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11)화 (11/393)

<던전리셋 11화>

<스테이지-2>

……뚝, 뚝.

양손에 들린 두 자루의 검 끝으로 붉은 핏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후우. 이제 다 끝났나.”

류승우는 지친 얼굴로 땀을 닦으며 한숨을 돌렸다.

여기에 와서 매순간 목숨을 걸고 있긴 하지만, 이번엔 진짜로 죽을 뻔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살아남은 건 자신이었다.

“세상에. 이게 다 몇 마리야? 다치진 않았어?”

동료들이 그의 곁으로 다가오며 질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를 중심으로 외뿔 멧돼지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류승우는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네. 다행히 큰 상처는 없습니다. 호열 형님 쪽은 어떠세요? 다친 사람은 없고요?”

“우리야 뭐, 사람이 몇 명인데…… 그보다 중간에 고립되는 바람에 너를 도와주러 오지 못해서 미안했다.”

“아닙니다. 덕분에 성과도 있었어요.”

“성과?”

그 말에 큰 도끼를 들고 있는 근육질 사내, 구호열의 눈이 커졌다.

류승우는 씨익 웃으며 조금 전 자신의 앞에 뜬 메시지를 확인했다.

<업적 달성!>

“외뿔 멧돼지 학살자!”

외뿔 멧돼지 100마리를 사냥하였습니다! 당신의 위대한 업적에 던전이 경의를 표합니다.

- 보상 : <외뿔 멧돼지의 기운> 스킬

“아무래도 제가 오늘까지 잡은 외뿔 멧돼지가 100마리가 넘었나 봐요. 보상으로 스킬이 나왔습니다.”

“오! 진짜냐? 어떤 스킬인데?”

류승우의 말에 다른 동료들도 놀란 표정으로 그의 곁으로 몰려왔다.

<스킬>

외뿔 멧돼지의 기운 (1레벨) NEW

- 전신에서 외뿔 멧돼지의 기운이 솟구친다.

- 일시적으로 신체 능력이 2배 증폭된다.

- 지속 시간 10초, 재사용 시간 100초

“……신체 능력이라면 실질적인 힘과 체력이 올라간다는 거잖아. 승우 너, 점점 괴물이 되어 가는구나.”

구호열이 질린 표정으로 류승우를 쳐다봤다.

류승우는 특유의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 괴물이라니요? 호열이 형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쩌십니까?”

“와. 호랑이 등에 날개가 달렸네요. 테크니션에게 몬스터 파워까지 추가되다니. 불공평하다!”

그들의 곁으로 키 작은 소년이 다가와 감탄사를 연발했다.

호랑이 등에 날개라는 말은 실로 정확한 표현이었다.

근육질의 거구 구호열이 무식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파이터였다면, 류승우는 바로 힘보단 기술, 테크니컬하게 싸우는 전투의 천재에 속했다.

그런 사람에게 힘을 증폭시켜 주는 스킬이 생긴 것이다.

재사용 시간 100초가 붙어 있긴 했지만, 스킬 레벨이 올라갈수록 그 시간은 점차 줄어들고 지속 시간은 길어질 게 분명했다.

게다가 저 ‘2배’라는 효과도 더 높아질 가능성이 있었다.

과연 업적 보상으로 주어질 만한 굉장한 스킬이었다.

“와아, 형 최고. 난 진짜 승우 형이 우리 편이라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러게. 승우야. 우리 평생 가자.”

“하하. 그러지 마세요들. 저 민망하게 너무 비행기 태워 주시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우리 동굴로 돌아가죠.”

“그럴까? 근데…….”

류승우의 뒤에서 구호열이 걸음을 미적거렸다.

“좀 아깝긴 하다. 그치?”

“음.”

그들의 시선이 동시에 산처럼 쌓인 외뿔 멧돼지 사체 100마리에게로 돌아갔다.

돼지고기 100마리.

본능적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맛있겠다…….”

“이거 도축하면 고기 꽤 나올 텐데…….”

“별수 없죠. 외뿔 멧돼지의 고기는 독이 있잖아요. 먹으면 배탈 나요.”

“……정다운 형만 살아 있었어도 이 정도는 정화 스킬로-”

“윤진수!”

찔끔.

소년의 입에서 정다운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구호열이 반사적으로 그를 다그치며 류승우의 눈치를 살폈다.

윤진수는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휴. 전 진짜 우리 팀에서 다운이 형의 빈자리가 이렇게 클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맨날 뒤에서 밥만 하던 형이었는데.”

그 말에 항상 서글서글 웃기만 하던 류승우의 표정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밥만 했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아니, 그게…….”

