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32)화 (32/393)

<던전리셋 32화>

*   *   *

그 시각, 정다운은 중요한 계약 제의를 받고 있었다.

<신전의 주인이 되시면, 종말의 용의 낙인 따위 바로 지워 드리겠습니다.>

이건 무슨, 쓰던 핸드폰 해지하고 새 핸드폰 사러 온 기분이었다.

아니, 통신사를 바꾸는 중이었다.

종말의 용에서 생명의 용 통신사로.

<그리고, 당신에게 새겨져 있는 권능이 한 가지 더 있더군요. 인간의 언어로 풀이하자면 ‘던전 시스템’이라는 이름입니다.>

“던전 시스템? 스킬이나 업적 같은 거?”

<그렇습니다. 아마도 던전 마법을 변형 확장시킨 것 같은데, 흥미로운 방식을 도입해 인간을 초월자로 만들어 주는 권능입니다.>

어쩌면 이건 종말의 용이 인간들을 더욱 맛좋은 제물로 키워 먹으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었다.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권능은 당신에게 이로운 기능이라 여겨집니다. 이건 기존대로 유지시켜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당신이 터득한 스킬들도 계속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진짜로 핸드폰 바꾸는 기분이었다.

기존의 좋은 조건은 그대로 유지하되, 강제로 담보 잡힌 계정 정보만 이쪽으로 옮겨 준다는 것이다.

심지어 쓰던 어플(스킬)들도 계속 쓸 수 있게 해 준단다.

정다운은 결국 신전을 이어받기로 마음을 정했다.

“하나만 확실히 하고 가자.”

<무엇입니까?>

“내 목적은 집에 돌아가는 거야. 알지?”

<알고 있습니다.>

“그럼 언젠가 내가 집에 돌아가겠다고 하면 순순히 보내 줄 거야?”

<물론입니다. 그때는 자격 있는 후임자를 찾아서 신전을 넘겨주시면 됩니다.>

“오호.”

바로 원하던 대답이었다.

은근한 목소리로 하나 더 물어봤다.

“그럼 혹시, 지금부터 자격 있는 후임자를 찾으러 밖을 좀 돌아다녀도 될까?”

라는 건 당연히 핑계였다.

진짜 속셈은 동료들을 찾으러 가겠다는 심보.

그러다 눈치 봐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생각도 가득한 놀부 심보였다.

하지만 정다운의 표정은 뻔뻔할 정도로 당당했다.

“여기 있어 봤자 어차피 지나가는 사람도 없잖아.”

<확실히 그렇겠군요. 지혜의 시련을 이겨 낸 분답게 역시 현명하십니다. 앞으로 신전의 주인은 당신입니다. 모든 건 당신의 뜻대로 하셔도 됩니다.>

“흠. 전부 내 맘대로군.”

끄덕끄덕.

……아니? 이렇게 조건이 다 좋다고!?

자꾸 이런 식이니까 오히려 의심병이 생길 정도였다.

혹시 뭔가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뭐 더 알아야 할 건 없어? 신전의 주인이 할 일은 정확히 뭐지? 의무 같은 게 있나?”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신전을 관리하는 일이 전부입니다. 물론 궁극적인 목표는 에르테아 님의 부활입니다만, 아마 그날이 오기 전에 당신의 수명이 끝날 겁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결국 정다운에게 바라는 건, 신전의 유지 보수라는 말이었다.

아무튼 이 정도면 계약서는 꼼꼼히 읽어 본 셈.

이제 사인만 하면 끝이었다.

<그럼 계약을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관리자 임명>

파아앗!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단 위로 황금빛 서기가 흘러나왔다.

그 빛은 둥글게 뭉쳐져 구슬 형태가 되어 정다운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후욱!

“……!”

후끈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아프진 않았다. 오히려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황금빛 기운은 팔을 타고 손까지 흘러 들어갔고, 제단 위에 나타나던 관리자의 말이 이제는 정다운의 손등 위에서 떠올랐다.

제단 안에 깃들어 있던 관리자가 그의 몸속으로 옮겨 온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계약의 언어가 시작되었다.

<생명의 용 에르테아의 이름으로, 관리자 ‘알파’는 신전의 모든 권한을 당신에게 인계하겠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정다운.”

<등록 완료. ‘정다운’을 신전의 주인으로 등록합니다.>

번쩍!

익숙한 메시지가 떴다.

