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4화>
“여어, 왔어?”
정다운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그의 얼굴을 덮고 있는 늑대 두개골 투구였다.
그리고 양 어깨에는 외뿔 멧돼지의 두개골 견갑이 걸쳐져 있었고, 일부러 남겨 놓은 양 어깨의 외뿔이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크고 작은 뼈들을 엮어 전신을 보호하고, 관절부와 이음새는 두껍고 질긴 외뿔 멧돼지의 가죽을 덧대 움직임도 자유로웠다.
[본 아머(Bone Armor)? 설마 이거 직접 만든 거예요?]
“응. 하루 만에 만든 것치고는 제법 괜찮지 않아?”
[하루? 하루우?]
토끼는 어처구니가 없어 말을 잊지 못했다.
던전 게임을 진행하느라 겨우 어제 하루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그새 또 이 오류 종자가 쓸데없는 짓을 벌인 것이다.
괴물의 뼈로 갑옷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심지어 꽤 그럴싸했다.
저 인간이 또 쓸데없는 데서 재능을 발휘한 것이다.
[응?]
문득 토끼의 시선이 늑대 뼈로 만든 투구에서 멈췄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당신…… 결국 지상으로 통하는 길을 발견했군요?]
“맞아. 이제 여길 떠날 때가 된 거지.”
[나가지 말고 그냥 여기서 쭉 눌러 사는 건 어때요?]
“웃기는 소리.”
정다운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평생 독거노인으로 늙어 죽으라고? 그럴 순 없지.”
[독거노인이 어때서요? 한가롭고 좋겠구만. 보아하니 반려동물도 생긴 것 같은데 적적하지도 않고 좋겠네!]
“뽀뀨.”
오독오독.
자기 얘기를 하든 말든 뽀뀨는 테이블 위에 주저앉아 뼛조각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정다운은 토끼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몸을 돌렸다.
“걱정 마. 어차피 당분간은 여기를 본거지로 써야 할 것 같으니까.”
[당분간? 또 뭘 하려고요…….]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불길함에 토끼는 몸서리를 쳤다.
* * *
정다운은 탈출 계획을 신중히 다시 짰다.
처음엔 길 찾는 데 정신 팔려 대책 없이 뛰쳐나갔지만, 이젠 길도 뚫었겠다, 급할 게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안전이 최고지. 이번엔 차근히 잘 준비해서 나가 보자.’
그러려면 일단 무작정 밖으로 나가는 것보단 전투에 익숙해지는 것이 먼저였다.
“스킬 확인.”
<스킬>
외뿔 멧돼지의 기운 (2레벨)
- 전신에서 외뿔 멧돼지의 기운이 솟구친다.
- 일시적으로 신체 능력이 2.2배 증폭된다.
- 지속 시간 20초, 재사용 시간 90초
스킬을 확인한 정다운은 흡족하게 웃었다.
‘증폭되는 힘이 커졌어. 지속 시간도 10초나 늘었고, 재사용 시간도 그만큼 감소됐다. 이 스킬은 레벨 업 할 때마다 지속 시간이 길어지는 스킬이었구나.’
이처럼 구체적인 수치가 표기되는 스킬들은 앞으로의 성장 방향을 예측할 수 있어서 편했다.
정다운은 이 지속 시간을 앞으로 계속 늘려 가는 방향으로 목표를 설정했다.
지난 전투를 기준으로 계산해 봤을 때, 20초 정도면 늑대 한 마리는 충분히 사냥할 수 있으리라.
‘솔직히 이번엔 운이 좋았다.’
괴물 늑대들의 진짜 무서운 점은 무리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불리하다 싶으면 곧바로 하울링으로 다른 동족들을 불러 모으는 놈들이라, 이번처럼 일대일로 맞붙는 경우는 사실상 좀처럼 없었다.
‘어찌어찌 각개격파를 유도한다 해도, 최소 두 마리 정도는 혼자 상대할 수 있어야 해.’
괴물 한 마리와 두 마리의 차이는 아주 크다.
앞뒤에서 달려드는 괴물들을 상대로 지속 시간 20초는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든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스킬 레벨을 좀 더 올릴 필요가 있겠어.’
다행인 건 렙업과 함께 스킬 증폭력도 소폭 상승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겨우 0.2배지만 레벨이 오르면 오를수록 그 증폭력은 어마어마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 레벨 업을 위해 혼자 사냥을 나간다는 건 너무 위험했다.
동료가 없다는 건 이럴 때 불편했다.
“반드시 사냥만이 정답은 아니지.”
정다운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다.
양손에 묵직한 흙벽돌들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외뿔 멧돼지의 기운!”
그는 스킬을 걸고 흙벽돌을 아령처럼 번갈아 들어 올리며 근력 트레이닝을 하기 시작했다.
“하나둘! 하나둘……!”
힘 키우는 데는 역시 헬스다.
사냥만큼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스킬을 써서 힘쓰는 일을 반복하면 효과가 있지 않겠는가.
그는 스킬 재사용 시간에 맞춰서 20초 운동하고, 90초 쉬고, 20초 운동하고, 90초 쉬고를 꾸준히 반복했다.
