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31화>
정다운의 머릿속에서 번개가 쳤다.
이런 바보 같은! 왜 바로 떠올리지 못한 걸까!
던전. 관리자.
그리고 던전 게이트!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바로 유적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토끼도 참가자들을 다음 스테이지로 보내기 위해 직접 게이트를 열어 주지 않았던가.
사실 그것도 토끼 본인의 능력이라기보단 유적지 고유 기능이 아니었을까?
“혹시 스테이지-1의 유적지도 용의 신전이야?”
<스테이지? 그게 무엇입니까?>
정다운은 바위산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쪽에 여기랑 비슷하게 생긴 곳이 또 있던데?”
<아, 이해했습니다. 비슷하게 생겼다면 그곳도 여기와 같은 용의 신전일 겁니다. 하지만 소속은 다릅니다.>
“소속?”
<에르테아 님의 신전은 여기뿐입니다. 그곳은 아마 전쟁에서 승리한…… 다른 용의 신전일 겁니다.>
“다른 용도 있어?”
아무래도 옛날에 용들끼리 서로 편 가르고 한판 붙은 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그 게이트라는 걸 설치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야?”
<가시려는 곳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걸어가는 것보단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가능성? 그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말이야?”
<원래라면, 게이트로 못 가는 곳은 없습니다. 설령 다른 차원이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관리자는 대답할 말을 신중히 골라야만 했다.
정다운의 반응을 보니 지금이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느냐, 못 하느냐의 중요한 기로인 것 같았다.
<게이트를 설치하는 데는 많은 생명 에너지가 요구됩니다. 연결하려는 거리가 멀수록 그에 합당한 더욱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생명 에너지?”
<쉽게 말해, 제물입니다.>
“아하.”
<용의 권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정다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이해됐다.
왜 여기 제단이 있는지도.
“그럼 혹시 여기에 산 제물이라도 바쳐야 하나?”
<무슨 제물이든 상관없습니다.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식물이든 동물이든. 어차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엔 많든 적든 생명 에너지가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그나마 다행이었다.
“휴. 살아 있는 인간을 제물로 바치라고 할까 봐 괜히 쫄았네.”
<물론 인간을 바쳐도 됩니다. 사실 인간만큼 효율 좋은 제물도 없으니까요.>
“윽, 역시.”
<하지만 에르테아 님이 괜히 생명의 용이라 불리는 게 아닙니다. 에르테아 님은 인간들을 죽이는 것보다 살려 뒀을 때 더 많은 생명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제물로 바치는 것보다 살아 있을 때가 더 에너지가 많다고?”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신들이 먹고살기 위해서 더 많은 에너지를 생산해 내는 존재니까요.>
무슨 말일까.
“……아, 혹시 농사?”
<네. 인간은 식물을 키우고 동물들을 번식시킵니다. 그 행위를 통해 새로운 생명 에너지를 창출할 줄 아는 아주 생산적인 종족입니다.>
“그렇군. 완전히 이해했어.”
요컨대, 인간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말이었다.
용 입장에서도 인간들이 농산물이나 가축들로 꾸준히 제물을 바치는 게 장기적으로 훨씬 이득인 것이다.
자, 3줄 요약을 해 보자.
1) 신전의 주인이 되면 용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
2) 용의 권능을 쓰려면 제물을 바쳐서 생명 에너지를 모아야 한다.
3) 제물은 아무거나 상관없음.
이런 결론이라면,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그럼 혹시 말이야. 제물로 이런 건 어때?”
척.
정다운의 손에 훈제 고기가 들려 있었다.
<죽은 동물의 조각이군요. 한번 제단 위에 올려 보시겠습니까?>
“오키.”
나름 제물이니까 구색을 맞춰 흙 그릇에 정성스럽게 담아 제단 위에 올렸다.
파아앗!
은은한 황금빛이 훈제 고기를 감쌌다.
꿀꺽!
‘꿀꺽?’
뭔가를 삼키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덧 제단에는 훈제 고기가 감쪽같이 사라진 빈 접시만 남아 있었다.
