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45)화 (45/393)

<던전리셋 45화>

까드득, 치이익!

하얀 뚜껑이 돌아가며 그 안에 억눌려 있던 탄산이 새어 나왔다.

자, 그럼 어디 컵에 따라 봅시다.

꼴꼴꼴꼴. 차아아-!

“이크!”

탄산 거품이 넘치려 하자, 깜짝 놀라 입술을 얼른 컵에 갖다 붙이고 후르릅 빨았다.

그러자 입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짜릿한 맛!

“……!”

눈이 번쩍했다!

용기를 내서 꼴깍, 한 모금 삼켜 봤다.

“……!”

눈이 더 커졌다!

이, 이럴 수가! 익숙하고 그리운 까끌거리는 촉감이 목젖을 거칠게 긁고 내려간다!

원샷! 첫잔은 무조건 원 샷이다!

꼴깍꼴깍, 꼴깍! 꼬올깍!

“……크으으!”

시원하게 트림으로 마무리!

이건 진짜다! 이건 진짜 쩔어 버렸다!

정다운은 시원하다 못해 우주까지 날아갈 것 같은 상쾌함에 머리가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크하! 이 좋은 걸 어떻게 그동안 참고 살았지!?”

“……그냥 평범한 사이다일 뿐인데.”

그가 감격하는 모습을 옆에서 멍하니 지켜보던 중학생 소년이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고작해야 사이다일 뿐인데 저렇게까지 전심전력으로 감동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두 눈을 꼭 감고 감격의 여운에 젖어 있는 정다운에겐 지금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역시 사람은 먹어야 산다.

스킬이고 던전이고, 일단은 맛있는 게 입에 들어와야 힘이 나는 것이다!

엔도르핀이 팔팔 넘치는 김에, 정다운은 오랜만에 몸을 신나게 움직였다.

“휴, 끝.”

그가 손을 털었을 땐 이미 주변이 다크모 시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박. 진짜 멋있다…….”

소년은 정다운을 선망의 눈길로 쳐다보았다.

원샷, 원킬.

그 무섭던 개구리 인간들을 진짜 개구리라도 밟아 죽이듯이 순식간에 정리해 버린 것이다.

거기서 그가 사용한 스킬은 오직 하나.

외뿔 멧돼지의 기운. (7레벨)

3.2배로 증폭된 압도적인 힘으로 가까이 오는 놈은 쇠꼬챙이로 후려치고, 1분이 지나 스킬 효과가 풀리면 흙벽돌을 던져서 압사시켰다.

근거리와 원거리 공격이 군더더기 없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단순명료한 전투에, 소년은 완전히 홀딱 반한 표정이었다.

[이래서 다크모는 너무 약하다는 거예요. 반면 눈치는 워낙 빠른 녀석들이라 정작 강한 상대를 만나면 도망치기 바쁘거든요.]

토끼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다운은 조금 새삼스런 기분이었다.

‘내가 강해지긴 강해졌구나. 옛날엔 진짜 무섭게 느껴졌었는데, 이젠 나 혼자 한 손으로 때려잡네.’

[괜히 던전 최약체겠어요?]

그때 소년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진짜 이 사이다로 괜찮으실까요?”

“응? 충분해! 오히려 차고 넘치지!”

정다운의 대답에도 소년은 조금 불안한 표정이었다.

사이다를 주면 목숨을 구해 준다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하지만 거의 반년 만에 사이다를 먹게 된 정다운에겐 몹시 합당한 이유였다.

[굳이 구해 줄 것 없이 그냥 죽게 놔두고 물건만 주워도 됐잖아요?]

‘인간 말종이냐? 나보고 사이다 주워 먹으려고 눈앞에서 사람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으라고?’

[어차피 님이 며칠 도와줘도, 이런 꼬맹이는 빠르거나 늦거나 언젠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어요. 님은 지금 그냥 자기만족인 거임.]

‘그게 어때서? 내가 만족하면 된 거 아냐?’

[흥, 그러네. 만족할 수 있지.]

정다운은 피식 웃었다.

토끼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래도 이런 열악한 세상에서 ‘1.5리터 사이다 3개’라니, 삼 일 정도는 충분히 도와줄 수 있지 않은가!

“자, 그래서 편의점에서 나오는 데 소환되었다고?”

“네, 형. 갑자기 엄마가 심부름을 시켜서 마트에 들렀다 오는 길이었어요.”

“중딩?”

“네. 이번에 입학했어요.”

“그럼 중딩이 아니라 거의 초딩이네. 어쩐지 어려 보이더라.”

소년의 이름은 오동민.

14살이지만 훨씬 앳된 느낌이었다.

키가 작고 통통한 체형이라 전체적으로 동그란 만두가 떠오르는 외모였다.

“아, 갑자기 만두 먹고 싶네.”

“제 친구들도 가끔 저 보면 그렇게 말해요. 별명도 그래서 오동통이에요.”

