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41화>
참가자들은 이미 한참 전에 혼이 나가 있었다.
“커헉! 헉헉!”
숲에 들어온 뒤로 얼마나 달렸을까.
폐가 찢어질 듯이 숨이 가빠 왔다.
혀라도 씹었는지 입에서는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다리에 힘이 풀린 지도 오래였다.
하지만 달려야 했다.
싸워야 했다.
이곳은 지옥이었으니까.
키키키키!
캬륵! 캬르륵!
‘놈들은 악마야! 우리가 지치길 기다리고 있어.’
숲의 괴물들은 날 선 무기를 경계하는지, 거리를 두고 따라오며 먹잇감들이 지쳐 쓰러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의 체력적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휘청!
체력이 다한 것일까, 마침내 숲을 달리던 참가자들 중 한 사내의 무릎이 꺾였다.
그리고 괴물들은 결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키힛!”
오싹!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름 돋는 웃음소리에 사내는 재빨리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너무 늦어 버렸다.
순간 등이 화끈했다.
“끄아악!”
끔찍한 고통에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주, 죽고 싶지 않아!’
사내는 피를 흘리면서도 덜덜 떨리는 두 팔을 움직여 필사적으로 바닥을 기었다.
악마들은 그 꼴사나운 뒷모습을 구경하며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키힛!”
“키히히!”
타박타박.
이 난쟁이 괴물들은 지능은 낮지만 상당히 비열한 성정을 지녔다.
단번에 죽이지 않고 먹잇감이 공포에 질려 죽어 가는 모습을 즐기는 것이다.
턱.
결국 사내는 막다른 곳에 다다르고 말았다.
그 위로 놈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아, 이렇게 죽는구나.’
그는 결국 절망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키힉!?”
“키이익!”
갑자기 놈들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순간 사내도 놈들처럼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무언가가 갑자기 사내의 발을 휘감아 들어 올린 것이다!
화악!
“으어억!?”
당황한 건 사내뿐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비명이 주변에서 연달아 들려왔다.
“으악! 이게 뭐야!”
“키히익!”
같이 쫓기고 있던 참가자들도, 뒤를 따르던 괴물들도, 모두가 한마음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이, 이건?”
몸이 거꾸로 뒤집힌 사내의 시야에 연두색 식물이 보였다.
꾸물?
던전 초입에서 많이 보던 식인초였다.
그런데 어째 좀, 크기가 많이 컸다.
‘이거 내가 알던 식인초 맞나?’
문득 저 앞에 자신과 같은 꼴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괴물들이 보였다.
“키힉! 키이익!”
바둥바둥!
꾸물?
식인초는 격렬히 발버둥 칠수록 더욱 상대를 옭아매는 습성이 있다.
열심히 몸을 움직이던 괴물들은 결국 두터운 실타래처럼 칭칭 감겨 옴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반면에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던 참가자들은 다리나 발목 정도만 휘감겨 묶여 있는 수준이었다.
상황을 이해한 참가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운이 좋았…… 나?”
괴물을 피하다 괴물 식물에 붙잡힌 꼴이지만, 덕분에 일단 한시름 놓아도 될 분위기였다.
줄기가 많이 두껍긴 해도 칼로 열심히 썰면 어찌어찌 빠져나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뭐지?”
사내는 시선을 들어 조금 전 자신의 앞을 막았던 벽을 쳐다봤다.
그것은 흙으로 된 높은 사각 기둥이었다.
마치 등대처럼 생긴…….
그리고 그 등대를 중심으로 둥근 ‘화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식인초들로 꽉 차 있는 곳을 과연 화단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까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화단이 맞았다.
앞에 푯말도 꽂혀 있었으니까.
[자연을 보호합시다!]
- 넘어오면 큰일 나요!
“……넘어오면 큰일 나요?”
참가자들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지금까지의 분위기에 안 맞게 너무나 태평스러운 문구였다.
생사의 기로 끝에서 갑자기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민 기분이었다.
왠지 이 너머엔 철봉과 시소도 있을 것 같았다.
[스테이지-1에 이런 함정도 있던가?]
하늘 위에서 그 모습을 관망하던 바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스테이지-1의 환경이 덜 파악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던전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함정이었다.
게다가 이 부자연스러운 흙기둥은 또 뭐란 말인가?
[초심자를 위한 장난질 같은 건가? 별게 다 있네.]