곧이어 관리자가 제물을 평가했다.
<이것은…… 죽은 외뿔 멧돼지의 넓적다리를 연기로 숙성시켜 불 에너지까지 덧입힌 한 끼 식사로군요. 제법 훌륭한 제물입니다.>
“오!”
눈을 번쩍 뜨게 하는 대답이었다.
어딘가의 먹방 리뷰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아무렴 어떠랴!
정다운은 흥분해서 물었다.
“그럼 이걸로 게이트를 열 수 있어?”
<그럴 리가요. 질이 좋긴 하지만, 겨우 고기 한 점으로는 아무 권능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고기가 이만큼 있다면?”
<오!>
이번엔 관리자가 놀랄 차례였다.
어느덧 정다운의 품에는 훈제 고기들이 한 아름 수북하게 안겨 있었다.
<정말 놀라운 분이시군요! 이만한 양의 식량을 항상 들고 다니시는 겁니까?>
“아니, 더 많은데.”
<오? 더 있다고요? 얼마나요?>
“음. 대충 이거에 100배쯤?”
<헉.>
사실 그 이상이었지만, 당장 먹고살 식량은 따로 빼 놔야 했기에 적정선에서 대답했다.
관리자는 상당히 감탄한 눈치였다.
그런데 놀라는 부분이 조금 달랐다.
<정말 놀랍군요. 아공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시다니! 혹시 고위급 마법사셨습니까? 역시 용의 시련을 이겨 낸 분은 뭔가 다르군요.>
“마법사? 아니, 이건 그냥 던전에 왔더니 저절로 생긴 능력인데.”
<던전에서 생긴 능력?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조금 전 스테이지라는 말도 그렇고……. 그동안 밖에서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겁니까?>
“그걸 나한테 물어봤자…….”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당신을 관찰해도 되겠습니까?>
“관찰? 아픈 건 아니지?”
<당신에게 피해는 전혀 없습니다. 그저 당신의 상태만 확인할 뿐입니다.>
알았다고 하자, 제단의 황금빛이 이번엔 정다운의 전신을 감쌌다.
파아앗!
‘혹시 이대로 제물로 잡아먹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눈만 부실 뿐,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때, 관리자가 뜻밖의 것을 발견했다.
<응? 이게 왜?>
파앗!
그 순간 정다운의 눈앞에 익숙한 반투명한 창이 나타났다.
<상태 창>
이름 : ^&@$#」 (오류)
체력 : 91/100 (%)
포만감 : 76/100 (%)
“어? 내 상태 창?”
정다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열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자신의 상태 창이 열린 것이다.
포만감 수치가 떨어진 걸 봤더니 괜히 배만 고파졌다.
정다운은 습관적으로 들고 있던 훈제 고기를 한입 물고 씹었다.
질겅질겅, 꿀꺽!
포만감 : 77/100 (%)
포만감 : 78/100 (%)
고기를 씹어 삼킬수록 포만감 수치가 조금씩 올라간다.
사실 이 상태 창은 평소엔 전혀 쓸모가 없는 능력이었다.
여기가 무슨 컴퓨터 게임처럼 체력을 올려 주는 물약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상태 창을 보면서 체력 관리를 할 일도 없는 것이다.
떨어진 체력을 올리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먹고 쉬는 것.
심지어 다치기라도 하면, 그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는 100퍼센트로 채워지지도 않았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스륵.
어느덧 정다운의 몸을 감싼 황금빛이 사라졌다.
그러더니 관리자가 이상한 말을 꺼냈다.
<이제 보니 당신은 이미 제물로 바쳐진 존재였군요.>
“제물?”
뜬금없는 말에 정다운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또 뭔 소리야? 내가 제물이라니?”
<이 ‘상태 창’은 제물의 품질을 관리할 때 쓰는 일종의 꼬리표입니다. 체력과 포만감. 잘 먹고 건강한 제물이 생명 에너지가 가장 충만하니까요.>
“잠깐, 잠깐만.”
정다운이 관리자의 말을 제지시켰다.
