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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리셋 (47)화 (47/393)

<던전리셋 47화>

깻잎은 여러모로 훌륭한 식물이었다.

한방에서는 깻잎이 구토나 설사에 효과적이고, 열도 내려 주는 식품이라고 했다.

또한 여러 가지 무기질과 비타민 A와 C, 철분의 함량도 높아 건강에도 좋고.

무엇보다 특유의 향긋한 향이 육류의 누린내와 생선의 비린내를 잡아 주기 때문에, 상추와 함께 대표적인 쌈 채소로 유명했다.

쉽게 말해, 맛있다는 뜻이다.

[옜다, 깻잎 받아랏!]

와르르.

그날 밤, 정다운의 앞에 깻잎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오, 많이 따 왔네? 수고했다.”

[흥. 수고했으니까 물엿이나 빨아야지.]

쫍쫍쫍.

토끼는 물엿을 한 숟가락 푸욱 떠서 입에 물고는 어깨를 토닥였다.

하루 종일 숲을 쏘다녔으니, 엄살이 아니라 진짜 힘들긴 한가 보다.

[시키는 대로 꽃도 같이 따 오긴 했는데, 얘네는 꽃송이가 자글자글한 게 좀 이상하게 생겼더라고요.]

“응. 이건 꽃이라기 보단 알 집에 가깝거든.”

[알 집? 뭔 알?]

“들깨 알.”

[들깨 알?]

고개를 갸웃하는 토끼의 반응에 정다운이 씨익 웃었다.

“깻잎이라는 게 원래 ‘깨의 잎’이라서 깻잎이거든. 정확히는 들깻잎이지.”

정다운은 그렇게 설명하며 깻잎들 사이에 피어 있는 들깨 송이를 조심히 뜯어 바닥에 탈탈 털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동글동글한 알갱이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진짜 깨알 같다.

“이게 바로 들깨야.”

[씨앗이네요. 그래서 이것도 신전에서 키우게요?]

“아니. 먹을 건데?”

그 말에 토끼가 고개를 갸웃했다.

[먹는다고요? 이 눈꼽만 한 걸 누구 코에 붙여요?]

말은 그렇게 해도 궁금한 건 못 참았다.

토끼는 손가락으로 들깨를 살짝 찍어 입에 넣어 봤다.

당연히 아무 맛도 안 났다.

[이걸 왜 먹음? 퉤퉤. 떫기만 하네.]

“그냥 먹진 않지. 빻아야지.”

[빻아? 으깬다고요?]

“응.”

[으깨면 맛있어짐?]

토끼는 표정이 더더욱 아리송해졌다.

그러자 씨익 웃는 정다운.

“으깨고 짜야지. 들기름을 만들 거거든.”

그러면서 그가 꺼내 든 건 바로 어렵게(?) 공수한 스타킹이었다.

[뭔 말인지 모르겠네.]

토끼는 더는 묻지 않고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기로 했다.

그동안의 경험상, 가만히 기다리면 저러다 갑자기 맛있는 게 또 튀어나올 것 같았다.

*   *   *

들깨 같은 곡식을 빻거나 찧는 데 필요한 건 뭘까?

정답은 바로 ‘절구’다.

통나무나 돌의 속을 파낸 구멍에, 곡식을 넣고 절굿공이로 열심히 찧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다운 입장에는 돌절구를 만드는 게 훨씬 쉬운 일이었다.

“돌 깨기! 돌 깨기!”

땅! 땅! 땅! 쩌저적!

“우와! 형, 무슨 마술사 같아요!”

커다란 바위가 순식간에 절구통으로 변하는 신기한 마법!

오동민은 존경과 선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정다운을 구경했다.

“진짜 신기하다. 돌이 쩍쩍 쪼개지네요? 이것도 스킬이에요?”

“스킬이지.”

“진짜 짱이다. 형은 왜 이렇게 스킬이 많으세요? 어떻게 하면 저도 이런 스킬이 생길 수 있을 까요?”

“…….”

“……?”

그 말에 정다운의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 들었다.

당황하는 오동민.

“왜 그런 표정이세요?”

“……아니다.”

정다운은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목이 메인다.

“너도 하루 10시간 이상씩 100일을 꾸준히 돌을 깨 보렴. 없던 초능력도 생길 거야. 근육통에 관절염도 생길 거고.”

“……?”

“하지만 괜찮아. 우리에겐 생존자 전체 회복이 있거든.”

“……?”

오동민은 동그래진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가끔씩 이 형은 뜻 모를 소리를 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멋있었다!

이 또한 신비감 아니겠는가!

오동민은 자신의 인생에서 이렇게 멋있는 형님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큰마음 먹고 고백을 했다.