그리고 운동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충분한 휴식과 영양 공급!
자신에겐 시간도, 식량도 넘쳐 났다.
그는 힘들면 충분히 쉬고, 충분히 먹어 가면서 스킬 경험치를 차근히 쌓아 나갔고.
그렇게 며칠이 흐르자,
[<외뿔 멧돼지의 기운> 스킬이 3레벨로 발전했습니다.]
- 신체 능력 2.4배 증폭
- 지속 시간 30초, 재사용 시간 80초
“좋았어!”
이 정도면 늑대 2마리까지는 문제없으리라.
이제는 다시 실전이었다.
* * *
“크르렁!”
지상은 여전히 살벌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늑대 두 마리가 곧바로 이를 드러내고 정다운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대비가 철저히 되어 있던 터라 저번처럼 당황하거나 두렵진 않았다.
그 모습을 뒤에서 구경하던 토끼의 입에서도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휴, 저 똥 멍멍이들의 이빨로 돼지 뼈를 어떻게 뚫어.]
그 말 대로였다.
외뿔 멧돼지는 스테이지-1의 괴물들 중에서도 상위 개체.
감히 늑대 수준의 공격력으로 그 단단한 방어력을 뚫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외뿔 멧돼지의 기운!”
30초 카운트다운 시작!
카가각!
정다운은 자신 있게 뼈 갑옷을 두른 팔을 휘둘러 놈들의 이빨을 막아 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쇠꼬챙이를 앞으로 강하게 내지르자 후웅! 하는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
“크륵!”
늑대는 공중에서 몸을 뒤틀어 공격을 피해 냈다.
그리고 빙글 돌아 바닥에 착지 후, 다시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캬오!”
노리는 건 갑옷 사이로 보이는 목!
[잘한다! 물어! 물어 죽여!]
뒤에서 토끼가 쌍수를 흔들며 늑대를 응원했다.
하지만 정다운이 쇠꼬챙이를 몽둥이처럼 휘둘러 막아 내는 것을 보고 곧바로 시무룩해졌다.
“크릉!”
늑대가 쇠꼬챙이를 물고 늘어지자, 그 순간 다른 한 놈이 그의 후미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잘한다! 다리를 물어뜯어!]
그러나 그런 바람과는 달리, 정다운은 몸을 틀어 녀석을 냅다 발로 걷어찼다.
퍼억!
“깨갱!”
늑대가 앓는 소리를 하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토끼는 또 시무룩.
‘좋았어!’
정다운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소지품에서 쇠꼬챙이를 꺼냈다.
그리고 투창처럼 힘차게 던졌다.
슈욱!
날선 쇠창의 끝이 공기를 가르고 놈의 가슴으로 빨려 들어갔다.
“깨갱!”
제대로 먹혔다!
놈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나뒹굴었고,
‘다른 놈은!?’
정다운이 나머지 늑대를 찾아 고개를 홱 뒤로 돌리자,
“아우우우!”
“헐, 처세술 보소?”
[잘한다! 친구 찬스!]
치사하게 뒤로 빠져나와 다른 동족들을 부르고 있었다!
정다운은 다급히 놈에게 달려들어 그 주둥이를 틀어막았다.
흙벽돌 소환!
“캬웁!?”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쉽다!
당황하며 흙을 꾸역꾸역 토해 내는 늑대의 몸을 정다운은 그대로 밀어붙이며 쇠꼬챙이로 옆구리를 찔렀다.
“으아아아아!”
푸욱! 푹! 푹!
무기를 다시 뽑을 것 없이 정다운의 손에서 새로운 쇠꼬챙이가 계속 나타났다.
“캬륵!”
결국 피를 토하며 고꾸라지는 늑대.
하지만 그러는 동안 이미 그를 향해 수많은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다.
크르릉! 크르렁! 캬오오!
살갗을 찔러 오는 괴물들의 흉험한 살기에 정다운은 소름이 돋았다.
‘포위당하면 끝이다!’
아무리 갑옷의 방어력이 튼튼하다 해도 괴물들이 사방에서 물고 흔들면 갑옷이고 뭐고 다 망가질 것이다.
정다운은 미련 없이 도망쳤다.
땅굴 속으로!
“그럼 또 보자!”
“크르렁! 컹컹!”
늑대들은 뒤늦게 그를 쫓아 달려왔지만, 이미 땅굴의 입구는 흙으로 꽉 막혀 있었다.
앞발로 땅을 긁어 파 봤지만, 땅다람쥐가 아닌 이상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우우! 치사하다! 비겁하다! 깔짝깔짝 지금 뭐 하는 거죠! 그냥 끝까지 싸우다 죽어 버려!]
“시끄러워! 깔짝깔짝이 어때서? 이게 다 전략이야!”
[전략 좋아하시네!]
정다운은 안전한 땅속에서 쾌재를 불렀다.
그는 토끼의 맹렬한 비난은 귓등으로 들으며 땅굴을 따라 어딘가로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디 가요!]
“다음 정거장!”
그가 그동안 헬스만 한 건 아니었다.
그의 스킬 중 가장 레벨이 높은 건 역시 ‘흙 뭉치기’.
