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5화>
횟수를 거듭할수록 정다운은 조금씩 전투에 익숙해져 갔다.
흙벽돌을 던져 견제하는 방식은 조금 이상한 전투법이긴 했지만, 계속 반복하다 보니 나름의 노하우가 생겨났다.
이를테면 발밑에 있는 흙을 즉석에서 바로 뭉쳐 던진다든가, 미리 파 둔 구덩이에 늑대가 발이라도 헛디디면 바로 흙으로 묻어 버린다든가.
[변태다! 변태야! 너님은 변태라고! 좀 평범하게 싸울 순 없냐고요!]
“뭘 바래? 스킬 써서 정정당당히 싸우고 있구만.”
[웃기시네! 정정당당이 아니라 엉망진창이겠죠!]
토끼가 발을 동동 구르며 짜증을 토로했지만 정다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힘이 좀 세졌다지만 어차피 한번 물리면 죽는 건 똑같았다.
남들처럼 멋있게 싸우는 것보다는 현재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싸우는 게 더 중요했다.
“흠. 그런데 왠지 이것들이 피 냄새를 맡으면 더 미치는 것 같지 않아? 기분 탓인가?”
[흥. 괴물이니까 당연하죠. 님 지금 개 냄새랑 피 냄새 장난 아님. 어휴, 냄새!]
토끼가 코를 쥐며 그를 약올렸다.
실제로 정다운의 몸에는 그간 잡은 늑대의 피로 잔뜩 얼룩져 있었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동족의 피 냄새가 다른 늑대들을 흥분시키는 것이다.
게다가 사냥을 거듭할수록 그 피 냄새가 점점 진해지면서 멀리 있는 다른 늑대들까지도 조금씩 불러들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언젠가 위험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미쳐 날뛰는 괴물은 어디로 튈 줄 몰라서 몹시 위험했다.
“그렇다고 매번 아지트까지 돌아가서 샤워를 하긴 또 귀찮단 말이지. 멀기도 하고.”
[혹시 숨 쉬는 것도 귀찮지 않아요? 그러지 말고 한번 죽어 보는 건 어떨까요? 세상 편할 듯.]
“아, 그래!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
정다운이 갑자기 박수를 치자 토끼는 불안했다.
[뭔지는 몰라도 그거 안 하면 안 될까요?]
“연못 물을 이쪽까지 끌어오면 되잖아. 아예 샤워를 그때그때 이쪽에서 바로 하는 거야.”
[얼씨구?]
이 인간이 또 이상한 헛소리를 진지하게 지껄이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 헛소리를 이 인간은 항상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실행에 옮긴다는 것이었다.
곧바로 아지트로 돌아간 정다운은 연못을 바라보며 거만하게 턱을 쓸었다.
“흠. 내가 만들었지만 참으로 아름답군.”
[놀고 있네요. 누가 보면 건축계의 거장인 줄 알겠음?]
흙으로 만든 사자 분수대의 입에서는 여전히 맑은 지하수가 콸콸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물이 넘치지 않게 하기 위해 구석에 배수구도 만들어져 있었다.
사실 이 상태라면 저 아까운 물을 계속 흘려 버리는 셈이었다.
지하수의 양에도 한계가 있을 터, 언젠가 수원이 말라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던전이 리셋되면 지하수는 다시 리필될 테고, 결국 여긴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이라는 말씀.”
[그래서 이 연못물을 그 먼데까지 물길을 내서 끌고 가시겠다?]
“그런 거지.”
[이런 거 솔직히 안 귀찮음? 그냥 대충 살…… 아니, 말을 말죠.]
더 말해서 뭐하랴. 이미 그는 땅을 파고 있었다.
마치 새 장난감을 발견한 꼬마아이처럼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벌써부터 그의 눈엔 아지트와 출구를 연결해 주는 긴 수로가 보이기라도 하듯 잔뜩 신이 난 표정이었다.
[이런 재미에 목마른 인간 같으니…… 어디서 장난감이라도 하나 가져다줘야 하나.]
토끼는 한숨을 내쉬며 사라졌다.
다시 돌아올 땐 분명 완성되어 있으리라.
* * *
수로를 파는 건 솔직히 하루 만에 끝났다.
경사라도 있었으면 물이 중력을 거스를 수 없어서 일이 복잡해졌겠지만, 출구로 통하는 계단 아래까지만 연결하는 건 경사가 없어서 작업이 쉬웠다.
다만 그 후에 욕조 시설을 만드는 데만 이틀이 더 걸렸다.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실용성을 따지다 보니 더 오래 걸린 것이다.
