽이 훨씬 보람이 있겠네.]

스가각!

“……!”

비명도 나오지 않는 순삭!

얼마 후, 바분은 한 무리의 다크모들이 몰살당한 흔적을 발견하고 눈을 부릅떴다.

[아니, 강화 무기까지 들려 줬는데도 죽었다고? 이번 참가자들이 이렇게 강했단 말인가!]

애써 강화시킨 무기들은 이미 누군가가 가져갔는지 다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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