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49화>
“나한테 좋다고?”
<그렇습니다. 용의 사도가 생기면, 당신이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도 이 소년이 대신 생명 에너지를 모아다 줄 테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야?”
<소년도 이제 제물을 바칠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오, 그럼 이제 멀티 돌리는 거네.”
<애초에 당신은 제물을 바치는 일에 너무 게으릅니다.>
알파의 타박에 괜히 머쓱해진 정다운이었다.
“그야……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동료들을 찾는 거니까. 그래도 한 번씩 나가서 무더기로 사냥해 오잖아.”
<그야 신전의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뜨끔.
<잊으시면 안 됩니다. 에르테아 님의 부활이야말로 신전의 진정한 존재 이유입니다.>
“윽, 미안.”
무지 찔린다.
팩트가 가슴을 후벼 팠다.
하지만 그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난 애초에 생명의 용이 진짜 부활하는지도 의심스럽다고! 10년, 20년 숨만 쉬고 열심히 제물을 바쳤더니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누가 책임질 거야?’
용의 부활은 그가 느끼기엔 너무 장기적인 프로젝트였다.
그러다 보니 일단 눈앞에 있는 일부터 먼저 해결하고 싶은 게 바로 사람 마음이었다.
이를테면 죽음의 산을 넘어가 보는 일이라든가, 오늘 점심이라든가, 저녁이라든가. 이제 드디어 소금이 생겼으니 뭘 해 먹을까라든가…….
후르릅.
<왜 말하다 말고 침을 삼키십니까?>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그럼 용의 사도가 되면 동민이한테는 뭐가 좋은데?”
<뭐가 좋다니요? 한낱 인간이 에르테아 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무한한 영광입니다!>
“쥐뿔도 없다는 얘기네? 이건 뭐, 종말의 용 쪽의 업적 보상이 훨씬 좋은데?”
그 말에 알파가 욱해서 글씨 크기를 대폭 키웠다.
<그러니까 제물을 열심히 바쳐서 신전의 능력을 키우란 말입니다! 같은 용인데 우리라고 못 할 게 뭡니까!>
번쩍, 번쩍!
“워워, 진정해. 눈 시끄러워.”
그런데 그때 갑자기 토끼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있기야 있겠네요.]
토끼는 오동민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용의 사도도 결국 우리처럼 직접 먹어서 제물을 바치는 거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럼 이 꼬맹이 스킬이 뭔지 생각해 보셈.]
“스킬? 아하, 그렇구나!”
그 말에 정다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동민아. 네 식신 스킬이 분명 배가 부르면 힘이 2배 되는 거였지?”
“네? 네. 지금은 레벨 올라서 포만감 99% 이상부터 돼요.”
‘이거다!’
씨익, 진하게 미소 짓는 정다운이었다.
소금 사막을 찾게 해 준 보답으로 뭘 해 줘야 하나 싶었는데, 마침 딱 좋은 보상을 찾은 것이다!
“알파. 용의 사도가 되면 포만감이 100%가 넘어도 계속 먹을 수 있지?”
<그렇습니다. 그 이후부턴 제물로 바쳐…….>
“제물로 안 바치면 어떻게 돼?”
<안 바치면 안 됩니다.>
알파는 단호했다.
하지만 정다운은 초롱초롱 기대감에 찬 표정으로 끈질기게 다시 물었다.
“그래도 바치지 않으면?”
<무조건 바쳐야 합니다.>
“그래도 안 바치면 어떻게 되는데?”
초롱초롱. 몹시 기대!
결국, 알파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하고야 말았다.
<……포만감 수치가 계속 올라가겠지요. 제기랄.>
항상 엄격하고 딱딱하던 알파의 포커페이스가 무너진 바로 그 순간!
이를 놓치지 않는 하이에나 두 마리가 있었다.
“헐. 알파 욕했다!”
[헐? 욕했다!]
“욕쟁이다!”
[욕쟁이래요! 입 엄청 험하시네!]
깔깔. 깔깔깔.
<……이분들이.>
아니, 언제부터 둘이 이렇게 죽이 잘 맞았다고!
주거니 받거니 하며 자신을 계속 놀리는 정다운과 토끼의 모습에 알파는 문자를 부들부들 떨었다.
정다운이 장난을 거두고 오동민을 쳐다봤다.
“다 들었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 ……니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는 오동민.
정다운이 씨익 웃으며 녀석의 어깨 위로 손을 턱 올렸다.
“동민아, 너 용의 사도가 되라. 그러면 배가 불러도 계속 음식을 먹을 수 있어. 포만감이 100% 이상으로 올라가면 스킬 유지 시간도 길어지는 거라고.”
“어? 아하? 그렇구나!”
오동민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110%, 120%가 되도 계속 먹을 수 있는 건가요? 무한대로?”
