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29화>
“잡았다!”
정다운은 목이 떨어진 도마뱀 석상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
무려 한 달이나 걸려 이뤄 낸 결실이었다!
‘돌 깨기’ 스킬도 단숨에 4레벨까지 올랐다.
도마뱀 석상 자체가 거대한 돌이라서 그 업적이 반영된 것이다.
“다들 고생 많았다! 수고했어!”
“꼬잇?”
“오옴, 오옴?”
정다운이 자신들을 얼싸안자, 흙 골렘들은 멀뚱멀뚱 고개만 갸웃거렸다.
문득 정다운의 시선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석상의 머리로 향했다.
‘혹시 얘한테도 골렘의 핵이 나온다면 진짜 대박일 텐데…….’
돌 깨기 스킬도 생겼겠다, 핵만 있다면 돌 골렘을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핵이 있을 가능성은 적었다.
핵이 있었다면 흙 골렘들처럼 부서진 몸이 영구히 재생됐을 터.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찾아보자. 머리가 분리되면서 죽었으니까, 핵이 존재한다면 위치는 분명 머리겠지.’
정다운은 석상의 머리 앞으로 다가가 메탈 해머를 들었다.
“돌 깨기! 돌 깨기!”
땅, 땅, 땅, 땅!
쩌적! 쩌적!
“오! 4레벨 효과 쩌는데?”
역시 레벨이 깡패다.
사람보다 큰 석상의 머리통이 메탈 해머가 닿자마자 두부처럼 팍팍 깨져 나갔다.
흙 뭉치기 스킬처럼 레벨이 오를수록 돌을 더 잘 깰 수 있는 것이다.
잠시 후, 석상의 머리는 자잘한 돌무덤이 되어 바닥을 굴러다녔다.
“에이, 꽝이네.”
예상은 했지만 머릿속엔 아무것도 없었다.
겨우 유적지 문지기한테 너무 많은 걸 바란 걸까?
하긴, 처음부터 미니맵에 괴물 표시가 안 뜬 걸 보면 애초에 괴물이 아니라 어떤 마법적인 함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뭐, 그래도 이놈 처리하느라 새로운 스킬도 얻었고, 레벨도 엄청나게 올랐으니 고생한 보람은 있었지, 뭐.’
아쉬웠지만 어차피 자신의 목적은 석상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었다.
문지기도 사라졌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유적지에 들어가 볼 차례.
‘토끼는 분명 이곳을 세계의 끝이라 말했었지.’
과연 이 고대의 유적지에는 어떠한 비밀이 감춰져 있을까…….
그리고 이 유적지 너머 죽음의 산맥 뒤에는 과연 무엇이 존재하고 있을까?
“그럼 들어가 보자.”
정다운은 비장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오옴, 오옴.”
물론 혼자선 무서우니까 켄타우로스들을 앞장세웠다.
앞에 하나, 뒤에 하나, 양옆에 하나씩.
사주 경계다.
정다운은 4기의 켄타우로스들에 둘러싸여 철저히 보호받으며, 자신은 타조에 타고 이동했다.
위험하다 싶으면 언제든 밖으로 튈 생각이었다.
그렇게 최대한 조심히 유적지 안으로 발을 들였는데, 거기엔 엄청난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헐. 이게 다 뭐야?”
유적지 안에는 수많은 괴물들의 뼈가 끝도 없이 있었던 것이다.
유적이 아니라 공동묘지였던 걸까?
죽은 지 얼마나 오래됐는지 정체불명의 괴물들이 새하얀 유골이 되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이곳은 리셋이 되지 않는 지역.
이곳을 지키던 괴물들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다 죽은 듯했다.
“정화! 정화! 정화!”
정다운은 정화 스킬을 사방에 남발했다.
이렇게나 많은 시체들이 썩고 부패했던 곳이다.
혹시 모를 독에 대비하는 건 당연했다.
앞으로 이 안에서는 몸이 닿는 모든 곳에 정화 스킬을 걸면서 나아가기로 했다.
‘혹시 이 뼈들도 갑자기 다 살아나서 공격하는 건 아니겠지?’
애초에 석상도 살아나는 판이다. 뭔들 안 일어날까 싶었다.
최대한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심히 걸음을 옮기던 그때였다.
피융!
“……!?”
갑자기 옆에서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오옴?”
앞에서 걷던 켄타우로스가 자신의 다리에 꽂힌 이쑤시개 같은 화살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당연히 아무 데미지도 없었다.
