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48화>
* * *
그런 의미에서, 오늘 밤 일정이 결정됐다.
“사막에 가자!”
[아니, 뭔 또 사막이에요? 누가 오류 종자 아니랄까 봐, 이젠 아주 게임 배경만 골라서 찾아다니시네.]
토끼는 당연히 질색했다.
가뜩이나 몸에 털도 많은데 사막이라니? 상상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직급이 깡패라고, 거부권은 없었다.
오히려 갑질이 횡행했다.
“토끼, 넌 동민이 눈에 안 보이게 알아서 잘 따라와. 날아다니면서 위에서 길잡이 역할도 좀 해 주고. 지반이 약해서 전망대도 못 지을 테니까 네 역할이 중요하다.”
[싫다. 이 악마야.]
“오키. 그럼 앞으로는 토끼답게 풀만 먹는 걸로-”
턱.
정다운이 쿨하게 뒤를 돌자, 그 어깨를 턱 하고 다급히 붙잡는 하얀 앞발.
토끼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건 기분 탓.
[에헤이. 왜 또 이러시나? 제 별명이 사실 사막 토끼랍니다. 사막 꿀잼. 개꿀잼.]
다소 불협화음이 있었지만(토끼에게만) 어렵게 극적 타협이 체결되었다.
* * *
사실 ‘폭염의 사막’은 시작의 숲에서 엎어지면 바로 코 닿을 거리였다.
그런데 참가자들 중 어느 누구도 가려 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딱 봐도 식량과 식수를 구하기 힘들뿐더러, 극한의 더위와 추위가 공존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낮에는 공기도, 땅도 이글이글 끓어오르다가, 해가 지면 반대로 엄청나게 추워지는 곳이 바로 폭염의 사막이었다.
그뿐이랴. 괴물들도 버젓이 돌아다녔다.
낙타를 닮은 식인 괴물이라든가, 괴물 전갈이라든가, 그 밖에 또 어떤 괴물들이 모래 속에 숨어 있을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나한텐 골렘들이 있지!”
“크워!”
“부오오!”
“오옴! 오옴!”
정다운은 오랜만에 골렘들을 전부 소환했다.
무서운 척해 봐야 겨우 스테이지-1일 뿐이었다.
“이 구역 최강 보스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면 지들이 어쩔 거야?”
사막의 기후도 전혀 문제될 것 없었다.
낮에는 너무 더워서 힘들겠지만, 밤이라면 어떨까?
추위? 그야말로 익숙했다.
“난방 세게 틀면 되지.”
화르륵!
정다운은 온돌을 풀가동시킨 뜨끈뜨끈한 코끼리 골렘을 타고 사막에 결국 발을 들였다.
“따뜻하고 시원하고 딱 좋네! 이렇게 하룻밤만 딱 돌아보고 오자.”
“부오오!”
낮에는 더워서 밤에만 이동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게이트가 있어서 언제든 돌아갈 수 있지 않은가.
‘이번 참에 사막에 게이트를 하나 만들어 두는 것도 좋겠지.’
모래가 또 언제 필요하게 될지 어떻게 아는가.
“형! 이 골렘 진짜 캠핑카 같아요! 나 어릴 때 캠핑카 타고 여행 가는 게 꿈이었는데!”
“네가 어릴 때면 대체 언제냐…….”
“초등학교 2학년 때요.”
갑자기 우르르 나타난 골렘들을 보며 오동민은 아까부터 잔뜩 들뜬 표정이었다.
하지만 진짜 그럴 리가 있나.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저 작은 꼬맹이가 애써 꿋꿋한 척하는 게 눈에 뻔히 보였다.
“형, 나 지금 좀 수련회 마지막 날 밤 같아요. 그런데 수련회 끝나자마자 시험 기간이라 조금 무섭네요.”
“비유 그럴싸하네. 그래서 내가 시험 공부는 좀 시켜 줬잖아?”
“그러게요. 감사해요, 형.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싹싹하고 똘똘한 녀석이다.
녀석의 심경이 이해가 가서 괜히 쓴웃음이 나왔다.
겨우 삼 일간이지만 조금 정이 들었다.
하지만 끝까지 데리고 다닐 방법이 없는데 어쩌랴.
자신과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온실 속 화초가 될 뿐이었다.
드디어 오늘 밤이 딱 약속한 삼 일째였다.
내일은 녀석과 헤어질 것이다.
‘그리고 며칠 쉬었으니, 다시 계단이나 깎으러 돌아가야지.’
밤에는 사막, 낮에는 바위산.
그게 앞으로의 계획이었다.
* * *
“어? 쟤네들 어디 가는 거지?”