갑자기 그가 정색하자 윤진수는 당황했다.

어느 샌가 팀 내에서 금기어처럼 되어 버린 정다운 이름 석 자.

그 이름을 입안에서 중얼거리던 류승우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정다운은…… 누가 뭐래도 우리 팀의 중심이었다.”

그 말에 구호열의 입에서도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렇지. 우린 모두 전투밖에 할 줄 모르던 반푼이들이었으니까.”

반푼이.

류승우는 그 표현이 정말 자신에게 딱 어울린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날까지 태권도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던 자신이.

맨몸으로 이 알 수 없는 세상에 떨어져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겁에 질려 있던 자신이.

모든 걸 잊고 앞만 보고 달려들 수 있었던 건 모두…….

“내 뒤에 항상 그 녀석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래, 맞다. 전투? 그딴 건 사실 칼만 쥐여 주면 누구나 할 수 있어. 하지만 그 녀석은…….”

구호열은 정다운을 처음 봤을 때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던전 게임 첫날.

참가자들은 갑자기 자신의 손에 나타난 한 자루의 칼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대체 이 무기로 옆에 있는 사람을 찔러 죽이라는 것인지, 힘을 합쳐 다른 누군가와 싸우라는 것인지.

혹은 일찌감치 자살이라도 하라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어 당황하던 99명의 사람들.

그 틈에서 유일하게 단 한 명, 정다운만이 남들과 완전히 다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 녀석은…… 숫돌부터 만들었지. 칼날이 좀 무딘 것 같다면서.”

“응? 숫돌?”

당시 상황을 보지 못했던 윤진수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 설마 우리가 쓰는 숫돌들이 전부 다운이 형이 만든 거였어요? 어디서 구한 게 아니라? 그걸 대체 어떻게 만들었대요?”

피식.

그때를 생각하자 류승우의 입가에 웃음이 슬쩍 배어 나왔다.

“소환석을 뜯었다. 그 녀석.”

“……네? 무슨 석?”

“도우미가 서 있던 거대한 비석. 우리들을 이 저주받은 땅으로 끌어들인 마법의 돌. 정다운 말로는 질감과 경도가 칼 가는 데 딱 좋았다더군.”

“……?”

순간 할 말을 잃어버린 윤진수였다.

“그, 그 형은 그걸 어떻게 뜯었대요?”

“음, 요령껏?”

“요령?”

구호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 요령이 좋았거든. 손재주도 좋고. 사실상 전투 빼곤 다 잘했지.”

“전투 빼고 다 잘했…….”

“응. 전투 빼고. 하지만 애초에 이 게임의 목적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거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는 우리 중 누구보다도 가장 강한 존재였다.”

“살아남는 것.”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얼마나 무겁고 무서운 건지는 윤진수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그가 팀에 기여했던 수많은 역할들이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아. 그랬구나!’

정화 스킬?

그건 겨우 일부에 불과했다.

정화 스킬이 없었어도 정다운은…… 정다운이었다.

류승우는 엄숙한 모습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우리는 살아남을 거다. 누구보다도 끈질기게. 그게 바로 정다운의 죽음을 기리는 우리들의 제사이며 기도다.”

“흠흠.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졌군.”

다소 어색해진 분위기를 환기하며 구호열이 윤진수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놈아! 독이 든 돼지고기에는 그만 미련 버리고 얼른 돌아가서 감자나 씹어 먹자는 거다!”

“으아! 감자, 감자!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감자라니! 또 감자라니! 제발 독 없는 괴물들도 좀 나와라, 좀!”

“허허. 감자도 감지덕지니까 감사하면서 먹어, 이놈아. 애초에 괴물 둥지 밑에서 감자를 처음 찾아온 사람도 정다운이었잖아?”

“그래. 지금 이 순간도 차가운 땅속에 파묻혀 있을 정다운을 생각하면 우리는 행복한 줄 알자.”

“휴우. 알았다고요. 뭐만 하면 정다운이네. 자, 배고프니까 얼른 동굴로 돌아갑시다요.”

한숨을 푹 내쉬며 동료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윤진수.

또 감자라니, 생각만 해도 목이 막혀 왔다.

*   *   *

그리고 그 시각 정다운은…….

오늘도 삼겹살 파티였다.

치이익!

“크으, 이거지!”

뜨겁게 달궈진 돌판 위에 챠르륵 기름이 튀고.

도톰하게 썰린 붉은 살코기와 흰색 지방 위로 기름이 자글자글, 지글지글!

그렇게 노릇노릇 구워진 고기 한 점을 날름 집어 한입에 쏘옥 먹으면?