자세히 보니 앞서 걷던 켄타우로스 발밑의 대리석 바닥 색깔이 조금 달랐다.
저길 밟았더니 함정이 발동된 것이다!
‘역시 함정이 있었군. 골렘을 앞장세우길 잘했어.’
정다운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역시 괴물들이 다 죽었다 해서 방심할 순 없었다.
스테이지-1 최종 유적지처럼 여기에도 곳곳에 치명적인 함정들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만약 켄타우로스가 아니었다면 저 화살은 분명 자신의 가슴에 박혔을 터.
정다운은 이렇게 된 거 화끈하게 나가기로 했다.
“저 벽, 부숴 버려!”
“오옴!”
쿠쾅! 쾅! 콰쾅쾅!
켄타우로스들에게 화살이 날아온 벽을 부수게 했다.
그러자 녀석들의 몸으로 수많은 화살 다발들이 사방에서 날아와 박혔다.
피융! 퓨퓨퓩! 파바박!
“오옴?”
“오오옴?”
삽시간에 고슴도치처럼 변해 버린 켄타우로스들.
“신경 쓰지 말고 다 부셔!”
“오옴!”
쿠쾅, 쾅!
잠시 후, 벽이 완전히 허물어지자 더 이상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다.
문득 켄타우로스들의 몸에 박힌 화살을 하나 뽑아 본 정다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거…… 다 삭았잖아?”
파삭!
별로 힘도 안 줬는데 화살이 허무하게 바스라진다.
대체 얼마나 오래된 화살인 걸까?
나무로 된 화살대가 무슨 속 빈 강정처럼 가벼웠다.
“……아무튼 계속 가 보자.”
* * *
한편, 토끼는 지금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이하는 중이었다.
스테이지-1에 불편한 손님 하나가 찾아온 것이다.
[여어, 토끼 양반. 그동안 잘 지냈나?]
‘젠장.’
갑자기 게이트가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개코원숭이를 보면서 토끼는 인상을 구겼다.
진짜 꼴 보기 싫은 놈이 찾아왔다.
휘적거리는 긴 팔.
거대한 덩치에 지저분한 회색 털북숭이.
어울리지도 않는 새까만 중절모.
그 아래로 보이는 거만함이 잔뜩 묻은 못생긴 얼굴. 아니, 못생김이 잔뜩 묻은 거만한 얼굴!
토끼는 못생겼다, 못생겼다, 못생겼다를 속으로 외치며, 몸에 밴 아부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아이구! 바분 님 아니십니까? 헤헤. 어인 일로 이런 누추한 곳에 다 찾아오셨습니까요? 그냥 댁에서 숨만 쉬고 계시지.]
[쯧. 누추한 줄은 아니 다행이구나. 그런데 네놈은 언제 봐도 땅다람쥐처럼 작고 하찮구나. 미처 못 보고 밟아 버릴 뻔했어. 끌끌끌.]
[…….]
못생겼다, 못생겼다를 다시 한 번 속으로 중얼거리는 토끼였다.
개코원숭이 바분.
이 망할 짐승은 바로 스테이지-2를 관리하는 네임드 도우미였다.
즉, 토끼의 상급자.
던전의 도우미들은 본인이 담당하는 던전의 개수에 따라 위아래가 결정된다.
이 상하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던전의 구조에 대해 알아야 했다.
아주 간단하다.
스테이지마다 던전의 개수가 다르다.
토끼가 관리하는 스테이지-1은 전체가 하나의 던전이다.
하지만 스테이지-2에는 총 2개의 던전이 존재했다.
그런 의미에서 던전을 2개나 관리하고 있는 바분은 토끼보다 한 단계 상급자라 할 수 있었다.
‘네임리스’인 토끼와는 다르게 그가 ‘네임드’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네놈, 요즘 일은 제대로 하고 있나?]
[넵. 언제나처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못생겼다, 못생겼다, 못생겼다…….
다시 한 번 곱씹는 토끼.
그런 토끼의 앞으로 바분의 커다란 코가 불쑥 들이밀어졌다.
[그으래? 확실한가? 요즘 들어 우리 스테이지로 넘어오는 생존자들이 2배로 늘었던데?]
[윽. 바보라 눈치 못 챌 줄 알았는데. 아, 바분이요, 바분. 발음이 샜네요.]
