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39화>
세상일이란 게 참으로 얄궂다.
그동안 정다운은 매달 던전이 리셋될 때마다 최종 보스의 핵을 약탈해 왔다.
그건 곧 스테이지-1 난이도의 하락을 낳았고, 그만큼 생존자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모두가 윈윈이었다.
정다운은 골렘을 얻어서 좋고, 그 덕에 참가자들은 보스 룸을 안전하게 넘길 수 있어서 좋고.
다만 그중에서 유일하게 고통받던 이는 오로지 토끼뿐이었다.
결국 토끼는 그 일로 바분에게 유적지까지 강탈당하고, 도우미 자격까지 잃은 채 죽음의 산맥으로 좌천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그 상황이 확 바뀌었다!
아니, 상황은 그대로인데 도우미 역할만 달라졌다.
토끼에서 바분으로.
이 말이 뭘 의미할까?
[우흐흐흐. 주인님, 언제 출발하실 건가요? 분부만 내리십셔!]
앞으로 토끼 대신 고통 받게 될 도우미는 바로 바분이라는 말씀이렷다!
토끼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최종 보스를 약탈당하고 당황해할 바분의 모습을 떠올리자,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그때, 정다운이 물었다.
“최종 보스는 계속 흙 골렘이지?”
[넵. 계속 흙 골렘이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고요. 도우미에게 던전의 환경을 자의로 바꿀 권한은 없어요.]
“흠. 그럼 이번엔 아예 내려간 김에 산 밑에 게이트나 설치하고 와야겠다.”
좋은 기회였다.
그렇지 않아도 바위산에 올라온 뒤부터 다달이 산을 내려가는 게 상당히 번거롭던 참이었다.
땅굴을 만들 수 없어서 골렘들과 함께 산 위를 내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쥐들이 별로 없는 길을 찾아 연결해 놔서 힘들진 않았지만, 문제는 너무 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게이트로 스테이지-1과 여기를 서로 연결해 두면, 그 번거로운 과정을 모두 생략할 수 있었다.
[게이트? 오오! 설마 게이트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되신 겁니까? 하긴, 유적지의 주인이시라면 당연하겠네요!]
정다운의 말에 토끼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존경심까지 들 정도였다.
유적지의 주인이 된다는 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다.
이를 위해선 그에 합당한 ‘자격’을 증명해야 했다.
바로 격! 격이 높은 존재만이 유적지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가 얼마나 힘든 시련을 이기고 이 자리에 올랐을지 감히 상상도 가지 않았다.
토끼는 괜히 뭉클한 기분이 들어 코를 쓱 훔쳤다.
[킁. 그 하찮고 약해 빠졌던 인간이 언제 이렇게 훌륭히 커 버렸담. 제가 다 뿌듯하네요.]
“응, 엎드려.”
[……에헤이? 이렇게 훈훈한 분위기에서요?]
“응, 이 주인님이 좀 하찮아서 분위기 파악을 통 못 해. 머리 박고 두 발 들어.”
[낑.]
얄짤없는 주인님이었다.
토끼는 슬픈 표정으로 다시 바닥에 대각선으로 엎드렸다.
정다운은 그 앞으로 불쑥 씨감자를 내밀었다.
“자, 다 쉬었지? 감자 심자.”
[아닛! 산 밑으로 내려간다면서요? 괜히 늦장부리다 던전 리셋되면 어쩌려고요! 핵만 하나 날려요!]
“응. 그래서 남은 씨감자는 다른 데 심으려고.”
[어디요?]
“저기.”
[……?]
토끼가 대각선으로 빙글 몸을 돌려보니, 정다운이 가리킨 곳엔 흙 골렘들이 서 있었다.
바로 고릴라와 켄타우로스들 말이다.
[흙 골렘에다가 식인초를, 아니, 던전 감자를 심으시겠다는 건가요? 여기 땅도 넓은데 굳이 왜요?]
“골렘 몸에 키우는 게 의외로 성장이 빠르더라고.”
[그럴 리가요? 그래 봤자 같은 흙일 텐데요?]
의아해하는 토끼.
하지만 정다운은 이미 코끼리에게서 감자를 수확해 보고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식물이 빨리 자라는 이유가 뭐겠어? 비료지.”
[뭔 비료요?]
“골렘이 괴물들을 밟아 죽일 때마다 피가 흡수되더라고.”
당연한 원리였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코끼리 골렘은 수많은 괴물 쥐들을 밟아 죽였다.
