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42화>
[크아악!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냔 말이다!]
바분이 실수를 했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토끼를 쫓아냈다는 데에 있었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그동안 스테이지-1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타 누락자라는 인간이 대체 어떤 망종이었는지…….
토끼에게 조금이라도 물어봤었다면, 적어도 아무런 대비도 없이 지금 같은 꼴을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최종 보스가 보스 룸을 멋대로 나가다니! 뭐 이딴 던전이 다 있어?!]
바분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 거대한 최종 보스를 누가 통째로 훔쳐 갔을 거란 상상은 꿈에도 할 수 없었다.
당연히 제 발로 걸어 나갔을 거라 생각했다.
[대체 어디로 가 버린 거야?! 어디냐고!]
바분은 미친 사람처럼 유적지 안을 샅샅이 뒤지고 돌아다녔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점을 하나 더 발견했다.
[응? 여기가 이렇게 한산했던가?]
뭔가 복도가 허전하다.
자신의 기억대로라면, 분명 보스 룸 근처에는 맷집도 좋고 성질도 고약한 외뿔 멧돼지들이 우글거려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돼지들이 다 어디 갔지? 구석에 몰려 있나?]
최종 보스를 찾는 김에 바분은 외뿔 멧돼지들도 같이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없었다.
진짜 어디에도 없었다!
[헉? 외뿔 멧돼지들은 또 어디 갔어? 이놈들 설마 같이 나간 거 아냐!?]
말을 하고도 바분은 자신의 머리가 어떻게 됐나 싶었다.
아니, 상황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설마 최종 보스가 외출하면서 돼지들까지 깡그리 데리고 나가기라도 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크윽! 이 미친 괴물들이 단체 파업이라도 하는 건가?]
물론 던전에 그런 시스템이 있다는 건 들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라고 해서 던전에 일어나는 일들을 전부 아는 건 아니었다.
[이, 일단 어떻게든 찾자! 아직 멀리 가진 않았을 거야!]
결국 그는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유적지 밖으로 나와 일대를 무작정 헤집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시점에, 모든 일의 원흉인 정다운은 이미 한참 멀리 나와 있었다.
“자, 식량은 이만하면 충분하고! 그래서 달달한 건 어디 가면 있다고?”
[달달한 건 시작의 숲 근처로 가야 해요.]
“시작의 숲? 던전 게임 시작 지점?”
[넴넴.]
바분과는 반대로 이 둘은 기분이 몹시 좋았다.
골렘들을 시켜서 슬슬 떨어져 가던 돼지고기도 싹쓸이 해 왔고, 물고기도 잔뜩 잡아 왔다.
게다가 남은 물고기들에게는 양질의 사료까지 잔뜩 뿌려 주고 왔으니, 다음에 돌아가면 아마 엄청나게 번식해 있을 터!
상상만 해도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이다.
“그럼 남쪽으로 가야 되네. 거기까진 땅굴이 안 뚫려 있는데. 밖으로 나가야 되나.”
[까짓것 나가면 되죠! 뭐가 문제임? 이 구역 최종 보스가 여기 몇 마린데요!]
기분이 좋은 건 토끼가 더 심했다.
평소에도 항상 업되어 있는 녀석인데, 지금은 아주 우주까지 날아갈 기세였다.
바분이 자신의 목소리를 숨기지 않은 덕에 그가 당황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전해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정다운은 토끼의 말대로 늑대 숲 중간부터는 땅 위로 올라왔다.
바분의 눈을 피하기 위해 전망대는 따로 건설하지 않았다.
어차피 리셋하면 사라질 테니, 그보단 땅굴 마지막 위치에 게이트를 설치하기로 했다.
알파가 또 투덜댔다.
<생명 에너지가…….>
“알았다, 알았어. 돼지 몇 마리 제물로 바치고 오면 되지?”
<그냥 여기서 드셔도 됩니다.>
“이 많은 걸 어느 세월에 먹어? 아무리 나라도 돼지고기 생으로 씹어 먹을 자신은 없다.”
정다운은 그 자리에서 바로 용의 신전으로 넘어가 제단에 외뿔 멧돼지들을 수북하게 쌓았다.
애초에 이러려고 도축도 아직 안 하고 있었다.
“제물을 바칩니다.”
꿀꺽!
이젠 식량도 많아졌겠다, 정다운은 아끼지 않고 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다시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갈 때는 골렘들을 전부 남겨 두고 한 마리만 데리고 나왔다.
토끼의 조언 때문이었다.
[괜히 우르르 다니다 바분의 눈에 띄어 봤자 좋을 게 없어요.]