그런데 천천히 날아 흙기둥 꼭대기에 다다른 그의 눈이 꿈틀거렸다.
벽 안쪽에 계단이 존재했다.
단순한 기둥이 아닌 것이다!
[……대체 뭐냐, 이건.]
괜히 불길한 마음이 들어 계단을 따라 끝까지 내려가 봤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고, 그저 단단한 땅으로 막혀 있을 뿐이었다.
[이거 진짜 뭐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졌다.
어쩐지 농락당하는 듯한 기분.
가슴 한구석에서 자신의 오랜 도우미 경력이 강력한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경고음은 아주 정확했다.
여기는 사실 산에서 내려온 정다운이 임시로 만들어 둔 ‘전망대’였다.
바로 이 아래 땅속에 몰래 설치해 둔 게이트의 위치를, 나중에 돌아갈 때 멀리서 찾기 쉬우라고 표시해 둔 일종의 이정표였던 것!
그리고 이 주변을 감자밭으로 둘러싸 괴물들이 얼씬거리지 못하게 안전지대까지 만들어 둔 것이었다.
하지만…… 땅속을 꿰뚫어 볼 재주가 있지 않고서야, 바분이 그런 사실들을 알아낼 방법은 전혀 없었다.
[기분이 이상하군.]
전망대의 주변을 샅샅이 탐색해 봤지만, 특별한 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게 더 불안한 건 왜일까.
[……일단 유적지로 돌아가 보자.]
후우웅!
한달음에 유적지까지 날아온 바분은 가장 먼저 ‘제단’이 있는 곳을 찾았다.
제단은 던전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
유적지의 가장 은밀한 장소에 있었다.
바로 보스 룸 말이다.
[휴, 제단은 멀쩡하군. ……응?]
제단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바분의 몸이 갑자기 우뚝 멈췄다.
뭔가 이상했다.
[……응?]
바분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바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뭐지? 노안인가?]
비비적.
눈곱이라도 꼈나 해서 눈을 꼼꼼하게 비비고 다시 앞을 쳐다봤다.
끔뻑끔뻑?
다시 봐도 변한 건 없었다.
있어야 할 게 없었다.
[어어?]
아직 던전 게임의 초중반.
당연한 말이지만 보스 룸 한가운데에 든든하게 버티고 서 있어야 할 놈이 보이지 않았다.
바로 최종 보스!
그의 안색이 점점 파랗게 질려 갔다.
[이런 미친! 최종 보스 이놈 어디 갔어!?]
바분의 찢어질 듯한 괴성이 최종 유적지 밖으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세상에 이런 일이!
최종 보스가 집을 나갔다!
* * *
바분의 당황한 목소리가 던전 전체에 울려 퍼지자, 정다운과 토끼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어? 발견했나 보다.”
[낄낄. 저거 무슨 기분인지 내가 잘 알지.]
토끼는 아까부터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저기서 꽥꽥 소리 질러 봐야 어쩌겠나, 자신들은 이미 한참 전에 땅굴로 내려와 있었다.
[나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등잔 밑이 어둡지롱!]
여긴 사자상 연못이 있는 정다운의 첫 번째 아지트였다.
유적지 바로 밑에 이런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바분이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게다가 하필 그 입구가 바로 보스 룸 앞에 있는 함정 구멍이라는 건?
[꼴좋다! 너도 한번 내 꼴 나 봐라! 이런 게 바로 인과응보! 자승자박! 주인님, 앞으로도 계속 올 거죠? 그쵸?]
“너 하는 거 봐서.”
[에헤이! 왜 이러시나? 골렘 많을수록 더 좋은 거 다 아는데? 내가 앞으로 잘할게요!]
토끼는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안 하던 애교를 다 부렸다.
당연히 정다운은 질색했지만.
“야, 엎드……,”
[암요! 이미 엎드렸죠! 귀로 헤드 스핀이라도 돌까요?]
“…….”
바분을 엿 먹인 게 그리 좋을까.
토끼는 아주 본격적으로 난리 브루스를 떨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바분은 항상 토끼 자신을 무시하고 천시하고 괄시하던, 죽어도 싼 놈이었다.
[하지만 이젠 제 밥이죠. 매달 쌈 싸 먹을 겁니다. 쟤가 속 터져서 화병으로 죽을 때까지.]