육즙이 콸콸! 침샘도 콸콸!

“크으으! 이것이 천국인가!”

하늘에선 매일 돼지고기가 떨어져 내리고, 연못에선 통통한 생선들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이게 바로 천국이 아니면 또 뭐란 말인가!

[아, 쫌, 시끄러워요! 매번 먹을 때마다 입이 쉬지를 않네! 먹을 땐 먹기만 해요, 쫌!]

“어허. 얘가 먹방의 즐거움을 통 모르네. 모름지기 맛있는 거 먹을 땐 리액션이 중요한 거야. 근데 너 이건 알란가 몰라?”

움찔?

넌지시 던전의 도우미로서의 자존심을 건드리자 눈에 띄게 발끈하는 토끼였다.

[뭐요, 뭐. 내가 뭘 몰라? 도우미인 내가 모르는 게 있을 리가요?]

“아냐. 모를걸?”

[아냐! 알걸? 그게 뭔지는 몰라도 무조건 내가 알고 있을걸?]

“그래? 사실 이 외뿔 멧돼지의 고기는 독이 있어서 먹을 수가 없거든. 근데 정화 스킬을 걸면 독소는 사라지고 쌉쌀한 독의 맛만 살짝 남아 있게 돼. 그러면 말이지?”

[……?]

정다운은 엄청난 비밀을 말하는 표정으로 토끼의 귀에 대고 소곤소곤 말했다.

“소금을 안 뿌려도 맛있어.”

[으아아! 그딴 건 몰라도 된다고요!]

“푸하핫! 짱이지?”

[죽일 거야! 내가 반드시 이 인간을 죽이고 말겠노라!]

그런데 그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정다운의 등 뒤로 또 한 마리의 돼지고기가 추락했다.

쿠웅!

“쿠익!?”

“오? 또 월척!”

[아, 진짜! 이 멍청한 돼지 놈들아! 아무리 리셋되면서 머리도 리셋된다 해도 그렇지, 이제 그만 뛰어내릴 때도 되지 않았냐!? ……어, 어? 님 지금 그거 뭐 하는 거임?]

성질을 버럭 내던 토끼의 눈이 순간 정다운을 보고 휘둥그레 커졌다.

“끙차!”

방금 떨어져 죽은 외뿔 멧돼지의 몸을 정다운이 두 손으로 번쩍 들어서 옮기고 있었다.

바로 어제만 해도 저걸 옮기려면 한참을 낑낑대며 바닥에 질질 끌고 다녔었는데 말이다.

[뭐야, 갑자기 왜 힘이 세졌어요! 맨날 고기만 먹어서 그런가!?]

“아냐. 그냥 스킬이야, 스킬.”

[뜬금없이 뭔 스킬요? 이런 데서 힘 관련 스킬이 생길 리가 없는데요?]

“음. 스킬 이름이 외뿔 멧돼지의 기운이라던데?”

움찔.

[……지금 설마 외뿔 멧돼지 학살자 업적을 말하는 건 아니겠죠?]

“맞는데? 학살자.”

토끼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 그럴 리가요? 그거 외뿔 멧돼지 100마리를 혼자 잡아야 주는 건데요?]

“그러니까. 내가 그동안 함정으로 잡은 놈들이 100마리나 되나봐.”

[응? 아니, 잠깐만요? 뭔가 이상한데? 님 그동안 리셋도 몇 번 했잖아요? 근데 그게 왜 100마리가 돼요?]

토끼의 횡설수설에 정다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음? 그게 무슨 말이야?”

[함정 위에 살고 있는 건 고작해야 40마리쯤일 텐데요? ……헐, 설마?]

불안하게 쳐다보는 토끼의 시선에 정다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럼 던전이 리셋되어도 나는 그 카운트가 계속 누적되나 보다. 원래는 안 되는 거였어?”

결국 토끼는 폭발했다.

[으아아! 당연히 안 되지! 이 오류 종자야! 게임이 한판 끝나면 킬(Kill)수가 리셋되는 건 당연하잖아!]

“오, 그래!? 그럼 설마 앞으로 다른 괴물들을 잡아도 전부 누적되나? 다른 괴물들 100마리 잡아도 다 업적 나와? 아, 함정 없이 그렇게 잡는 건 아무래도 좀 힘들겠지?”

[나한테 묻지 마, 이 돼지야! 이 인간이 맨날 돼지만 처먹더니 진짜로 돼지가 되어 버렸어!]

정다운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설마 외모도 돼지로 변해? 아니지? 아닐 거야? 빨리 아닐 거라고 말해.”

[몰라, 이 돼지야!]

다행히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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