바닥이 미끄러울까 봐 함정 벽을 뜯어 와서 목욕탕 바닥에 울퉁불퉁 돌판을 까는 일이 생각보다 시간을 잡아먹었다.
하지만 시간을 들인 만큼 결과물이 제법 만족스러웠다.
그걸 보고 토끼가 한 줄 평을 했다.
[동네 목욕탕임?]
“왔으면 등 좀 밀어 주든가?”
[헐. 때수건까지 만들었어!?]
목욕탕 옆에 가죽을 숫돌로 거칠게 갈아서 만든 때수건들이 줄줄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토끼는 질려 버렸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저게 뭐라고 놀래? 비누도 있는데, 뭐.”
[뭣! 비누가 있다고!?]
비누라니? 던전에 비누라니!?
이런 미친 소리가 또 있을까!
하지만 진짜로 정다운의 손에 들려 있는 하트 모양 비누를 보고 토끼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피를 닦으려면 비누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만들었지.”
별거 아니라는 듯 정다운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재료만 구할 수 있으면 수제 비누 만드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1) 외뿔 멧돼지의 비계를 불에 올려 기름을 모은다.
2) 물에 재 가루를 섞어 잿물을 만든다.
3) 그렇게 만든 잿물을 가만히 가라앉혀 투명한 물을 걸러낸 후.
4) 여과한 잿물에 기름을 조금씩 넣고 오랫동안 젓는다. (첨가물에 따라 향이나 질이 달라짐)
5) 그러다 점성이 적당히 생기면 그릇에 넣어 식힌다.
6) 마지막으로 원하는 모양으로 잘라서 쓰면 끝!
“그렇게 나온 게 바로 이 하트 비누라는 말씀!”
[심지어 하트야! 던전에서 제일 안 어울려!]
사실 비누가 뭐 그렇게 대수냐고 하겠지만, 이쯤 되니 그가 이젠 뭔 짓을 해도 다 마음에 안 드는 토끼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다운은 개운하게 목욕을 한바탕 끝낸 뒤, 또 다른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슥삭슥삭.
숫돌 위에서 납작한 돌판이 날카롭게 연마되고 있었다.
“아, 이거? 돌도끼를 만드는 거야. 이걸 나무막대기 끝에 줄로 감기만 하면 되거든.”
[그건 또 뭐 하게요?]
“뭐하긴? 도끼로 뭐 하겠어?”
[사냥?]
“땡.”
정다운은 그걸로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퍽! 퍽! 퍽! 쩌적! 우지끈!
지상에서 쭉 뻗어 내려온 나무뿌리를 말이다.
숫돌에 잘 벼려진 돌도끼가 가늘든 굵든 나무뿌리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내기 시작했다.
간간이 외뿔 멧돼지의 스킬까지 발동하자, 그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하. 노가다꾼도 모자라서 이번엔 나무꾼임?]
“나무는 쓸데가 많거든.”
퍽퍽! 우지끈!
이런 험지라서가 아니라, 나무는 인간에게 있어 더없이 소중한 자원이라 할 수 있었다.
불을 피울 때도 쓰이지만, 가공이 쉬워서 간단한 도구나 장비, 혹은 건물을 만들 때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다운은 지금 뭘 만들려는지, 베어 낸 나무뿌리들 중 굵고 튼튼한 것들을 골라서 바닥에 나란히 나열하고 있었다.
그러곤 외뿔 멧돼지의 힘줄을 길게 뽑아 나무들을 줄줄이 엮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영혼 없는 표정으로 멀뚱히 방관하고 있던 토끼는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어째 묘한 게 완성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뭐 만드는 거임?]
“뗏목.”
[뭐 인마?]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한 토끼였다.
하지만 진짜였다.
이 인간, 진짜로 뗏목을 만들고 있었다!
[님 진짜 미쳤음? 갑자기 이 땅속에서 뗏목을 왜 만들어요?]
“기껏 수로도 만들었는데 배 타고 아지트까지 왔다 갔다 하면 재밌겠…… 아니, 편리할 것 같지 않아?”
[지금 재밌겠다고 말하려고 했지! 던전이 장난이냐, 이 자식아!]
“아이구, 이런! 껄껄껄.”
[웃지 마요!]
이젠 일일이 짜증 낼 기운도 없었다.
결국 정다운은 수로에 딱 들어갈 사이즈의 귀여운 뗏목을 하나 완성시켰다.
그리고 수로 위에 살포시 띄워 놓았다.
“오오! 뜬다! 뜬다!”