그때마다 코끼리의 발에 스며든 피가 던전 감자의 양분이 된 것이다.
사람 먹을 음식에 괴물의 피가 비료로 쓰였다고 하면 좀 찝찝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모든 야채나 곡식들이 다 그렇게 크는 것 아니겠는가.
정다운은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으로 사람만 아니라면 뭐든 비료로 써도 된다는 주의였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다른 골렘들도 마찬가지라는 말이지. 오히려 앞장서서 싸운 녀석들이라 피가 훨씬 많이 스며들어 있을 거야.”
정다운은 그렇게 말하며 골렘들에게로 다가갔다.
요즘 그가 주로 데리고 다니는 구성은 고릴라 2기와 켄타우로스 2기였다.
개체를 골고루 섞는 편이 전투 시에 다양한 전략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녀석들의 몸에 감자를 키우기 위해선 먼저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차갑게 식은 흙의 온도를 올리는 것.
“온돌 설치!”
[온돌을 설치합니다.]
파바밧!
그 순간, 그의 움직임이 2배 속도로 빨라져 골렘들의 몸 안에 온돌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바닥이 아닌 곳에 온돌을 설치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스킬’로 만들어진 이상, 재료와 여건만 갖춰진다면 어디라도 설치가 가능했다.
‘일단 몸속에 열기가 잘 흐르게 고랑을 파고.’
파바밧!
2배속이라 작업이 엄청나게 빨랐다.
‘문제는 화로의 위치인데, 열기가 몸 안에 잘 퍼지려면 몸 중앙에 만들어야겠지?’
정다운은 고릴라들의 가슴 정 중앙을 과감히 도려냈다.
그리고 흡족하게 웃었다.
‘여기 불을 지피면 아이언맨과 헐크를 합친 느낌이려나?’
그리고 켄타우로스들은 상체와 하체가 만나는 부분, 등 쪽에 아궁이를 팠다.
[뭐 저딴 스킬이 다 있냐…….]
그 광경을 뒤에서 지켜보던 토끼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온돌이라니?
던전을 관리하면서 진짜 별별 스킬을 다 봤지만, 온돌 스킬은 진짜 처음이었다.
[하긴, 다 처음이었지, 뭐. 언제는 최초 아닌 적 있었나…….]
이젠 그냥 받아들일 때도 됐다.
이곳에 와서도 저 인간은 여전히 오류 종자로 살고 있었나 보다.
유적지의 주인이 되면서 오류가 사라졌다지만, 이쯤 되면 태생이 오류가 아닐까 싶었다.
“오케이! 개조 끝!”
정다운은 마지막으로 골렘들의 각 화로 안에 땔감을 집어넣고 불을 지폈다.
화르륵!
“크워어!”
“오오옴!”
골렘들의 몸 안에 뜨거운 불길이 타올랐다.
불이 주는 화려함 때문인지 골렘들은 훨씬 강력해진 모습으로 위압감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크워어!”
가슴에서 시뻘건 불이 타오르는 고릴라 골렘!
“오옴!”
등줄기를 따라 갈기처럼 불길이 피어오르는 켄타우로스 골렘!
생각보다 비주얼이 괜찮게 나와서 정다운은 살짝 감동해 버렸다.
“크으! 아주 그냥 포스가 철철 흘러넘치는구나! 이게 바로 화염 골렘인가!”
[쓸데없이 이름만 거창한 거 봐. 저게 뭐가 화염 골렘이야.]
토끼가 옆에서 이죽거렸다.
생긴 것만 2배로 무서워졌을 뿐, 골렘들의 전투력은 전혀 변한 게 없다는 사실을 알아본 것이다.
오히려 농사 기능이 추가되었으니, ‘농사 골렘’이라 이름 지어야 할 판이었다.
“뭐 하고 있어? 준비 다 됐으니까 심어.”
정다운이 부르는 소리에 토끼는 꼬르륵거리는 배를 움켜잡으며 세상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기요, 주인님? 그 전에 밥 좀 먹고 하면 안 될까요……? 저 이러다 죽어요. 체력이 벌써 6이라고요.]
“응. 체력 1 되면 말해.”
[헐? 와! 해도 너무하시네! 먹는 걸로 치사하게 이러기임? 악덕 주인님이시네!]
“응. 그게 바로 나임. 내가 헬조선 출신이라 좀 독해.”
그동안 당해 온 세월이 있는데 쉽게 넘어갈 리가 있나.
지은 죄가 있어서 주인님에게 자비를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꼬르륵.