<업적 달성!>

“유적지의 주인!”

생명의 용 에르테아가 잠든 신전의 최고 관리자가 되었습니다!

당신의 위대하고 숭고한 업적에 던전이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 보상 : 용의 권능들이 스킬로 등록됩니다.

“이것도 업적으로 뜨네? 용의 권능이 스킬로 등록됐다고?”

정다운의 시선이 황금빛 글자들이 둥둥 떠 있는 자신의 왼손으로 향했다.

<기존의 던전 시스템을 활용해, 용의 권능을 스킬이라는 형태로 당신에게 적용시켰습니다. 상태 창과 스킬들이 조금씩 바뀌었을 겁니다.>

“그래? 상태 창.”

<상태 창>

이름 : 정다운

칭호 : 유적지의 주인

체력 : 100/100 (%)

포만감 : 100/100 (%)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이름이 다시 복구됐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칭호라는 게 생겼네?”

<당신의 격이 올라갔다는 의미입니다.>

“체력과 포만감은 없어질 줄 알았는데 그대로 있고.”

<없앨까 하다 그냥 남겨 뒀습니다. 본인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는 건 언제고 유용하게 쓰일 일이 있을 겁니다. 물론 종말의 용의 낙인 효과는 완벽하게 지워졌습니다.>

요컨대, 이제 진짜로 통신사 이전 완료라는 말이었다.

어디, 스킬도 확인해 보자.

<스킬>

정화 (초급 7레벨)

흙 뭉치기 (MASTER)

돌 깨기 (4레벨)

외뿔 멧돼지의 기운 (7레벨)

구조물 설치 (1레벨) NEW

- 목록 : 전망대, 온돌, 함정

- 설치 시간 2배 단축

게이트 설치 (1레벨) NEW

- 공간의 문을 설치할 수 있다.

- 생명 에너지를 소모한다.

리셋 (1레벨) NEW

- 처음 상태로 되돌린다.

- 생명 에너지를 소모한다.

“어이 씨, 길다.”

길어서 좋았다.

눈물 나게 좋았다!

스킬이 대체 몇 개란 말인가!

“승우 형이 이걸 봤어야 되는데!”

너무 신나고 기뻐서,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자랑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레벨도 죽어라 안 오르는 정화 스킬 하나로 먹고살던 과거의 정다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구조물 설치? 이거 좀 특이한데?”

<특성이 비슷한 전망대, 온돌 같은 스킬들을 하나의 스킬로 합쳤습니다. 물론 각각의 스킬 효과는 그대로 유지됩니다. 다만 레벨 업을 하면 모든 구조물들이 동시에 상승 효과가 적용될 겁니다.>

“헐? 레벨 업이 동시에 된다고? 그럼 전망대만 계속 만들어도 온돌 레벨이 올라간다는 뜻이잖아.”

<정확합니다.>

“와, 쩌는데? 너 이름이 알파랬지? 너 이제 보니 엄청 유능한 녀석이구나. 무슨 알파고인 줄! 그냥 죽지 말고 내 옆에서 계속 일해 주면 안 되냐?”

<죄송합니다. 이젠 일 그만하고 싶습니다.>

“사랑해.”

<죄송합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입니다.>

“헐, 차가워. 인수인계가 끝났다고 바로 태세 전환한 거봐.”

<물론입니다. 이젠 더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으니까요.>

“…….”

어째, 아직 존댓말이라도 써 주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 같았다.

정다운은 새로 생긴 스킬들로 관심을 돌렸다.

일단, 구조물 설치 목록에 ‘함정’이라는 게 추가되어 있었다.

그걸 보니 피식 헛웃음부터 흘러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함정 설치란다.

참으로 얄궂은 인생 아닌가?

함정 때문에 죽다 살아난 자신이, 이젠 반대로 유적지에 함정을 만드는 입장이 되었다니 말이다.

정다운은 ‘함정’ 스킬의 내용을 펼쳐 봤다.

함정 설치 (1레벨) NEW

- 함정을 설치한다.

- 설치 시간 2배 단축.

- 파손되면 리셋으로 복구 가능.

“리셋으로 복구 가능?”

그 순간 정다운의 시선이 아래로 주루룩 내려가 가장 마지막 스킬로 향했다.

리셋 (1레벨) NEW

- 처음 상태로 되돌린다.

- 생명 에너지를 소모한다.

