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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리셋 (9)화 (9/393)

<던전리셋 9화>

외뿔 멧돼지는 던전 곳곳에서 서식하는 야수 타입 괴물로, 아주 위험한 맹수였다.

무겁고 단단한 체구에서 나오는 돌진력과 정수리에 길게 뻗은 외뿔 공격은 그동안 무수한 참가자들의 목숨을 앗아 가곤 했다.

[우후후. 그래, 여기란다. 이쪽이야.]

토끼는 함정 위로 올라와, 고기 냄새를 맡고 다가오는 외뿔 멧돼지를 향해 살랑살랑 손짓을 했다.

킁킁. 크르륵!

외뿔 멧돼지가 붉은 눈을 번뜩이며 함정으로 다가온다.

토끼의 행동은 녀석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냄새는 확실히 이쪽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크르륵!

[오구, 그래그래. 고기 굽는 냄새가 죽이지? 먹고 싶지? 배고파 죽겠지?]

토끼는 외뿔 멧돼지 옆으로 날아와 악마처럼 속삭였다.

[여기란다. 이 밑으로 내려가면 마음껏 먹을 수 있단다.]

크르륵?

외뿔 멧돼지가 토끼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떨구자, 까마득한 함정 바닥이 보였다.

크륵, 킁킁?

확실히 맛있는 냄새가 여기서 올라오고 있긴 한데…… 너무 깊었다.

그러자 토끼가 옆에서 쌍수를 들고 외뿔 멧돼지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힘내라, 힘! 넌 용감한 돼지야! 넌 할 수 있어! 우리 뿔 돼지 파이팅! 넌 뛸 수 있어!]

크르륵.

외뿔 멧돼지 눈빛이 사나워진다.

던전의 괴물들은 언제나 굶주려 있다.

그것이 참가자들에게 더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스테이지 마지막 장소인 이 유적지 괴물들의 경우에는 근처에 허기를 채울 작은 동물들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 극심한 허기는 때론 이성을 마비시킨다.

크르륵!

[그렇지! 뛰어!]

파악!

결국 외뿔 멧돼지가 뛰어내렸다.

불에 구운 고기 냄새의 유혹이란 그만큼 강렬한 것!

화덕을 여기에 만들자고 했을 때부터 시작된 토끼의 큰 그림이 지금 막 완성된 것이다.

쿠우웅!

외뿔 멧돼지의 육중한 무게에 땅이 울렸다.

그러다 앞발이 삐끗!

“쿠히익!?”

[헛!?]

녀석의 비명에 토끼가 쏜살같이 따라와 안부를 확인했다.

[괘, 괜찮아!? 많이 아파? 죽을 정도는 아니지!?]

“크륵…….”

[휴우. 겨우 앞다리 하나 부러졌네.]

역시 야수 타입은 터프하다.

앞발을 절뚝이며 몸을 일으키는 외뿔 멧돼지를 보며 토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이 정도면 충분해. 어차피 그 인간은 약해 빠졌거든. 공격 스킬도 하나 없지. 우흐흐.]

토끼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정다운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쪽을 가리키며 호기롭게 외쳤다.

[좋아. 저쪽이다, 돼지야! 저쪽에 그 인간이 있다! 고기도 있다!]

크르륵!

*   *   *

쿠우웅!

“헉, 뭐야!?”

갑자기 들려오는 소음에 정다운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설마 리셋인가? 한 달이 벌써 흘렀나?’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역시 던전 리셋이었다.

여기 살다 보면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추가적인 지진은 더 이상 없었고, 곧이어 땅굴을 통해 괴물의 울음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크르르!

“헐. 뭐야, 이거! 괴물 소리잖아!?”

정다운은 안색이 새파래져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외뿔 멧돼지의 울음소리를 모를 리 없었다.

전후 사정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땅굴 너머에 그 무서운 괴물이 나타난 게 분명했다.

“와, 뭐야, 이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는 당황해서 허둥지둥 소지품을 열었다.

날붙이라곤 도축용으로 쓰는 ‘나이프’뿐이었다.

그는 한 손에는 나이프, 다른 손으로 횃불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땅굴 안에서 상처 입은 괴물이 흉폭한 면상을 내밀었다.

“크르락!”

“으아악!”

역시 외뿔 멧돼지였다!

정다운은 다짜고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놈의 얼굴을 향해 들고 있던 횃불을 냅다 집어 던져 버리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퍼어억!

조금 전까지 누워 있던 흙 침대가 놈의 몸에 들이받혀 사정없이 짜부라졌다.

앞다리가 부러졌는데도 무시무시한 파괴력이었다.