어쩌면 바분도 몇 달 안에 자신처럼 좌천되어 거지꼴로 쫓겨날지도 몰랐다.
그리 생각하니 귀에 걸린 입꼬리가 다시 내려올 생각을 안 했다.
한편 정다운의 앞에는 못 보던 골렘 하나가 서 있었다.
아니, 토끼에게는 몹시 익숙한 형태. 바로 최종 보스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토끼는 그마저도 마음에 들어서 낄낄댔다.
[진짜 날강도가 따로 없네요. 설마 최종 보스의 핵만 홀랑 뽑았다가 다시 끼울 생각을 하시다니.]
“너 흙으로 골렘 만들어 봤냐? 안 만들어 봤으면 말을 마. 골렘 하나 만드는 게 얼마나 오래 걸리는 줄 알아?”
정다운은 앞으로 가급적 모든 시간을 죽음의 산맥 계단 깎는 데 투자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골렘들로 최종 보스의 사지를 붙잡고 강제로 눕혀, 핵만 뽑아서 최대한 형태를 유지시킨 것이다.
[그럼 얘는 이대로 쓸 거예요? 난 반가워서 좋음.]
“난 끔찍해서 싫어. 지금만 이렇게 데리고 다니다가, 나중에 핵만 여분 골렘에게로 옮길 거야.”
마침 산맥에는 핵이 없는 고릴라나 켄타우로스 골렘들이 몇 기 주차되어 있었다.
특별한 형태의 골렘이 필요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는 그 녀석들을 매달 하나씩 추가 가동시킬 계획이었다.
[주인님, 그럼 아예 여기다 게이트를 설치하는 거 어때요?]
“어, 그거 좋지.”
[후후. 한때 제 별명이 악마의 두뇌를 가진 토끼였죠.]
“별명도 많다.”
토끼는 바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엿 먹일 생각에 두뇌가 풀가동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정다운도 이미 하고 있었다.
파앗!
[게이트가 연결됩니다.]
“오키, 됐다.”
또 새로운 게이트가 탄생했다.
그걸 본 알파가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다.
<바치라는 제물은 안 바치고, 자꾸 생명 에너지만 소모하고 다니시네요.>
“어허, 이게 다 투자야.”
정다운은 흡족하게 웃었다.
이제 저쪽 유적지와 이쪽 유적지가 다이렉트로 연결이 된 것이다.
이쯤 되면 예전에 개통해 둔 땅굴 터널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덕에 흙벽돌도 잔뜩 챙길 수 있었고, 어차피 땅굴이 있으면 스테이지-1 어디로든 이동하기가 수월하니 나쁠 건 없었다.
“아, 온 김에 생선 구이나 좀 충전하고 갈까? 오, 우리 은둥이들. 그동안 알을 많이 깠었나 보네?”
오랜만에 사자상 연못을 둘러보니 물고기들 숫자가 상당히 불어나 있었다.
[이 물고기들은 왜 자꾸 늘어나죠? 옛날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님과 관련된 것들은 전부 리셋이 안 되나 봐요. 뽀뀨도 그렇고.]
“음, 여기가 지하여서 그런 게 아닐까? 그래서 게이트도 계속 지하에 만드는 거잖아. 지상만 리셋이 되는 듯.”
오랜만에 멍하니 연못을 구경하던 정다운은 무슨 생각인지 소지품에서 뼛가루 주머니를 꺼냈다.
“지금까지는 뭘 먹고 이렇게 번식했는지는 모르지만, 너희도 이거 한번 먹어 보렴.”
예전엔 혹시라도 물고기가 잘못될까 봐 아무 시도도 못 해 봤지만, 이제 와선 무슨 일이 생겨도 아쉬울 게 없었다.
정다운은 주저 없이 뼛가루를 연못 위에 솔솔 뿌렸다.
그냥 뼛가루가 아니었다.
정화 스킬까지 걸려 있는 고대의 괴물들 뼈였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연못의 물고기들은 수면 위로 와글와글 몰려와 뼛가루를 날름날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애기들이 좋아하니까 정다운은 신이 나서 더 뿌렸다.
“옳지, 잘 먹는다! 많이 먹고 쑥쑥 커라!”
[이거 어째 좀 불안한데…….]
한때 오류 종자 트라우마가 있었던 토끼는 그의 별거 아닌 행동에도 괜히 불안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