“한창 그렇게들 놀릴 나이지.”

오동민은 소심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밝은 성격이었다.

어쩌면 억지로 활달한 척하는 걸지도 몰랐다.

여기 와서 처음으로 자신을 도와준 어른에게 밉보이는 것이 두려울 테니 말이다.

“아무튼 받은 게 있으니까, 3일은 확실하게 지켜 줄게. 나만 믿어라.”

“감사합니다! 혹시 다른 건 안 필요하시나요?”

조금이라도 기한을 늘려 보기 위해 오동민은 찢어진 비닐봉투를 뒤적거렸다.

하지만 이미 다른 음식들은 다 먹어 없고, 남은 건 약간의 생필품들뿐이었다.

“이건 엄마 칫솔이고, 이건 아빠 치실, 이건 누나 스타킹, 그리고 이건…….”

순간 솔깃해서 물었다.

“칫솔이라고? 혹시 치약도 있어?”

“아뇨. 칫솔만 샀어요. 죄송해요.”

“아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그러면 칫솔 2개 세트니까 나 하나만 줄 수 있을까?”

“그럼요! 여기 가지세요.”

“오, 개이득.”

그동안은 구차하게 풀잎을 돌돌 만 나뭇가지로 양치해 왔는데, 하루아침에 문명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점이 생각났다.

“너 그런데 왜 소지품에 안 넣고, 그렇게 손으로 직접 들고 다니는 거야?”

“소지품이요? 그게 뭔데요?”

“개인 아공간 말이야. 몰라?”

“모르는데요?”

“어?”

……맙소사, 바분 이 자식이 설마!?

정다운은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어쩐지 먹을 걸로 실랑이를 하더라니! 소지품에 넣어 두면 애초에 그런 분란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헐? 의도적으로 기본 정보를 숨겼나 보네요. 이건 좀 비신사적인데.]

설마 했더니 바분 그 양아치가 모든 참가자들에게 상태 창만 알려 주고, 소지품 능력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건 토끼까지도 어처구니없어할 정도의 양아치 짓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가 최종 보스를 훔쳐 와서 생존자를 줄이려고 무리수를 둔 걸지도 몰라요.]

‘나 때문이라고?’

[네, 어쩌면요? 한쪽에서 난이도가 대폭 낮아졌으니, 편법을 써서라도 억지로 균형을 맞추려는 게 아닐까요?]

“저…… 제가 뭔가 잘못했나요?”

아차.

정다운이 갑자기 화를 내자, 꼬마가 잔뜩 주눅이 들었다.

괜히 마음이 안 좋아서 화제를 돌렸다.

“아냐. 소지품에 대해서는 나중에 천천히 알려 줄게. 일단 이동하자. 날도 저물었는데 이대로 밖에서 잘 수는 없잖아?”

“네? 어디 들어갈 데라도 있나요?”

“지금부터 만들어 줄게.”

정다운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눈이 동그래져서 자신을 쳐다보는 꼬맹이를 보니, 오랜만에 자신이 조금 어른스러워진 기분이었다.

*   *   *

[전망대를 설치합니다.]

정다운은 일단 전망대부터 설치했다.

언제나 주변 괴물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헐…….”

갑자기 눈앞에서 흙기둥이 쭉쭉 올라가는 것을 보고 오동민의 입이 딱 벌어졌다.

하지만 진짜 놀랄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화르륵!

“동민아, 이 횃불 좀 들고 있어.”

“네, 넵!”

바짝 얼어 있는 오동민의 손에 횃불을 들려 주고, 전망대 바닥에서부터 땅굴을 깊이 파 내려가기 시작했다.

“흙 뭉치기! 흙 뭉치기!”

서걱, 서걱!

“마, 마……!?”

말도 안 나왔다!

눈앞에서 네모난 구멍이 자꾸자꾸 생겨나는 모습에 오동민의 눈은 너무 놀라 앞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정다운은 바분이 지하 공간을 발견 못 하게 땅굴 입구를 감쪽같이 막아 버리고는, 본격적으로 땅굴의 크기를 넓혀 나갔다.

“자, 이만하면 잘 수 있겠지? 침대 쓰니? 만들어 줄까?”

“네? 침대라니요?”

척.

“만들었다.”

“……!?”

뭔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눈앞에 생겨난 두 개의 흙침대.

“배게는 높은 거 쓰냐, 낮은 거 쓰냐?”

“네? 나, 낮은 거요…….”

척.

“그럼 이거 써.”

“……?”

급기야 털가죽을 접어서 만든 배게까지 나타났다.

척.

“이건 이불.”

“……?”

푹신한 털 이불과 털 매트리스도 생겨났다.

……대체 이 형, 뭘까?

뭐가 자꾸 나오자, 오동민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려웠다.

이쯤 되니 진짜 정체가 궁금했다.

무섭고 두렵지만 정말 큰 용기를 내서 질문을 했다.

