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38화>
“오?”
정다운은 바로 스킬부터 확인했다.
<스킬>
관리자 임명 (MASTER) NEW
- 신전의 관리자를 임명한다.
- 생명 에너지를 소모한다.
정다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시작부터 마스터 레벨이 달린 스킬이 생겨난 것이다.
“새로운 스킬이네? 저번에 준 게 전부가 아니었어?”
<신전에 남겨진 용의 권능은 용의 부활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앞으로도 특정한 조건을 충족시키시면 필요한 권능들이 개방될 겁니다.>
“조건? 앞으로 또 뭐가 더 있는데?”
<지식도 자격을 갖춘 자에게만 허락되는 것. 모든 정보를 열람하기엔 아직 당신의 정성이 부족합니다.>
“정성이라면, 제물 말이지?”
<그렇습니다. 신전에 생명 에너지가 많이 쌓일수록 더 많은 권능들이 개방될 겁니다. 혹은, 이번처럼 앞뒤 생략하고 특정 조건을 만족시켜도 권능이 개방됩니다.>
특정한 조건.
아마 이번의 경우엔 새로운 관리자 후보를 찾아내는 게 그 조건이었을 것이다.
‘찾아냈다기보단 제 발로 굴러 들어온 거지만.’
정다운의 시선이 토끼에게로 향했다.
[오오! 떠오른다!]
토끼의 몸이 황금빛 기류에 휘감겨 제단 위로 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이걸 참,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악연이라고 해야 할까.
한때 진짜 끔찍하게도 싫어하던 저 ‘빌어먹을’ 토끼와 이런 식으로 다시 재회하게 될 줄이야.
기분이 조금 묘했지만, 집에 돌아갈 때 부담 없이 떠날 수 있는 여건이 충족된 셈이니 지금은 순수하게 기뻐하는 게 맞으리라.
게다가, 한 가지 더 기뻐할 일이 있지 않은가.
‘우흐흐흐. 저 자식이 이제 내 후임자가 된다는 말이렷다? 이걸 어떻게 복수해 줘야 잘했다고 소문이 나지?’
오싹!
[히익? 님, 왜 그런 사악한 표정으로 날 쳐다봐요?]
그걸 몰라서 물어?
자기 잘못은 꿈에도 생각 못 하고 있는 저 녀석을 보니, 일말의 양심도 사라졌다.
정다운은 씨익 웃으며 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관리자 임명!”
번쩍!
[생명 에너지가 부족합니다.]
“아차, 여기에도 제물이 필요하구나.”
정다운은 골렘들을 시켜 방금 전 사냥해 온 괴물 쥐들을 제단 위에 수북하게 쌓았다.
“제물을 바칩니다.”
꿀꺽!
제물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신기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관리자 임명 스킬을 사용하는 데는 상당히 많은 생명 에너지가 요구되었다.
결국 정다운은 잡아 온 모든 쥐들을 제물로 바치고 나서야 스킬에 성공할 수 있었다.
“관리자 임명!”
파아앗!
[오옷!]
토끼는 자신을 감싸고 있던 황금빛 기운이 몸 안으로 흡수되자 환호성을 질렀다.
[아아아! 힘이 돌아온다!]
바짝 마른 사막처럼 고갈되어 있던 몸에, 새로운 에너지가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번쩍!
그간의 고생으로 너덜너덜 누더기가 되어 있던 토끼의 턱시도도 깨끗하게 변했다!
디자인도 한결 고급스러워졌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토끼의 상태 창까지 변했다.
<상태 창>
이름 : (Nameless)
칭호 : 중급 관리자
체력 : 11/100 (%)
포만감 : 17/100 (%)
[헐? 중급 관리자? 이렇게 다짜고짜!?]
상태 창을 본 토끼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저 도우미가 아니라 관리자가 된 겁니까? 심지어 중급! 혹시 뭔가 인사이동에 실수가 있으신 게 아닐까요?]
갑작스런 고속 승진으로 달달 떠는 토끼에게 알파의 사무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용의 신전이 던전 하나를 총괄했던 그대의 경력을 인정한 겁니다. 그리고 여긴 도우미 같은 어설픈 직분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암요! 어설픈 직분입죠! 괴물들이랑 말도 못 하고, 놀지도 못하는 도우미 따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럴 수가! 맙소사! 대박 사건! 곧바로 중급 관리자라니! 정말 대박이었다!
토끼는 공중에서 넙죽넙죽 절을 하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인생 한 방! 신세 역전 아니겠는가!