“잠깐만. 이게 뭔 소리야? 정리 좀 해 보자. 그러니까 내가…… 제물이라고? 용에게 바쳐질?”
<네, 그렇습니다. 이 꼬리표를 단 생명체가 죽으면, 품고 있던 모든 생명 에너지가 자동으로 용의 신전에 흘러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 용도의 마법입니다.>
“젠장.”
욕이 절로 나왔다.
상태 창은 던전 게임 참가자들 모두에게 달려 있었다.
그럼 결국 그 모두가 용에게 바쳐질 산 제물이었다는 말이었다.
“그 용이 설마 생명의 용은 아니겠지?”
<당연히 아닙니다. 이 방식은 주로 종말의 용이 자신의 산 제물들에게 표시를 해 둘 때 쓰던 방식입니다.>
“종말의 용?”
<그렇습니다. 그는 이 세계를 멸망으로 이끈 존재. 에르테아 님을 이곳에 잠들게 한 자. 바로 종말의 용을 위한 산 제물이 당신의 존재 의의입니다.>
* * *
[제가…… 좌천이라고요?]
토끼는 자신에게 닥친 현실이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바분은 안색이 창백해진 토끼를 내려다보며 거만하게 웃었다.
[끌끌, 당연한 결과다. 던전의 참가자들은 모두 종말의 용께 바칠 제물들이다. 그런 소중한 제물을 잃어버렸으니, 도우미 실격이다.]
[설마…… 이미 결정된 사항인가요?]
[그렇다. 내가 친히 여기까지 온 것만 봐도 모르겠나? 바로 네놈에게 내려진 모든 자격을 박탈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자격을 모두 빼앗기 위해서겠지.’
토끼는 바분의 속셈을 뻔히 알고 있었다.
‘유적지 인수.’
도우미라도 무적은 아니다.
수많은 참가자들 중엔 가끔씩 도우미보다 강한 인간이 나타날 때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흔치는 않지만 그들에게 목숨을 잃는 도우미도 가끔 존재했다.
그럴 경우, 그 지역은 근처에 있는 다른 도우미들 중 하나가 대신 떠맡게 된다.
도우미들에겐 굉장히 운이 좋은 상황이었다.
담당하는 유적지가 많을수록 도우미들은 격이 올라가니까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 바분이란 놈은 스테이지-1을 언제나 호시탐탐 노리던 자였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 힘도 없는 네임리스 도우미가 담당하는 유적지 1개짜리 던전.
탐욕스럽기로 소문난 바분이 군침 흘리기에 딱 좋은 조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이 땅은 나 바분 님이 담당하게 되었다! 자, 이제 넌 모든 권한을 넘기고 얼른 꺼지거라!]
‘젠장. 결국 이렇게 되나.’
역시는 역시다.
결국 바분은 이 말을 직접 떠벌리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생색도 이런 생색이 없다.
[대체 어디로 가란 말인가요. 여기가 바로 내 집인데…….]
토끼의 표정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처럼 달랑 유적지 1개를 담당하던 도우미가 유적지를 잃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나마 해고가 아니라 좌천이라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저는 어디로 좌천당하는 건가요……?]
[아? 아직 그 말을 안 했군. 끌끌. 그러고 보니 이제 네놈은 이름도 없고, 집도 없는 채로 외부 지역을 떠돌게 되었구나.]
[외부 지역!?]
또 한 번 경악하는 토끼의 모습에, 바분의 입에는 씨익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그렇다. 넌 이제부터 스테이지 밖으로 탈출한 기타 누락자를 찾아서 내 앞에 대령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네놈에게 내려진 마지막 임무다.]
[……!]
마지막 임무!
그 말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아아, 나는…… 이제 죽는 구나.’
토끼는 진심으로 절망했다.
결국 자신의 죗값은 좌천 따위가 아니라 바로 사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죽는다 생각하니, 문득 ‘그’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바분 님. 그럼 혹시 그 오류 종자…… 아니, 기타 누락자를 데려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다시 게임에 참가하나요?]
[무슨 소리지? 오류는 바로 삭제해야지. 다시 각인 마법을 걸고, 바로 죽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