<리셋 스킬은 주로 신전을 보수하거나 훼손된 함정을 처음 상태로 복구시킬 때 사용합니다.>

“그렇군. 바로 이 스킬 때문에 던전이 계속 리셋되는 거였어.”

단번에 이해가 갔다.

한번 만들어 두면 그때부턴 계속 리셋해 가면서 거의 반영구적으로 함정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참고로, 현재 레벨로는 한 번에 함정 하나를 리셋시킬 수 있습니다. 레벨이 높을수록 리셋되는 범위가 확장됩니다.>

“레벨은 어떻게 올려? 역시 반복 노가다인가?”

<그 방법도 있지만,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제물을 바쳐서 생명 에너지를 뽑아내고, 그 에너지를 스킬에 투자해 레벨을 올리면 됩니다.>

결국 ‘기승전제물’이었다.

정다운이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은 제물을 바치라는 거네. 제물은 고기도 받는다 했겠다?”

어차피 고기 따위는 널리고 널렸다.

요 앞마당만 나가도 쥐 고기가 득실거렸고, 옆 동네 던전만 들러도 품절될 때마다 고기들을 리셋해 주지 않던가.

‘어디 한번, 배 터질 때까지 제물을 먹여 주마.’

그거라면 정말 자신 있었다.

흙 골렘들을 이용하면 제물을 얼마든지 쓸어 담아 올 수 있으니까.

<아무튼 이제 제게 맡겨진 사명은 완벽히 끝났습니다. 후련하군요. 정말 기나긴 세월이었습니다.>

파르르 떨리는 황금빛 글자들에서 관리자 알파의 격한 감정이 전해져 왔다.

“이제 죽냐?”

<아뇨. 아직 생명 에너지가 조금 남았습니다. 당신이 신전 관리에 익숙해지려면 제 조언이 필요할 테니, 당분간은 이 안에서 신세 좀 지겠습니다.>

“오키. 그럼 나야 좋지.”

“뽀뀨, 뽀뀨.”

“응?”

문득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가 있었다.

오물오물.

욤뇸뇸뇸.

<……그리고 저 무례한 짐승에게 에르테아 님의 유골 좀 제발 그만 물어뜯으라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어차피 저 하찮은 이빨로는 용의 뼈를 뚫지도 못합니다.>

“…….”

어쩐지 아까부터 안 보인다 했더니, 어느새 에르테아의 뼈에 달라붙어 열심히 물고 빨고 있는 뽀뀨였다.

“뽀뀨, 내려와.”

“뀨잇!”

말은 잘 듣는다.

쪼르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와 정다운의 어깨 위에 안착하는 뽀뀨.

<이런 무뢰배들에게서 에르테아 님을 지키는 것이 바로 당신의 사명입니다. 감히 용의 뼈를 보고 군침이나 흘리는 땅다람쥐라니, 제물로 바치시는 게 어떨까요?>

“뽀뀨.”

<……말버릇도 나쁘군요.>

“뽀뀨, 뽀뀨.”

어차피 글자를 못 읽는 뽀뀨는 알파가 뭐라 말하든 전혀 관심도 없었다.

*   *   *

다음 날, 죽음의 산맥에는 새로운 방문자가 발을 들였다.

[경고! 스테이지-1 지역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 어쩌라고!]

[오류! 오류! 스테이지-1 지역을 벗어났습니다!]

[시끄러! 좌천된 마당에 내가 규칙 같은 거 지키게 생겼어!?]

우리 토끼가 달라졌어요.

도우미 자격을 박탈당한 뒤로 토끼는 태도뿐만 아니라 모습까지도 180도 달라져 있었다.

항상 깔끔하던 턱시도는 먼지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자유자재로 하늘을 씽씽 날아다니던 몸은 이제 비실비실 저공비행을 하고 있었다.

출력 부족이라는 느낌이 팍팍 느껴지는 모습이다.

[이 인간, 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또 어디서 속 편하게 땅이나 파고 있을 오류 종자를 생각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건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눈에 보이는 건 오로지 쥐, 쥐, 쥐! 들뿐이었다.

[대체 어디 숨어 있는…… 아, 저건가?]

투덜거리며 언덕 하나를 넘는 순간, 토끼는 순간 멈칫했다.

그 앞에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산맥을 따라 줄줄이 솟아 있는 전망대들.

그 길은 정확히 산의 정상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이쪽이네.]

토끼는 떨떠름한 얼굴로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