“응? 나도 배고프네?”
[아싸!]
“알았으니까. 밥 차리는 동안 넌 계속 일해.”
[으히히!]
침 질질!
괄시를 받으면서도 토끼는 마냥 좋았다.
저 모습을 보라! 정다운이 지금 불판을 꺼내고 있었던 것이다!
저게 뭘 의미할까! 그가 땅굴에서 맨날 먹던 바로 그것이었다!
도우미라 차마 먹지도 못하고 항상 침만 뚝뚝 흘리며 구경하던 바로 그 전설의 음식!
치이익!
“새 식구가 왔으니, 오늘은 삼겹살 파티다!”
[우오오오!]
불판 위에 고기가 익어 가는 미친 냄새가 보스 룸에 가득 찼다.
토끼는 감자튀김에 이어 또 한 번 눈이 뒤집혔다.
[익었나요? 익었어요? 먹어도 됨!?]
“으음. 한 번만 더 뒤집고. ……좋았어! 익었다! 먹어라!”
캬웁!
정다운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토끼는 삼겹살을 입에 쏙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 순간의 감동은 먼 훗날까지도 두고두고 토끼의 입을 통해 회자되었다.
[크흑!]
육즙이…… 터진다! 체력 1의 극단에서 뜨거운 생명 에너지라는 것이 폭발한다!
이것이 바로 살아 있음! 오늘까지 힘든 인생을 버티게 해 준 진정한 삶의 목적!
[크윽, 감사합니다! 살아 있어서 감사합니다!]
토끼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고기를 씹고 또 씹었다.
태어나서 처음 먹어 보는 삼겹살이었다.
그런데, 이때까지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보스 룸 한구석에서 작은 동물 하나가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떼굴?
평소보다 더 통통해진 털 뭉치가 뒤뚱뒤뚱 걷다가 결국 바닥을 굴렀다.
하루 종일 구석에 숨어서 정화된 뼛조각을 갉아 먹었더니, 오늘따라 배가 뽈록 나와 있었다.
하지만 숙련된 땅다람쥐는 아무리 배가 불러도 식량을 아무 데나 방치하지 않는 법.
누가 뺏어 먹지 못하게 자신만이 아는 비밀 창고에 남은 식량을 모아 두는 것이다.
“뀨우?”
오늘은 마침 적당한 곳이 보였다.
화르륵!
평소와 다르게 엄청 따뜻해 보이는 흙 골렘들의 모습이 뽀뀨의 마음에 쏙 들어왔다.
마침 그곳엔 토끼에게 감자를 심으라고 송송 뚫어 놓은 구멍들도 보였다.
살금살금.
누구한테 들킬 새라 까만 콩 같은 눈동자로 신중히 주변을 탐색하며 골렘 위로 올라온 뽀뀨.
수많은 구멍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을 골랐다.
“뀨!”
어찌나 마음에 드는지 구멍 주위를 뱅글뱅글 돌며 기쁨을 표현했다.
그리고 빵빵하게 부풀어 있는 자신의 볼을 앞발로 꾹꾹 밀어 그 안에 저장해 둔 뼛조각들을 전부 뱉어 냈다.
“뀨우.”
다시 신중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핀 후.
후다닥, 구멍 안으로 뼛조각들을 전부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재빨리 구멍을 덮는다!
그 위를 발로 탁탁 밟아서 탄탄하게 만들고 나서야 뽀뀨는 안심할 수 있었다.
“뀨우우.”
“뭐 해?”
화들짝!
“뀨잇!?”
갑자기 정다운이 부르자 뽀뀨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발랑 뒤집어졌다.
그러곤 애써 딴청을 피우며 그 상태로 잠든 척을 하기 시작했다.
“꾸우꾸우우…….”
“자냐?”
“꾸우우.”
“누가 네 거를 훔쳐 먹겠니.”
눈을 질끈 감고 뒤집어진 채로 얼음이 되어 있는 뽀뀨의 모습에 정다운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다 녀석이 방금 뼛조각을 파묻은 구멍을 보며 눈을 빛냈다.
“내가 왜 이걸 생각 못 했지?”
작은 깨달음이 왔다.
근본이 식인초인 던전 감자가 빨리 자라기 위해선 피와 살뿐만 아니라, ‘뼈’도 좋은 비료였다.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었는데, 정다운이 눈여겨본 건 다름 아닌 ‘정화된 뼈’였다.
“지금까지 정화 스킬을 써서 손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