<한계는 있을 겁니다. 어차피 몸 안에 저장하는 거라서 살이 찔 수도 있고요.>
어째선지 삐딱한 글씨체로 초를 치는 알파였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상대는 마냥 신이 난 성장기 어린이였다.
“그건 괜찮아요! 엄마가 제 살은 나중에 전부 키로 갈 거랬어요! 어차피 금방 배 꺼져요!”
<성장기라 좋겠습니다만, 반드시 키로 가는 건 아닐 테니, 전투 중이 아니면 꼬박꼬박 제물로 바치시길 바랍니다.>
글씨체가 좀 더 삐딱해졌다.
정다운은 씨익 웃으며 오동민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럼 이렇게 하면 되려나? 오동민을 용의 사도로 임명한다.”
선포한 순간, 그의 손에서 황금빛이 흘러나와 오동민의 몸을 감쌌다.
번쩍!
[용의 사도를 임명합니다.]
파아앗!
“헉?”
황금빛에 감싸인 오동민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힘이……! 힘이 넘쳐요!”
<기분 탓입니다.>
“헷.”
당연히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더 많이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뿐.
하지만 오동민은 잔뜩 들떠 있었다.
“그래도 엄청 강해진 기분이네요. 내가 용의 사도라니!”
“……?”
“내가 용의 사도라니!”
“…….”
두 번이나 강조하는 거 봐.
왜 저렇게 ‘용의 사도’라는 말에 꽂힌 걸까?
‘녀석……. 벌써부터 중2병 조짐이 보이는구나.’
정다운이 중학생 소년의 오묘한 사고방식을 고찰해 보는 사이.
문득 주변이 소란스러워진 것을 깨달았다.
“음?”
주변을 돌아보니, 상당수의 사막 괴물들이 이쪽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취이익!
“어, 미안. 우리가 너무 떠들었지?”
취익! 취이이!
크기가 황소만 한 괴물 전갈 떼였는데, 어찌나 흥분했는지 뾰족한 꼬리에서 독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형, 어쩌죠? 포위당했어요.”
그 살벌한 기세에 오동민은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정다운은 오히려 녀석의 등을 떠밀었다.
“어쩌긴? 졸업 시험이지.”
“네엣? 설마 저, 저 혼자 싸우라는 건 아니죠? 못해도 백 마리는 넘어 보이는데요?”
오동민은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정다운은 피식 웃었다.
“졸업 시험이라고 했잖아. 어차피 독만 조심하면 될 것 같은데?”
“독이라고요!?”
“응. 꼬리 조심해라?”
“히익?”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토끼를 쳐다보자, 토끼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걱정 마셈. 저놈들 어차피 독이 약한 편이라 꼬리에 찔려도 즉사는 안 할 거예요. 이삼 일 정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을 뿐.]
“진짜 다행이지? 즉사는 안 한대.”
“히익?”
오동민은 더욱 사색이 되었다.
정화 스킬이 있어서, 독 같은 건 진짜로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해 주지 않았다.
“긴장할 것 없어. 넌 용의 사도잖아! 골렘들도 같이 싸워 줄 거야. 이거 먹으면 힘이 날 거야!”
“우왑? 으냠냠냠.”
정다운은 파이팅을 외치며 오동민의 입에 훈제 고기를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오? 진짜 계속 들어가네? 신기하다.”
<상태 창>
이름 : 오동민
칭호 : 용의 사도
체력 : 94/100 (%)
포만감 : 112/100 (%)
“옳지, 잘 먹는다. 나머진 들고 먹으면서 싸우고. 이건 무기다.”
식량과 쇠꼬챙이를 꺼내 오동민의 양손에 꼬옥 쥐여 주었다.
그렇게 아들 시험장 보내는 엄마처럼 꼼꼼하게 준비물을 챙겨 준 후에.
사자 새끼 절벽에 떨어뜨리는 어미 사자처럼 등을 떠미는 정다운.
“자, 그럼 출동!”
“으아! ‘식신’ 발동!”
결국 오동민은 비명 비슷한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백여 마리의 전갈 떼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취익!
취이이익!
“으아아아……!”
골렘들도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님은 뭐 하게요?]
“나한텐 다른 중요한 사명이 있지.”
[뭔데요?]
“소금도 구했겠다. 오늘은 전갈 랍스터를 먹어 볼 거야.”
정다운은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코끼리 골렘 등 위에서 요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전갈은 독만 걷어 내면 90퍼센트가 단백질이라고.”
[90퍼센트요? 그런 건 또 어떻게 알았음?]
“몰라. 지금 내가 정했어.”
그렇게 말하며 그는 코끼리의 머리 위에 솥 하나를 꺼냈다.
사람 하나가 목욕해도 될 만한 거대한 크기의 솥이었다.