“……이게 뭔!? 엇!”

허겁지겁 바닥을 구르며 옆으로 빠져나온 정다운의 시야에 문득 외뿔 멧돼지 뒤에서 웃고 있는 얄미운 얼굴이 보였다.

저 멀리서 토끼가 입을 가리면서 얄밉게 웃고 있었다.

잘 가라고 손까지 흔들면서!

“너였냐!”

[히히. 손님이 왔네요? 그럼 재밌게들 노셈. 난 바빠서 이만!]

“어디 가! 이놈 데려가!”

[죄송! 제가 지금 한창 게임 중이라 자리를 오래 못 비워요. 마지막을 함께 못 해서 아쉽네요. 아무튼 이번엔 진짜 안녕합시다! 뿅!]

“야!”

토끼는 그렇게 무책임한 말을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 바로 밑에서 정다운을 향해 외뿔 멧돼지가 미친개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크르락! 크륵! 크라락!”

“야! 잠깐! 으아악! 오지 마! 으아아악!”

정다운은 정신없이 도망쳤다.

엎치락뒤치락 바닥을 구르고 네발로 기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이프? 그런 건 이미 어디 떨어졌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맞서 싸우는 건 불가능해!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그렇지!’

마침 그의 시야에 함정으로 향하는 통로가 보였고, 그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저거다!’

파앗!

생각과 동시에 그는 통로 앞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긴장감으로 다리가 후들거려 넘어질 뻔했지만, 간신히 그 앞에 도착해서 놈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쪽이다!”

“크라락!”

흙더미 옆으로 완전히 빠져나온 외뿔 멧돼지가 정다운을 노려보며 투레질을 했다.

그리고 다시 발을 박차고 무섭게 달려드는 찰나!

‘벽 쌓기!’

척척척척척!

척척척척척척!

정다운은 재빨리 자신의 앞에 흙벽돌을 소환해 쭉쭉 담을 쌓아 올렸다.

물론 겨우 이 정도로 외뿔 멧돼지의 돌진력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시야 정도는 가릴 순 있지!’

정다운은 곧바로 몸을 옆으로 날렸다.

그러자 그 순간 외뿔 멧돼지가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눈앞의 벽을 들이박았고.

퍼버벅!

“크라락!”

벽이 무너지며, 그 뒤에 뚫려 있던 통로 안으로 녀석의 몸이 그대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리고 뒤늦게 그 앞에 정다운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몸을 뒤로 돌아섰을 때.

“크륵!?”

녀석의 시야에 모든 준비를 끝낸 정다운의 모습이 보였다.

“내 집에서 꺼져, 이 자식아!”

정다운은 버럭 소리치며 통로 안으로 소지품에 있던 흙벽돌들을 모조리 때려 박기 시작했다.

와르르르!

“크륵! 크르락!?”

외뿔 멧돼지는 몸을 버둥거리며 꾸역꾸역 밀려 들어오는 흙무더기에 의해 점점 뒤로 밀려났고, 입구가 그렇게 꽉꽉 막히기 시작했다.

정다운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아예 땅굴 위의 벽을 무너뜨려 완벽하게 구멍을 차단해 버렸다.

“하아아…… 살았다, 젠장.”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풀썩.

다리가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정다운.

크르륵! 카각 카각! 크라락!

등 뒤에서 놈이 땅을 파헤치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될 리가 없지. 판다고 진짜 땅을 팔 수 있다면, 저놈은 돼지가 아니라 두더지다.

괜히 실소가 흘러나왔다.

“킥킥. 이젠 내가 미친 건가. 이 판국에 웃고 자빠졌네.”

이젠 정말 신세가 처량해져 버렸다.

죽을 뻔한 상황에서 간신히 살아남긴 했는데, 유일하게 지상과 연결되어 있던 땅굴이 이렇게 막혀 버린 것이다.

‘이젠 정말 완벽하게 고립되었구나. 이제 밖으로 나갈 수가…… 응?’

그의 눈이 갑자기 동그래졌다.

“……아. 나 원래 못 나가지?”

어차피 유적지에 괴물들이 득실거려서 함정 밖으로 못나가고 있던 차였다.

생각해 보니 달라진 게 없는 것이다.

다시 힘을 내는 정다운이었다.

*   *   *

크륵! 카각, 카각!

“자아, 이제 저놈을 어떻게 한다?”

상황에 여유가 생기자, 정다운은 외뿔 멧돼지를 저대로 방치해 두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뿔 멧돼지는 흉폭하고 무서운 괴물이었지만, 동시에 맛좋은 식량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잡을 수만 있다면 삼겹살 파티인데…….’