“형, 우리 여기서 탈출하면 나중에 같이 피시방 가요. 제가 캐리해 드릴게요. 제가 우리 반에서 제일 잘해요.”

“……거참, 눈물 나게 고맙네.”

뭐가 됐든 목표가 있는 인생은 참 좋은 것이다.

진짜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괜히 울컥한 마음에 정다운도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그래, 나중에 우리 꼭 다시 만나서 스타나 한판 하러 가자.”

“스타? 그게 뭔데요?”

“……있어, 그런 거. 민속놀이 같은 거야.”

망할 세대 차이! 목표 의식이 조금 약해진 기분이었다.

아무튼 절구통도 만들고, 절굿공이도 만들었다.

“이제 여기에 들깨 넣고 찧는 거예요? 달에 있는 토끼처럼 쿵덕쿵덕?”

“아니? 내가 왜?”

“……헐. 역시 그렇군요. 하긴, 그동안 받은 은혜가 있는데 동생인 제가 해야죠.”

오동민은 비장한 표정으로 자기 키만 한 절굿공이를 들었다.

뒤뚱!

너무 무거워서 스킬이라도 써야 할 판이었다.

“뭐 하냐, 너?”

낑낑대며 절굿공이를 옮기는 오동민의 모습을 정다운이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들깨 빻으라면서요.”

“힘들게 그걸 왜 직접 해?”

“그럼요?”

“사람이 머리를 써야지.”

“헐, 설마! 물레방아를 만드시게요?”

“내가 무슨 건축가도 아니고, 그런 걸 어떻게 만드냐?”

“그럼요?”

오동민이 아는 용어는 ‘물레방아’ 하나뿐이었지만, 사실 방아는 어떻게 작동시키느냐에 따라 종류가 다양했다.

사람의 힘으로 하는 디딜방아.

동물의 힘을 이용한 연자방아.

그리고 물의 힘으로 움직이는 퉁방아와 물레방아.

그중에서도 정다운이 사용하려는 방법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 이름은 바로 골렘 방앗간!”

“네? 골렘?”

*   *   *

“꼬꼬오!”

잠시 후, 땅굴 구석에 있던 게이트에서 타조 골렘이 모습을 드러냈다.

“헉, 대박. 이건 또 뭐예요? 쩐다!”

타조를 보자 오동민은 엄청나게 흥분해 버렸다.

이런, 맙소사! 사람보다도 큰 새 로봇이라니! 아니, 골렘이라니!

그런데 정다운은 자비가 없는 주인이었다.

타조의 주둥이를 가차 없이 벌리더니 그 안에 길쭉한 절굿공이를 푸욱 꽂아 버렸다.

“꾸왁?”

“휴, 됐다. 방앗간 기계 완성.”

하루아침에 엄청 튼튼하고 긴 돌부리가 생긴 타조 골렘이었다.

그리고 타조를 보고 한껏 들떠 있던 오동민은 동심이 파괴된 표정을 지었다.

“아프겠다. 잔인해.”

“뭐가 잔인해? 어차피 흙이라 안 아프거든?”

“그래도…….”

정다운은 열심히 만든 절구통 안에 들깨를 쏟아 넣고, 그 앞에 타조를 서게 했다.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계속 빻아.”

“꾸왁, 꾸왁, 꾸왁.”

쿵, 쿵, 쿵, 쿵.

타조는 앞으로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며 기다란 돌부리로 들깨를 빻기 시작했다.

이제부턴 사람이 할 일은 없었다.

나머진 그저 기다릴 뿐.

“이러니까 진짜 방앗간 같네요. 아니, 근데 원래 저러라고 있는 골렘이 아닐 텐데…….”

쿵, 쿵, 쿵, 쿵.

오동민은 물어볼 게 많았지만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정다운은 진짜 대단한 형이었지만, 그만큼 뭔가 대단히 이상한 형이기도 했다.

타조에게 일을 잘 시켜 놓은 정다운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다시 오동민을 일으켜 세웠다.

“자, 뭐 해? 다 쉬었으면 계속 훈련해야지?”

“헉. 넵.”

벌떡 일어나며 반사적으로 고기부터 입에 무는 오동민.

남은 기간은 이제 하루.

쉴 틈이 없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땅굴 한구석에는 아침에 잔뜩 잡아 온 다크모들이 시무룩한 얼굴로 갇혀 있었다.

“이제 몇 마리째였지? 나와 봐.”

“키히잉…….”

다크모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감옥에서 끌려 나왔다.

“자, 싸워.”

다크모들이 불행한 표정으로 오동민에게 덤벼들었다.