즉, 그가 가장 잘하는 건 땅굴 파기라는 말이다.
정다운은 여기서 1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추가로 파 둔 2번 출구를 향해 달려갔다.
지금 대부분의 늑대들이 자신이 사라진 1번 출구 위에서 코를 박고 킁킁거리고 있는 동안, 반대쪽은 상대적으로 한산할 터였다.
“뽀뀨 출동!”
“뽀뀻!”
먼저 뽀뀨를 위로 올려 보내 지상의 상황을 정찰시켰다.
잘못하다 늑대 무리 한가운데로 뛰어들게 되면 큰 낭패니까 말이다.
“네는 한 번, 아니오는 두 번. 세 마리 넘어?”
“뽀뀨 뽀뀨.”
“두 마리?”
“뽀뀨 뽀뀨.”
“한 마리?”
“뽀뀻!”
“옳거니! 한 마리구나! 흙 뭉치기! 흙 뭉치기!”
쩌적!
아무것도 없던 평지에 네모난 구멍이 뚫리며 정다운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마침 양고기를 뜯어먹느라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던 늑대 한 마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캬웁?”
“외뿔 멧돼지의 기운!”
“크륵!?”
정다운은 녀석에게 다짜고짜 쇠꼬챙이를 내질렀다.
그에 늑대는 깜짝 놀라며 뛰어올라 공격을 피해 냈지만, 그 순간 날아오는 묵직한 충격에 눈앞이 번쩍였다.
퍼억!
“깨갱!?”
녀석이 볼썽사납게 나뒹굴었다.
“오?”
정다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견제를 위해 흙벽돌을 하나 꺼내 던져 봤는데, 그거 한 방에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리는 것이다.
생각보다 효과가 좋은 견제기였다.
[투포환이냐…….]
토끼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흙은 생각보다 엄청 무겁다.
애초에 8레벨 최대 사이즈 흙벽돌은 너무 무거워서 들기도 힘들었고.
지금 던진 건 헬스용으로 작게 뭉쳐 둔 흙덩이였는데도 그 무게가 무려 20킬로였다.
“좋았어!”
정다운은 신이 나서 흙벽돌을 더 꺼내 늑대를 향해 붕붕 던지기 시작했다.
쿠웅! 쿠웅!
[헹! 동작이 커서 반격만 당하지!]
토끼가 비웃었다.
금방 약점이 드러났다.
너무 무거워서 멀리 던지기가 힘들었고, 그마저도 옆으로 피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러다 딱 한 대만 잘 맞으면,
퍼어억!
“깨갱!”
반드시 빈틈이 생긴다!
“흐압!”
정다운의 날카로운 쇠꼬챙이가 늑대의 심장을 후벼 팠다.
“크륵!”
“오예! 또 잡았다!”
정다운은 크게 기뻐했다.
모양새가 좀 이상하긴 해도, 자신의 스킬 두 개를 동시에 사용해 사냥을 성공한 것이다.
“어때? 나 지금 좀 전투직 같았지!?”
[전투직은 무슨! 변태 같다, 이 사람아!]
토끼가 순순히 받아 줄 리 없었다.
크르렁! 캬오!
아우우우우!
“아오, 질긴 놈들.”
진짜 쉴 틈이 없었다.
뒤늦게 정다운을 발견한 늑대 무리들이 이쪽으로 맹렬히 몰려오고 있었다.
“뽀뀨야 튀자!”
“뽀뀻!”
정다운은 곧바로 2번 출구 밑으로 뛰어들어 문을 틀어막았다.
크르릉! 컹컹!
파박! 팍팍!
잔뜩 성이 난 늑대들이 뒤늦게 땅을 후벼 팠지만 이미 정다운은 땅굴을 따라 내달리고 있었다.
“이번엔 3번 출구로 간다!”
[뽀뀨 뽀뀨!]
[또 있냐!?]
“으하하. 이게 바로 홍길동 전술!”
[전술 좋아하시네!]
그가 만들어 둔 출구는 총 세 군데.
정다운은 그렇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늑대들을 야금야금 기습했다.
시도 때도 없이.
밥 먹을 때나, 잠잘 때나.
밤낮을 안 가리고 갑자기 땅 밑에서 튀어나오는 그의 기습에 늑대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엔 늑대들이 출구 위치를 기억하고 미리 기다리자, 그는 출구를 6번까지 더 늘렸다.
아무리 늑대들이 눈에 불을 켜고 그를 기다려도 애초에 그의 작은 친구 뽀뀨가 정찰을 하는 이상, 위험한 순간 같은 건 오지 않았다.
그리고 간혹 정말로 위험하다 싶으면, 밑에서 한가롭게 밥이나 먹으면서 아령을 들었다.
“하나둘, 하나둘.”
그는 쉬면서도 끊임없이 스킬을 사용했다.
그 결과,
[<외뿔 멧돼지의 기운> 스킬이 4레벨로 발전했습니다.]
- 신체 능력 2.6배 증폭
- 지속 시간 40초, 재사용 시간 70초
“오?”
[그만 좀 해!]
토끼는 정다운이 얄미워서 발을 동동 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