그렇지 않아도 매일 똑같은 식단에 질려 있던 정다운으로서는 제 발로 이 밑으로 찾아와 준 저 돼지고기가 몹시도 탐이 났다.

맞서 싸우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겠지만, 죽이기만 하는 거라면 어쩌면 가능할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흠…… 흙 뭉치기. 흙 뭉치기.”

서걱서걱.

정다운은 틀어막은 입구와 조금 옆으로 떨어진 곳에서부터 새롭게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서걱서걱.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옆으로 비잉 돌아서, 결국 그는 외뿔 멧돼지의 뒤로 돌아 나왔다.

바로 함정으로 향하는 우회로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외뿔 멧돼지가 눈치채기 전에 재빨리 흙덩어리들을 퍼부어 놈의 뒷길도 꽉 막아 버렸다.

와르르르!

“크르륵!? 쿠익!”

“예쓰! 됐다!”

그렇게 앞뒤가 막혀 버리자, 외뿔 멧돼지는 땅굴 한 가운데 갇혀 버리고 말았다.

고립된 건 정다운이 아니라 바로 녀석이었다.

당연히 여기서 끝낼 생각은 없었다.

“여기선 내가 왕이라는 걸 똑똑히 알려 주마. 이 돼지고기야.”

정다운은 다시 새로운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이번엔 녀석의 위를 향해서.

“흙 뭉치기! 흙 뭉치기!”

서걱서걱, 서걱서걱.

위를 향해 파 들어가는 건, 한 가지 작업이 더 추가된다.

대각선으로 일단 방향을 잡고 구멍을 낸 뒤에, 발밑에 흙벽돌을 쌓아서 계단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얼마 후, 그의 발밑에 깔끔한 지하 계단이 만들어졌고…….

어느덧 그는 외뿔 멧돼지의 위에서 거만한 자세로 녀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녀석이 절대 올라오지 못하는 높이까지 올라온 것이다.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었지만,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크륵! 크라락!”

“왜? 올라오게? 그게 가능하면 네가 거미지, 돼지겠냐.”

정다운은 밑에서 분하다는 듯이 쉬익거리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외뿔 멧돼지를 향해 신나게 비웃음을 날렸다.

제아무리 대단한 괴물이라고 해도 사족 보행의 돼지가 수직으로 점프하는 건 신체 구조상 불가능했던 것이다.

결국 그렇게 깊은 구덩이에 갇힌 신세가 되어 버린 외뿔 멧돼지를 향해서, 정다운은 사악하게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날렸다.

“어서 와. 생매장은 처음이지?”

“……!”

그 순간 당황하는 외뿔 멧돼지의 머리 위로 흙무더기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와르르르!

“크롸랍……!”

사방이 고립된 이 땅속에서 녀석이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숨이 점점 막혀 오기 시작했다.

*   *   *

한참 후, 토끼가 돌아왔다.

[시체 구경하러 왔습니당! 이제 죽었겠지? 죽었을 거야? 히힛.]

도우미는 언제나 바쁜 몸이다.

게임의 모든 순간을 다 지켜볼 수는 없지만, 중요한 분기점마다 나타나서 참가자들에게 시련을 안겨 주어야 하는 숭고한 사명이 있는 것이다.

오늘도 보람 있게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돌아온 토끼의 마음은 몹시 들떠 있었다.

[돼지야! 어디 있니? 우리 뿔 돼지 어디 있니? 거기 있니? 배는 부르니?]

신나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함정 밑으로 내려오던 토끼의 몸이 중간에서 덜컥 멈췄다.

[……응? 입구가 뭔가 변했네?]

갑자기 기분이 싸했다.

왠지 못 보던 터널이 뚫려 있고, 계단도 생겨 있었다.

불안했다. 몹시 불안했다!

떨떠름한 기분을 느끼며 토끼는 평소와는 많이 달라진 그 길을 따라서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끝에는…….

“어. 왔어?”

[……!?]

정다운이 한가운데 앉아 외뿔 멧돼지의 거대한 몸을 활짝 펼쳐 놓고 열심히 도축을 하고 있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토끼의 눈코입이 경악으로 쫙 벌어졌다.

[외뿔 멧돼지를 잡았다고!? 생산직이!?]

“왔으면 흙이나 좀 털어 줄래? 오늘은 삼겹살 파티야.”

[시끄러워! 이 에러 종자! 던전의 버그 같은 인간아!]

그의 넉살에 토끼가 버럭 했다.

죽으라고 열심히 빌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식량만 자꾸 늘어나고 있는 정다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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