중급 관리자라면 그 바분 놈보다도 훨씬 훨씬 높은 직위였다.
토끼는 어찌나 흥분했는지 제단 위에서 오두방정을 다 떨었다.
그 모습에 정다운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알파에게 조용히 물었다.
“근데 난 시작부터 유적지 주인이었잖아. 왜 쟤는 겨우 중급이야?”
<당신은 용의 시련을 모두 통과한 분이니까요.>
“아…….”
토끼가 편의점 알바생의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중소기업에 입사한 상황이라면, 이쪽은 땅만 파던 삽질맨이 덜컥 CEO 자리를 물려받은 케이스였다.
‘하긴, 이 정도 망한 회사면 사장 밑에 바로 팀장일 수 있지.’
그렇게 생각하니 나름 합당한 인사이동으로 보였다.
[주인님! 주인님!]
“윽? 주인님?”
정다운은 토끼가 몹시 해맑은 표정으로 제단 위에서 부우웅 날아오는 모습에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왜 징그럽게 나를 그딴 식으로 불러?”
[당연히 유적지의 주인이시니까, 주인님이죠!]
“아, 그러네?”
[헤헷, 주인님, 앞으로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그동안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우리 다 잊고 앞으로 잘 지내 봐요!]
“……?”
초롱초롱!
“……?”
녀석 참, 몹시 초롱초롱하다.
정다운은 싱그럽게 웃으며 녀석에게 말했다.
“응, 꿇어.”
[……헷?]
초롱초롱?
정다운의 미소가 더욱 상큼해졌다.
“뭘 꼬나봐? 꿇어, 인마.”
[……쳇, 텄나.]
토끼는 띠꺼운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정다운의 미소가 더욱 사악해졌다.
“다 잊긴 개뿔. 어딜 대충 넘기려고?”
[헤헷. 아니, 서로 신세도 좋아졌는데 지나간 과거는 서로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시는 게…….]
“이 주인님이 쿨하지 못해 미안하다.”
[보시다시피 제가 지금 체력이 바닥이라서…….]
“오냐. 밥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엎드려뻗쳐.”
[넵.]
착!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닥에 엎드리는 토끼.
“머리 박아.”
[넵.]
“한 발 들어.”
[넵.]
“두 발 들어.”
[네?]
“들라면 들어.”
[넵.]
토끼는 결국 엎드린 채로 두 발을 다 들었다.
바닥에 머리를 박고 대각선으로 떠올라 있는 모양새.
이건 비행 능력을 쓰는 것도, 쓰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묘하게 체력이 쭉쭉 깎였다.
[으으으.]
대각선으로 낑낑대며 몸을 바들바들 떠는 토끼를 향해 정다운은 무심하고 시크하게 한마디를 남겼다.
“자, 이 상태로 감자를 심는다. 실시!”
[헉쓰.]
예부터 어른들은 말씀하셨다.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마라.
* * *
우뚝.
[낙인이 끊겼군.]
그 시각, 이상한 기분을 느낀 바분은 하던 일을 멈추고 죽음의 산맥으로 시선을 돌렸다.
토끼에게 걸어 둔 낙인 마법이 갑자기 끊어진 것이다.
왜일까? 토끼가 죽기라도 한 걸까?
아니, 그럴 리 없었다.
죽었다면 녀석의 생명 에너지가 제물로 바쳐졌을 터.
하지만 그런 기미는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바분은 가늘게 뜬 눈으로 죽음의 산맥을 노려봤다.
[스스로의 힘으로 낙인을 풀고 도망쳤다? 녀석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바분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어찌 됐든 난감하게 됐다.
도우미인 자신은 스테이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토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직접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되면 기타 누락자를 잡는 일도 요원해진다.
[쯧.]
잠시 생각하던 바분은 결국 마땅찮은 표정으로 혀를 찼다.
[뭐, 상관없나. 어차피 죽을 놈들. 어쩌면 기타 누락자도 벌써 죽었을지도 모르지. 생산직이었다던데.]
어차피 저긴 죽음의 산맥이었다.
먹을 것도 없고, 생명 에너지의 공급도 끊긴 상태로 저 죽음의 산맥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었다.
기타 누락자든, 토끼든 간에 말이다.
[끌끌. 이럴 거면 토끼는 바로 죽일걸 그랬군. 괜히 욕심부리다가 둘 다 놓쳤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놓친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던가.
[괜히 찝찝하군.]