“형, 이것도 스킬 같은 거예요?”

“스킬 같은 게 아니라 스킬이 맞아.”

“무슨 스킬인데요?”

“흙을 뭉치는 스킬.”

“아, 네…….”

아까 자신을 구해 줄 때부터 조금 이상하다 싶었는데, 일단 대단히 이상한 사람인 건 확실했다.

정다운은 숨 쉬듯이 자꾸 뭔가를 만들어 냈다.

흙벽돌을 척척 쌓아 밥 먹을 테이블과 의자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흙 접시와 뼈 젓가락, 그리고 고기반찬이 올라왔다.

식단이야 항상 먹던 훈제 고기와 생선 구이에 불과했지만, 하루를 쫄쫄 굶은 오동민에게는 기적의 순간이나 다름없었다.

식량을 주다니? 오동민은 의자에 앉아 감격에 찬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저, 저 진짜 이거 먹어도 돼요? 목숨까지 구해 주셨는데 밥도 주시나요?”

“그럼? 내가 설마 나 혼자 먹으려고 이것만 꺼냈을까. 너무 많아서 처치 곤란이니까 더 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말해.”

“헐, 감사합니다! 정말 고마워요, 형!”

그동안 얼마나 배고팠는지, 오동민은 아까 구해 줬을 때보다도 훨씬 고마워하고 있었다.

“대신 사이다는 못 준다? 목마르면 물 마셔.”

“넵! 저 어차피 고기 먹을 때는 음료수 안 마셔요.”

“응? 왜?”

갑자기 뭔가 소신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녀석이 당당하게 말했다.

“음료수로 배 채우면 고기 많이 못 먹잖아요.”

“오오? 이 녀석? 뭔가 아는 놈인데?”

저 오동통한 볼살과 빵빵한 배가 어디서 온 건지 알 것 같았다.

“잘 먹겠습니다!”

예의 바르게 두 손까지 모으더니, 그 순간부터 눈앞의 고기를 와구와구 입안으로 쑤셔 넣는 성장기 어린이.

무슨 고기를 음료수처럼 마시는 느낌이었다.

저러다 체할까 싶어, 대화를 시도했다.

“너는 그럼 메인 스킬이 뭐냐? 여기 오자마자 생긴 스킬 있지?”

“아! 제 스킬이요? 으음…….”

급격히 시무룩해지는 오동민의 모습을 보니 떠오르는 건 하나뿐이었다.

“너도 생산직이구나?”

“아뇨.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이게 좀 애매해요.”

“생산직이 아니야? 스킬이 뭔데?”

“그게, ‘식신’이라는 스킬이에요.”

“식신?”

처음 듣는 이름이라 정다운의 고개가 갸웃해졌다.

“이런 스킬인데요…….”

식신 (초급 1레벨)

- 배가 부르면 힘이 난다.

- 포만감 수치가 100%일 때 신체 능력 2배 상승

“헐? 신기한데? 이런 스킬도 있구나.”

신체 능력 2배 상승이라니?

정다운에겐 몹시 친숙한 효과였다.

“그런데 배가 부르면 힘이 세진다니? 그럼 배고프면 힘이 약해져?”

물어봤더니 시무룩한 대답이 돌아왔다.

“음, 잘 모르겠어요. 애초에 여기 와서 스킬을 아직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거든요. 100퍼센트가 된 적이 없어서.”

“하긴, 워낙 먹을 게 없으니. 이런 스킬은 나한테나 좀 생길 것이지…….”

반대로 정다운 입장에선 몹시도 탐이 나는 스킬이었다.

식량이야 워낙 넘쳐나니까, 마음만 먹으면 하루 종일 포만감을 100%로 유지할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제한 시간이 정해져 있는 외뿔 멧돼지의 기운보다 어떤 면에선 훨씬 유용한 스킬이라 할 수 있었다.

“저한테 이런 스킬은 있으나 마나예요. 저는 배가 금방 꺼진다고요.”

다시금 자신의 처지를 깨닫자 한숨만 푹푹 내쉬는 오동민.

그는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배가 고파지는 성장기 어린이였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각.

토끼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건 갑질이 너무 심하잖아! 야근이라니! 내가 야근이라니!]

투덜투덜!

토끼는 이 캄캄한 밤중에도 암염을 찾아서 숲속을 헤집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괴물들이야 안 무섭지만, 문제는 언제나 바분이었다.

[으으, 이러다 바분이라도 마주치면 진짜 큰일인데……. 아, 위장이라도 좀 할까?]

한참을 노심초사하던 끝에 내린 결정.

토끼는 결국 주변의 풀을 뜯어서 자신의 몸에 덕지덕지 붙이고, 바닥에 딱 붙어 네발로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꼴이 몹시도 잘 어울리는 건 아마도 종족부터가 토끼여서가 아닐까.

어쩌다 보니 토끼는 본연의 적성을 점점 깨달아 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