[……잘 뜨네.]
정다운은 크게 기뻐하며 뗏목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노 대용으로 마련해 둔 긴 나무뿌리로 바닥을 세게 밀었다.
동양화에 나오는 뱃사공처럼 근엄한 표정으로.
그러자 뗏목이 쭈욱 앞으로 나아갔다.
정다운이 흥분해 소리쳤다.
“오오, 간다! 진짜 간다!”
[흥. 진짜 별꼴이네. 가다 빠져라.]
“토끼야, 너도 타!”
[……저도요?]
정다운이 갑자기 부르자 토끼는 얼떨결에 그 뒤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둘은 수로를 열 번이나 왕복했다.
“재밌다!”
[……흥. 노잼.]
말은 그래도 내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솔직히 이건 좀 재밌었다.
* * *
이로써 사냥 시스템이 완성되었다.
아침에 뗏목 타고 출근해서.
사냥 한 번 하고 샤워하고, 사냥 한 번 하고 밥 먹고.
그러다 밤이 되면 개운하게 샤워 한 번 하고 뗏목 타고 퇴근.
열심히 만든 보람이 있었다.
기동력이 빨라지고, 목욕을 해서 피 냄새를 지우자 늑대들을 기습하고 도망치기가 훨씬 안전해진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퇴근하자!”
“뽀뀨!”
처음엔 물을 좀 무서워하던 뽀뀨도 몇 번 연습시키자 이제는 먼저 뗏목에 타서 정다운을 기다리는 경지가 되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늑대들과 싸우는 것도 점점 익숙해져서 이젠 3마리까지 동시에 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4마리에 도전해 볼까 하던 차에 어느덧 밖에 나가도 늑대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어? 왜 한 마리도 안 보이지? 설마 내가 다 죽인 건가?”
[…….]
그 물음에 토끼는 말없이 심통 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게 대답이었다.
“헐, 진짜로? 우와, 드디어!”
그날 정다운은 처음으로 지상에 올라와 한껏 기지개를 켰다.
‘후아! 바깥 공기가 이렇게 맑았던가!’
마치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물론 이 지역을 벗어나면 금방 깨질 일시적인 평화였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자, 그럼 이제 어디로 가지? 일단 여기가 어디쯤인지를 알아야 참가자들을 찾을 수 있을 텐데. 혹시 숲을 나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그걸 나한테 왜 물어요. 그냥 이대로 숲속의 미아가 돼서 죽었으면 좋겠네. 흥.]
대답을 바라는 눈길로 토끼를 힐끔 바라봤지만, 토끼는 단호히 거절하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참가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정다운은 녀석이 날아가는 방향을 유심히 지켜봤지만, 그 시선을 의식한 토끼는 공중에서 투명해지며 모습을 숨겨 버렸다.
[흥. 누구 좋으라고!]
“와. 그간의 정도 있는데, 매정하네.”
정다운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별수 없었다.
어차피 저 녀석에게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기에, 미리 생각해 뒀던 두 번째 방법으로 이 일대를 탐색해 보기로 했다.
그는 옆에서 뼈를 갉아먹고 있는 작은 친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뽀뀨야, 다른 참가자들이 있는 곳이 어딘지 알아?”
“……뽀뀨?”
“사람 말이야, 사람.”
“……뽀뀨?”
“……?”
“뀨?”
“…….”
네가 하는 말이 당최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는 작은 땅다람쥐.
하긴, 이 손바닥만 한 생물이 숲 전체를 다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 녀석에게 온 숲을 다 뒤져서 사람을 찾아오라고 하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괜히 그러다 얘가 영영 안 돌아오기라도 하면 내 손해지.’
아무래도 뽀뀨는 가까운 곳을 탐색하는 정도로만 써먹어야 할 것 같았다.
‘흠. 그렇다고 무작정 숲을 헤매는 건 너무 위험하고. 방향도 모르는데 땅굴 파서 이동할 수도 없고…… 역시 어딘가 높은 곳에 올라가서 주위를 좀 확인해 보는 게 먼저겠어.’
그렇다면 역시 세 번째 방법밖에 없었다.
“전망대라도 지어야 하나.”
전망대.
높은 탑을 만들어 위에서 내려다보는 방법이 바로 그가 생각해 둔 세 번째 방법이었다.
그 높이가 적어도 이 숲의 나무들보단 높게 지어야 숲의 주위를 제대로 내려다볼 수 있으리라.
정다운은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 둔 흙을 이번에 대방출하기로 결심했다.
아무래도 이번엔 블록 놀이를 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