정처 없이 사막을 이동하던 중, 정다운은 이상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저 멀리 사막 괴물들이 어디론가 줄지어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토끼, 저거 뭐야?’
[어디디디 더더덜 추운 데데라도 찾아가나 보죠. 아무리 괴물이라도 추운 걸 좋아할 리 없잖아요.]
밖에 나가 있는 토끼의 목소리가 달달 떨릴 정도니 말 다했다.
“덜 추운 곳이라? 한번 따라가 보자.”
서로 종류가 다른 괴물들이 싸우지도 않고 줄지어 이동하는 광경은 상당히 기이했다.
“따라가면 오아시스라도 나오려나?”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곳이 기다리고 있었다.
“헐.”
“제가 뭐랬어요? 우리 아빠가 허튼소리 할 리가 없다니까요.”
어깨를 으쓱거리는 오동민의 말에 정다운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너희 아빠 만세다. 복 받으실 거야.”
녀석에겐 얼마든지 우쭐거릴 자격이 있었다.
아주 2박 3일 코스로 우쭐권이라도 만들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들은 지금 지평선 너머까지 끝도 없이 펼쳐진 새하얀 땅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 하얀 모래의 정체가 사실 모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짠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정다운은 손가락으로 바닥의 모래를 찍어 혀에 콕 대 봤다.
……짜다.
콕콕.
진짜 짜다.
콕콕콕!
엄청나게 짜다!
몇 번을 확인해 봐도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맙소사. 진짜 이게 다 소금이라고?”
자연의 신비란 이런 게 아닐까?
어딜 둘러봐도 보이는 건 소금뿐!
그리고 추위를 피해서 삼삼오오 몰려든 괴물들!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조금 전까지도 분명 발이 푹푹 빠지는 평범한 모래사막이었는데, 무슨 영문인지 점점 땅이 단단해지더니 밑에서부터 열기가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
괴물들이 사막의 추위를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몰려드는 장소.
이곳이 바로 그토록 찾던!
<업적 달성!>
“소금 사막 발견!”
급한 길도 돌아가는 당신의 탐험 정신에 던전이 감탄합니다.
- 보상 : 사막 소금에 감칠맛이 더해집니다.
급기야 업적까지 달성해 버렸다.
“급한 길도 돌아가는? 이게 뭐라고 업적까지 뜨냐. 보상은 또 왜 이따위고?”
“헐, 신기하다. 저 이런 거 처음 봐요.”
업적 달성 창이 익숙한 정다운과는 다르게 오동민의 표정은 잔뜩 들떠 있었다.
보상의 쪼잔함보단 처음 경험하는 던전 시스템 자체가 신기한 것이다.
[최초 업적이 아닌 거 보니, 아무래도 제가 봤던 참가자도 여기 와서 소금을 구했었나 보네요.]
어딘가에서 소금의 맛을 확인한 토끼의 놀란 음성이 들려왔다.
정다운은 바로 따졌다.
‘야, 업적까지 뜬다는 말은 애초에 참가자들보고 여기서 소금부터 얻고 게임 시작하라는 말 아냐? 토끼 너, 설마 바분처럼?’
[헐, 실례에요! 알면서도 말 안 한 거 아니거든요? 누굴 바분으로 아시나! 그리고 이게 뭐 대단한 비밀도 아니고!]
토끼는 몹시 억울한 목소리로 항변했다.
[애초에 여기 모래를 제가 먹어 봤어야 짠지 단지를 알죠. 도우미는 아무것도 못 먹는다니까요?]
‘아하, 그러네. 쏘리.’
[와, 바로 사과하니까 더 얄밉네! 차라리 우기라고요.]
어딘가에서 발을 동동거리고 있을 토끼를 생각하며, 정다운은 낄낄거리며 두 팔을 걷어붙였다.
“자아, 그럼 소금을 한번 캐 보실까?”
“넵! 형, 우리 누가 더 많이 모으나 시합할래요?”
“……?”
정다운은 눈을 초롱거리며 자신을 따라 두 팔을 걷어붙이는 오동민을 말없이 내려다봤다.
역시 어려서 그런지 의욕이 넘친다.
녀석은 개구리처럼 바닥에 딱 엎드리고, 짧은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소금을 싹싹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다운이 왠지 조용하자, 슬쩍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는 오동민.
“왜요? 이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
“……돌 깨기.”
그의 손엔 어느새 메탈 해머가 들려 있었다.
쿵, 쩌적!
“헐?”
오동민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네모난 돌소금이 땅에서 쏙 뽑혀 나와 정다운의 소지품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돌소금도 결국 돌.