<신전의 함정을 또 훼손시키셨군요.>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너무 깐깐하게 굴지 말자고.”
이 솥은 바로 용의 신전에 있던, 끓는 기름 함정에서 꺼내 온 것이었다.
감자튀김을 만들었을 때도 썼던 바로 그것이다.
[이것도 튀겨 먹게요?]
“아니, 오늘은 삶아 먹을 거야. 물부터 끓이자.”
[장작 피울까요?]
토끼는 이미 충성스런 하인이 되어 있었다.
대체 이 사막까지 와서 간신히 찾아낸 소금이 대체 무슨 맛을 만들어 내는지 궁금했다.
토끼는 이미 몇 번이나 해 본 듯 능숙하게 장작불을 지폈다.
그 둘레를 정다운이 흙벽돌을 쌓아 간단한 화로와 바람막이를 설치한 후.
“온돌 설치!”
[온돌을 설치합니다.]
차차차착!
2배속으로 장작 위에 간이 온돌이 설치되었다.
“짠! 이러면 온도 조절이 자유로운 인덕션이 된단 말이지?”
최근에 개발해 낸 온돌 스킬의 새로운 활용법이었다.
돌판 위에 떡하니 물이 든 솥이 올라가고, 온돌의 온도를 최대로!
“뽜이어!”
화르륵!
‘온돌’ 스킬은 같은 화력으로 돌의 온도를 최대한 높일 수 있는 능력이었다.
열효율이 좋아진다는 뜻!
불을 더욱 세게 지필수록 돌판의 온도가 최고조로 올라가니 물이 끓는 속도도 훨씬 빨랐다.
“여기에 미리 소금을 넣어 주면 끓는점이 더 올라간다더라고.”
[아는 게 많아서 먹고 싶은 것도 많으시겠네.]
“너는 여기 있으면 어떡해? 동민이 좀 가서 도와줘야지!”
[아, 맞다. 꼬맹이, 잘되고 있음?]
그 바로 앞에서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 오동민은 어째 기분이 좀 서러웠다.
[오? 의외로 잘 싸우네?]
“사, 사람 살려……!”
[에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네요.]
우적우적!
절박한 표정과는 달리, 오동민은 말 그대로 잘 먹고 잘 싸우고 있었다.
지난 삼 일간 정다운에게 배운 거라곤 이게 전부였으니 그 효과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정다운이 외쳤다.
“물 끓었다! 한 마리 가져와!”
[예압!]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죽은 전갈 하나를 끌고 가는 토끼.
오동민은 괜히 눈물이 났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점점 골렘들과 손발이 맞아 가고 있었다.
“크워!”
“취이이익!”
특히 골렘들의 몸에서 돋아 나오는 저 연두색 줄기!
꾸물!
휘리릭!
그것은 바로 정다운이 함정 스킬로 골렘들 몸에 심어 둔 던전 감자!
정화된 뼛조각을 먹고 자란 그 굵은 줄기들이 전갈의 집게와 꼬리들을 칭칭 휘감았다.
그럼 그 틈을 노리고 오동민의 쇠꼬챙이가 놈들의 껍질 틈으로 콱! 박힌다.
“또 한 마리! 형, 또 잡았어요!”
전투를 거듭할수록 오동민의 눈빛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성취욕이 두려움을 압도한 것이다.
그렇게, 점점 오동민은 어엿한 전사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속도보다 더욱 빠르게, 솥에 들어간 전갈이 맛있는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헐? 뭐지?’
포만감 수치가 130%에 육박하는데도 눈이 돌아가게 만드는 엄청난 냄새였다!
‘으, 아닛!? 이 배신자들!’
오동민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치열한 전투 현장 바로 뒤에는 때아닌 먹방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코끼리 골렘 위에는 어느새 테이블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세상 맛있겠다…….”
급기야 정다운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새빨갛게 다 익은 전갈을 반으로 가르자, 쩌억! 하고 등이 갈라지며 드러나는 뽀얀 속살!
그 위로 모락모락 피워 오르는 하얀 김!
문득 생각해 보니, 던전에 오기 전에는 한 번도 이런 고급 요리를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이 괴물들 한가운데서 뜻밖의 호강을 하게 된 것이다.
“불맛도 줄까?”
화르륵!
횃불을 살살 흔들어서 속살 끄트머리를 노릇노릇하게 구웠다.
한편, 옆에서는 토끼가 기름장을 만들고 있었다.
정갈한 선비의 자세로 소금을 갈아 들기름과 버무리고 있었다.
그 일련의 모습에 오동민의 눈이 파르르 흔들렸다.
“설마? 저 빼고 드시려는 건가요? 저는요? 제 거는요!?”
“빨리 안 오면 다 없어진다?”
“으아아!”
갑자기 전투력이 솟구쳤다.
소년이 진정한 전사가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