바분은 입맛을 다시며 더 이상 그들에게서 관심을 끊었다.
자신은 지금 이 새로 얻은 스테이지-1을 파악하기에도 바빴다.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실험을 해 보면서 말이다.
[자아, 제군들. 계속 놀아 볼까?]
흠칫.
바분의 입가에 걸린 잔인한 미소에, 괴물들과 싸우고 있던 참가자들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같은 던전이라도 도우미의 성향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는 법.
토끼가 사라진 스테이지-1은 예전보다 더한 지옥이 되어 있었다.
* * *
정다운은 새로 생긴 동료(?)가 몹시도 반가웠다.
보스 룸에 밭은 다 만들었는데, 아직 감자를 다 못 심은 상태였던 것이다.
농사일은 자고로 함께해야 제 맛.
이게 무슨 화분에 물 주기도 아니고, 옆에서 거들어 주는 사람이 없으면 몹시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땅을 팔 터이니, 너는 감자를 심거라.”
[넵.]
순서는 삼 단계였다.
1) 정다운이 흙 뭉치기로 밭에 구멍을 낸다.
2) 토끼가 그 안에 씨감자를 쏙 집어넣는다.(물론 계속 두 발 들고 대각선으로 엎드린 채.)
3) 그럼 정다운이 들고 있던 흙덩이로 다시 구멍을 메운다.
이렇게 보스 룸을 졸졸 돌아다니며 계속 반복, 반복, 무한 반복.
이걸 정다운 혼자 했다면 몹시 번거로웠겠지만, 둘이서 같이하니까 그 속도는 2배 이상이었다.
결국 토끼가 낑낑 앓는 소리를 냈다.
여전히 녀석의 자세는 대각선이었다.
[주인님, 머리에 피가 쏠려요. 자세 좀 바꿔 주시면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는데…….]
“안 돼. 안 바꿔 줘. 바꿀 생각 없어. 빨리 심어.”
[다, 단호박이시네!]
“아, 그 말 들으니까 단호박 먹고 싶다. 그런 건 어디 없나?”
[달달한 게 땡기십니까? 그거라면 제가 잘 알죠!]
솔깃?
정다운의 눈이 반짝거렸다.
“어? 알아?”
[그럼요! 제가 누굽니까. 전직 던전 도우미! 그동안 스테이지-1을 관리하면서 참가자들이 이것저것 주워 먹는 걸 옆에서 많이 봐 오지 않았겠습니까!]
“호오? 그럴싸한데?”
정다운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그동안 잘 먹고 다녔다곤 하지만, 항상 같은 맛에 질려 있던 참이었다.
외뿔 멧돼지의 고기 아니면 생선.
그나마 나무에서 딴 열매들이 입가심을 해 주었지만, 고기 식량에 비해 그 수가 현저히 적어서 아쉬웠다.
오죽하면 던전 게임 초창기 때 먹었던 감자까지 키울 생각을 했겠냐는 말이다.
“차렷.”
[차렷!]
이때다 싶어 재빨리 몸을 일으키는 토끼!
너무 엎드려 있었더니 순간 핑, 하고 현기증이 돌았다.
그 어깨에 정다운의 손이 턱! 하고 올려졌다.
“허허. 이 친구, 이거! 걸출한 신입이 들어왔구만!”
[하하.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정다운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혹시 조미료도 구할 수 있을까? 소금이나 설탕 같은 거?”
[엇, 그것까진 저도 잘…….]
“감자나 심자.”
[비슷한 건 있을 겁니다!]
“어디에 있지?”
[일단 산 밑으로 내려가셔야…….]
“흐음.”
정다운은 잠시 스케줄을 고민했다.
절벽 계단 작업은 꾸준히 진행 중에 있었지만, 아직은 갈 길이 한참 멀었다.
언제 끝이 날지도 모르니, 어차피 한 번쯤은 식량 조달을 위해 산 밑에 다녀오긴 해야 했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차마 괴물 쥐까지는 먹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그놈들은 어디까지나 제물용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최근에 리셋 한 번 했지?”
[넵. 그럼요!]
“그럼 최종 보스도 다시 생겼겠네?”
[당연하죠! ……엇? 잠깐?]
정다운의 질문에 넙죽넙죽 대답하던 토끼의 표정이 갑자기 멍해졌다.
어라? 순간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러네요? 생겼겠는데요?]
토끼의 얼굴에 슬며시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걸 본 정다운의 눈도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렇지?”
씨익.
서로의 웃음이 교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