자잘한 모래 소금 따위는 무시하고, 그 밑에 깔린 지반 자체를 뜯어낸 것이다.
정다운은 몹시 신이 났다.
결국 소금을 찾아내고 만 것이다!
“이제 기름도 만들었고, 소금도 찾았다! 이제 드디어! 드디어!”
그는 엄청난 환희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기름장에 삼겹살을 찍어 먹을 수 있다!”
[이 미친 님아! 고작 그것 때문에 이 난리를 쳤냐!]
바로 토끼의 회신이 돌아왔지만, 정다운은 당당했다!
“무슨 소리! 깻잎까지 있다고! 깻잎에 기름장이라고! 이 궁극의 조합을 이길 자가 누구냐! 오늘 밤은 동민이 송별 기념 회식이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동민아, 몸 건강히 잘 살아라!]
“돌 깨기! 돌 깨기! 돌 깨기! 돌 깨기!”
<소지품>
돌소금(37), 흙벽돌(99), ……
소지품 안에 쭉쭉 채워지는 돌소금들!
그러다 정다운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손을 멈췄다.
“아, 맞다. 이건 이렇게 많이 캘 필요 없지? 이 소금 다 먹으려다 고혈압 걸리겠네.”
이래서 습관이란 게 무섭다.
어느새 그들이 서 있는 지반이 한 층 밑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정다운은 돌소금 몇 덩이를 다시 꺼내 오동민 앞에 내려놨다.
“자, 너도 챙겨. 이 정도면 죽을 때까지 먹고도 남을 거야. 먹고 던전에 길이 남을 빛과 소금이 되거라.”
“……죽어서도 짠돌이로 소문나겠네요. 고마워요, 형.”
“고맙기는. 다 네 덕분에 찾은 건데. 내가 더 고맙다.”
정다운은 흡족하게 웃으며 소금이 묻은 손으로 오동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번쩍!
갑자기 손등 위로 황금빛 글씨가 떠올랐다.
<자격이 충족되었습니다.>
“어?”
알파였다.
“형? 또 무슨 업적 창이라도 떴어요?”
자신의 머리 위에서 뭐가 번쩍거리자 고개를 갸웃하는 오동민.
정다운이 알파에게 물었다.
“자격이라니? 갑자기 뭔 자격?”
<이 소년에게 한 말입니다. 인간 주제에 신전의 주인에게 도움을 주고 진심으로 감탄하게 만든 것은 아주 큰 업적입니다.>
“업적?”
갑자기 익숙한 용어가 튀어나왔다.
<그 업적이 인정되어, 이 소년은 이제 ‘용의 사도’가 될 자격을 얻었습니다.>
“용의 사도?”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말이었다.
[그거 도우미 말하는 거 아님!?]
그때 갑자기 토끼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깜짝 놀라는 오동민.
“헉? 말하는 토끼다!”
[시끄럽다, 꼬맹이. 네가 감히 나설 자리가 아니야.]
“무, 무섭…….”
오동민은 토끼의 서슬 퍼런 기세에 화들짝 놀라 정다운의 뒤로 숨었다.
사실은 추워서 더는 못 참고 튀어나온 것이지만, 토끼의 표정은 오랜만에 진지했다.
[알파님. 저번엔 도우미라는 직위가 없다더니, 있었네요?]
<전혀 다릅니다. 용의 사도란, 신전 밖에서 에르테아 님을 섬기며 제물을 바치는 자를 말합니다.>
알파의 태도는 단호했다.
생명의 용 에르테아만을 섬기며 살아온 외길 인생.
죽음의 용 따위와 비교되기 싫었던 것이다.
오동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정다운이 물었다.
“얘가 나를 감탄시킨 게 업적이라고?”
<그렇습니다. 당신은 조금 전 이 소년의 업적에 진심으로 감동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자격 시험. 스케일은 작지만 당신이 통과했던 용의 시련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그러니까…… 업적 달성이라는 거네?”
묘한 기분이었다.
이건 마치 던전의 업적 시스템과 똑같지 않은가?
다른 점이 있다면, 감탄을 한 주체가 던전이 아니라 정다운이라는 것뿐이었다.
“혹시 얘가 용의 사도가 되면 죽음의 용이 새긴 낙인도 지워질까? 용의 신전에 데리고 갈 수 있어?”
정다운의 관심사는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일 쉽지 않았다.
<그건 아닙니다. 겨우 사도 수준으로는 죽음의 용의 권능을 이겨 낼 수 없습니다. 관리자가 된다면 모르지만 이 소년에게 그 정도의 자격은 없습니다.>
“그럼 대체 뭐가 좋은데?”
<우리 모두에게 좋습니다. 특히 당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