[대체 얼마나 게으르면 실적이 그 모양인 거지? 그러니 아직 이름도 없지.]
그 말에 움찔한 토끼의 접대 미소가 어색하게 무너졌다.
[하, ……하하하. 그러게요. 앞으로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쯧. 하찮은 것.]
[……이 바분 색-]
-끼가.
[뭐?]
[네?]
[응?]
갸웃?
[……흠. 잘못 들었나.]
순진무구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토끼의 속은 화딱지가 나서 미쳐 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 바분 색끼가-!’
자, 속으로만 다시 한 번 외쳐 보자.
못생겼다, 못생겼다, 못생겼다,
못생겼다, 못생겼다, 못생겼다,
못생겼다, 못생겼다, 못생겼다-!
게으르긴 개뿔! 누가 게으르단 말인가! 이게 다 그 망할 오류 종자 때문이었다!
벌써 몇 달째!
자꾸 그 인간이 던전이 리셋되면 최종 보스만 홀랑 파괴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왜 그러는지 이유도 모르겠다!
‘분명 나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걸 거야! 그간의 복수인 거지! 그럴 거면 온 김에 얼굴이나 보고 가지, 말도 없이 홀랑 사라져!? 진짜 잡히면 가만 안 둔다!’
열 받는 이유에 뭔가 다른 심리도 섞여 있는 것 같지만…….
아무튼 그 인간 하나 잡자고 도우미가 참가자들 다 내팽개치고 보스 룸만 지키고 있을 수도 없으니 진짜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잡으면 어쩔 거야? 난 어차피 그 인간을 죽이지도 못하는데!’
토끼가 정다운을 떠올리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런데 그때.
‘……응? 뭐지?’
어째 분위기가 싸했다.
바분이 의미심장한 미소로 토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 거짓말은 그쯤 하지?]
흠칫?
[네? 거, 거짓말이라뇨? 저처럼 솔직해서 탈인 토끼가 또 어디 있다고요……?]
[끌끌끌. 기타 누락자가 생긴 것 같던데?]
[……!]
헉?
[끌끌끌. 맞나 보군? 이게 어찌된 일이지?]
딱딱하게 굳은 토끼를 보며 바분의 눈에 탐욕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토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젠장.’
기타 누락자.
그 표현이 어울리는 존재는 딱 한 명뿐이었다.
자신의 실수가 만들어 낸 오류 종자.
바로 정다운의 존재를 결국 들키고 만 것이다.
그것도 가장 최악의 상대에게!
* * *
‘여기 대체 얼마나 오래된 거지?’
잔뜩 긴장하고 유적지에 들어온 정다운은 점점 허탈해졌다.
다 낡아 빠진 유적지의 상태는 여기가 리셋이 안 되는 지역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의 앞을 막아선 수많은 함정들은 대부분이 망가져 있었다.
처음에 봤던 화살들처럼 세월의 풍파에 의해 전부 낡고 삭아 버린 것이다.
천장이 열리며 펄펄 끓는 기름이 쏟아지는 함정 같은 경우엔, 기름이 차갑게 식어 있기도 했고.
바닥에 그려진 수상한 마법진 위에는 이끼가 껴서 마법이 지워져 있었다.
다 헐어 버린 특수한 기관 장치들은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았다.
이쯤 되면 처음에 마주친 화살들을 퍼붓는 함정이 작동한 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함정뿐만이 아니다.
괴물들도 마찬가지였다.
굶어 죽었는지 수명이 다해 죽었는지, 유적지 곳곳에 쌓여 있는 괴물들의 뼈 무덤을 보며 정다운은 혀를 내둘렀다.
‘휘유. 이놈들이 다 살아 있었다면 골렘이 10마리였어도 위험했겠어.’
그러기를 한참 후.
정다운은 마침내 굳게 닫힌 거대한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보스 룸인가?”
문에 그려진 문양이라든가, 그 형태와 웅장함이 스테이지-1의 보스 룸과 너무도 흡사했다.
문 열고 들어가면 왠지 안에 어마어마한 보스 괴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분위기를 봐선 보스도 이미 죽지 않았을까 싶었다.
끼이익.
조심히 문을 열자 정다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는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아름다운 빛의 커튼.
돔처럼 생긴 높은 천장의 뻥 뚫린 구멍에서 햇볕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새하얗고 거대한 용의 유골.
마치 신화 속 한 장면을 보는 듯한 그 장엄한 광경에 정다운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