그 말에 정다운도 동의했다.
토끼가 말하길, 도우미가 살생을 하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제물의 낙인이 찍혀 있을 것.
그리고 처형권을 사용할 것.
[하지만 문제는 그 바분 놈이 저보다 훨씬 높은 등급의 도우미라는 거예요. 뭔지는 몰라도 저보다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혹시 모르니까 최대한 마주치지 않는 게 좋겠네.”
<위험할 땐 바로 게이트를 여시면 됩니다. 허락받지 않은 존재는 절대 문을 넘지 못하니까요.>
[그게 아니라도 어차피 도우미는 스테이지 밖으로 못 나와요.]
정다운은 자신의 안전을 열심히 걱정해 주는 알파와 토끼를 보며 씨익 웃었다.
“결론은 걸리면 바로 튀면 된다는 거네.”
그거라면 또 자신 있었다.
* * *
시작의 숲은 참가자들이 던전 게임을 시작하고 약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를 지내는 곳이었다.
이는 평화롭게 살던 현대인들이 가장 처음으로 생존의 위기를 겪게 되는 시기였다.
처음 만나는 괴물? 그것도 무섭지만, 사실 정말 무서운 것은 바로 식량의 부족이었다.
빈손으로 소환당해서 당장 먹고 죽을 음식도 없었던 것이다.
가끔 운 좋게 수중에 먹을 걸 들고 있던 사람도 겨우 며칠을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마침 시장을 보던 중이었는지 반찬거리가 가득한 장바구니를 든 사람도 소환되었는데, 오히려 그런 이들이 더 위험했다.
평소엔 점잖던 사람들도 며칠만 굶으면 무뢰배로 돌변해서 식량을 노리고 달려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다운은 주머니에 숨겨 둔 초코바 하나 때문에 살인까지 일어나는 걸 목격한 적도 있었다.
“여긴?”
토끼가 안내한 지역이 어딘지 알게 된 정다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곳은 시작의 숲 끝자락.
여기까지 온 사람들을 교묘하게 유혹해 목숨을 앗아 가는 악마의 지역에 도착한 것이다.
토끼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식인 꽃밭이죠.]
“몰라서 물은 게 아니야.”
이 후각을 자극하는 달콤한 향기.
겨우 근처에 왔는데도 벌써부터 입가에 침이 고였다.
사람만큼 큰 주황색의 꽃잎들이 바닥에 펼쳐진 이 기이한 꽃밭은, 언뜻 보기엔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이게 다 속임수였다.
계속 굶주리던 사람들이 이 달콤한 향기를 맡게 되면 아주 눈이 돌아간다.
처음엔 조심하지만 결국엔 앞뒤 안 가리고 꽃밭으로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끝.
그 순간 저 꽃잎들이 호리병처럼 입을 다물어 사람들을 잡아먹는 것이다.
“설마 이게 네가 말한 그 달달한 거라고?”
[왜 아니겠어요? 냄새도 엄청 달잖아요.]
“속임수 아니었어? 아무도 맛있다던 사람을 못 봤는데?”
[그야 당연하죠. 이놈들의 꿀은 꽃잎이 호리병 모양이 되어야 안에서부터 차오르거든요.]
결국 사람이 잡아먹혀야 꿀이 만들어진다는 뜻이었다.
“호오.”
정다운의 눈이 반짝였다.
꿀이란다.
이 달콤한 향기가 고스란히 진짜 맛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대체 얼마나 달콤할까?
정다운은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흠. 그렇다고 나보고 저기 직접 갇혀서 먹으라는 건 아닐 테고. 꽃을 죽이는 게 먼저겠네.”
[뿌리째 뽑아야 돼요. 줄기 중간을 잘라 내면 바로 말라 버려서 꿀이 나오지 않거든요.]
“뿌리째? 어쩐지 아무도 먹어 본 사람이 없더라. 그 방법은 어떻게 안 거야?”
[예전에 누가 그렇게 해서 꿀을 꺼내 먹는 걸 본 적 있어요.]
“멋진데?”
역시 성공한 사람이 있었다.
과연, 어디서든 먹고살 길을 찾아내는 게 인간의 본능 아니겠는가!
“저 큰 꽃을 어떻게 뿌리째 뽑은 거지?”
[음. 제법 쓸 만한 스킬이 있는 참가자였어요. 결국 나중에 최종 보스한테 밟혀 죽었지만요.]
“…….”
결국 꽃 상대로는 쓸 만했지만 골렘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는 뜻이다.