어차피 이겨도 죽고, 져도 죽는 배틀 로얄.

이 땅굴 안에 희망 따윈 없었다.

이쯤 되면 누가 참가자고 누가 괴물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   *   *

“됐다. 그만.”

“후아아…….”

털썩!

약속한 삼 일이 끝나고, 오동민의 훈련도 끝이 났다.

고작 삼 일 만에 사람이 얼마나 변하겠느냐만은, 그래도 나름 빡세게 굴린 보람은 있었다.

이 정도면 밖에 있는 참가자들 중에서도 오동민은 아마 최상위권의 전투직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배만 부르다면 말이다.

“이제부터는 홀로서기야. 죽으면 별수 없고.”

오동민은 미련이 남은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형, 앞으로도 계속 저랑 같이 다녀 주시면 안 돼요?”

“아쉽지만 안 돼. 난 여기 남아서 할 일이 있거든.”

“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칼 같은 거절에 오동민은 더 이상 칭얼대지 않았다.

여기까지 도와준 것만으로도 자신이 얼마나 그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는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고작 사이다 몇 개를 바치고 받은 도움치고는 엄청난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오동민 외에도 삼 일 만에 결국 결실을 본 것은 하나 더 있었다.

정다운은 흡족한 표정으로 완성된 들기름을 두 손으로 번쩍 들었다.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크으, 이 영롱한 빛깔! 진짜 멋있지 않냐?”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대단해요. 어떻게 겨우 삼 일 만에 깻잎에서 시작해서 들기름까지 나오죠? 훌쩍.”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함께했던 오동민은 조금 감동했는지 눈물까지 글썽였다.

“형, 진짜 존경스러워요.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다 배운 거예요?”

“어릴 때 할머니랑 시골에서 살았었거든. 대충 눈대중으로 본 거지.”

정다운은 아련한 눈으로 오래된 추억들을 떠올렸다.

“할머니는 말씀하셨지. 농사일 별거 없다. 그냥 힘들 뿐이다.”

결국 힘들지만 않으면 농사일도 할 만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정다운이 제대로 된 지식을 다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나머지 부족한 부분은 결국 나름의 요령과 잔머리로 때우는 것에 불과했다.

특히나 이번 같은 경우엔 특히 그러했다.

“진짜 아이디어가 쩔었어요. 어떻게 스타킹으로 기름을 짤 생각을 하지…….”

오동민이 크게 감동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다.

골렘에게 빻게 한 들깨 가루를 최종적으로 스타킹 안에 넣고 꽈악 짜서 들기름을 모은 것이다!

“훗. 보는 순간 딱 생각났지. 이 모든 영광을 너희 누나에게 바친다. 근데 너희 누나 이쁘냐?”

“음. 인기는 되게 많은데, 고3이라 공부만 해요.”

“쏘리. 형사님,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얼굴도 모릅니다. 들기름만 짰습니다.”

“저도 봤습니다, 경찰 아저씨. 이 형은 우리 누나 스타킹으로 들기름만 짰습니다.”

……풉!

결국 둘의 입에서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참을 그렇게 마주 보고 낄낄대다가 오동민이 물었다.

“그런데 형은 여기 남아서 뭐 하시는 거예요? 뭔가를 찾으시는 것 같던데.”

“소금을 찾고 있지.”

“소금이요?”

그 말에 오동민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숲에서 소금을 왜 찾아요? 바다에 가야 있죠.”

“여기 바다가 어딨냐? 내가 찾는 건 암염이야.”

“아하, 암염? 돌소금이요? 저 그거 뭔지 알아요. 우리 아빠 컴퓨터 바탕화면이 보통 그런 사진들이거든요.”

“사진?”

“네. 바탕화면 사진이요. 엄청 이쁘던데요?”

이쁘다니?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암염 동굴이 이뻐? 기껏해야 동굴이잖아.”

그 말에 오동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동굴이요? 제가 본 사진은 동굴이 아니었는데요?”

“그럼 뭔데?”

“아, 그거 뭐더라? 아빠가 그때 이름 알려 줬었는데…….”

오동민은 토실토실한 턱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다 눈이 반짝했다.

“아! 기억났다! 우유니 소금 호수! 거기 바닥이 다 돌소금이래요. 엄청 이뻐요.”

“소금 호수?”

잔뜩 기대했던 정다운의 눈에 실망감이 가득찼다.

호수라니? 어차피 이 근처에는 호수가 없지 않은가.

“그냥 호수가 아니래요.”

하지만 오동민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빠가 그랬는데 거기 우기 때만 호수고, 물 빠지면 세계 최대의 소금 사막으로 변한댔어요.”

……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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