잠시 그에게 애도를 표한 정다운은 바로 고릴라 골렘을 불렀다.
“일단 한번 먹어 보고 나서 계속 얘기하자. 고릴라야, 이거 좀 하나만 뽑아 줄래?”
“크워!”
고릴라 골렘은 두 팔을 걷어붙이고 식인 꽃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그러자 그 순간,
캬웁!
주황색의 꽃잎들이 쥐덫처럼 빠르게 다물어지며 고릴라를 공격했다.
“……크어?”
고릴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라는 걸까?
쥐덫이 흙으로 된 골렘의 발을 열심히 물어뜯고 있었다.
캬웁! 캬웁!
식물에게 지능 따윈 없었다.
상대가 흙이고 최종 보스고 간에, 그저 본능대로 움직이는 대상을 집어삼킬 뿐이었다.
한 발 더 가까이 가자 옆에 있던 다른 꽃도 반대쪽 발을 물었다.
캬웁! 캬웁!
그러든가 말든가, 고릴라는 조심조심 주변 흙을 긁어 파냈다.
“크우우.”
결국 모종 파내듯이 꽃 한 송이(?)를 뿌리째 꺼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 후, 아직도 발을 물고 있는 식인 꽃을 강제로 뜯어내 정다운 앞에 들고 왔다.
“이렇게 보니 진짜 호리병 같네. 여기다 한잔 따라 볼래?”
“크어.”
정다운이 내민 빈 수통 위로 사람만 한 주황색 호리병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끈적.
잠시 기다리자, 호리병의 오목한 주둥이 끝에서 영롱한 액체가 쪼로록 흘러내렸다.
“오? 오오오! 나온다!”
수통 안으로 점점 황금빛 액체가 차오르는 모습에 정다운은 광분했다.
사람을 아직 안 먹은 놈인지, 양은 생각보다 적었다.
한 컵 다 받은 후, 혹시 몰라 정화 스킬부터 걸고 혀로 조심히 핥아 봤다.
할짝?
“……!”
맛을 본 정다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맙소사! 이거 진짜다!
“달다!”
[거봐요! 제가 뭐랬음! 에헴. 제가 꿀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꿀은 아닌데?”
[네? 꿀이 아님? 그럼 그게 뭔데요?]
“흠, 이건…….”
할짝할짝?
정다운은 심각한 표정으로 몇 번 더 황금빛 액체의 맛을 확인하고 나서야 결론을 내렸다.
“물엿이네.”
[물엿?]
“응. 향기는 엄청 진한데, 맛은 걸쭉한 설탕물이야. 토끼, 네가 결국 나에게 엿을 먹였구나.”
[엿? 나 뭔가 실수한 거임?]
슬그머니.
무슨 소린지는 몰라도 분위기를 보니 토끼는 일단 바닥에 엎드리기로 했다.
시키지 않아도 물구나무까지 서려는데, 갑자기 정다운이 표정을 싹 바꾸곤 껄껄 웃으며 토끼의 등을 짝 때렸다.
“잘했다고, 이 녀석아! 아주 칭찬한다!”
[오? 좋은 거임?]
토끼의 표정이 환해졌다.
“당연하지! 꿀보단 설탕물이 더 활용도가 좋거든! 어차피 꿀 같은 건 벌집에도 있잖아.”
[앗. 나 벌집도 어딨는지 아는데, 알려 줄까요?]
“아니, 벌은 무서워.”
아무리 골렘을 앞장세운다 해도 벌집을 건드릴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이 식인 꽃들이라면 얼마든지 챙길 수 있었다!
“그냥 여기 통째로 뜯어 가자.”
[네?]
“언제 한 송이씩 뽑아내? 여기 매번 다시 오는 것도 귀찮으니까, 신전에 싹 옮겨 심자고.”
정다운은 씨익 웃으며 바닥에 손을 짚었다.
“흙 뭉치기! 흙 뭉치기!”
그리고 얼마 후, 최종 보스를 찾아 헤매던 바분은 결국 이 참상을 목격하고 말았다.
[헉? 여기 있던 꽃밭은 또 어디 갔어!?]
아니, 이건 또 뭔 일이란 말인가!
식인 꽃밭이 있던 자리가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그것도 아예 언덕째로 없어져서 땅이 아주 민머리가 되어 있었다!
[발도 안 달린 식인 꽃들이 대체 어디로 튄 거야! 이걸 누가 파냈을 리도 없고!]
그렇다. 누가 파냈다.
하지만 바분은 자신이 정답을 맞혔다는 사실을 절대 알 수 없었다.
[이 스테이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냥 울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