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8화>
그날로부터 정다운의 일과는 조금 바빠졌다.
좀 더 활기차졌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일과 하나. 땅굴을 판다.
“1번 땅굴이 아깝긴 해도 식량과 식수가 생겼으니까 이득 봤어. 이번엔 어디 2번 방향으로 진출해 볼까?”
[죽어요, 그냥.]
토끼의 반응은 언제나 뾰족했다.
뜻밖의 업적 달성을 한 뒤부턴 그게 더 심해졌다.
“아, 토끼야. 혹시 어디로 파야 지상이 나올까? 아는 거 없어?”
이렇게 열심히 땅굴을 팠음에도 아직까지 지상으로 탈출하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위로 파고 올라가면 여전히 암석층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미쳤어요!? 그딴 걸 내가 왜 알려 줘!]
“역시 그렇지? 난 또, 물어보면 알려 줄까 싶었지.”
정다운은 어물쩍 넘어갔다.
[…….]
“흠흠. 흙 뭉치기! 흙 뭉치기!”
왠지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새로운 땅굴 파기에 집중하는 정다운이었다.
그렇게 힘닿을 때까지 일하다가, 허기가 지면 곧바로 식사를 하고 쉬었다.
그러다 졸리면 침대로 돌아와 잠들었다.
졸리면 무조건 자고, 힘들면 무조건 쉬었다.
체력은 국력이었으니까.
이제 정말 급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일과 둘. 짬짬이 연못 구경하기.
이게 참 재밌는 취미였다.
맑은 물 안에서 꼬물꼬물 헤엄치고 있는 아기 물고기들을 보다 보면 그대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지켜보게 되는 것이다.
달리 할 것도 없는 이곳에서 정다운에게 허락된 유일한 오락거리였다.
쪼그리고 앉아 곰실거리는 물고기들의 숫자를 하나하나 세어 봤다.
하나, 둘, 셋…… 총 여섯 마리.
크기는 아직 손가락만 한했다.
‘흠, 숫자도 적고 너무 어려서 당장 잡아서 먹기는 힘들겠네. 빨리 무럭무럭 자라서 살도 찌고, 알도 까야 할 텐데.’
당장은 효과를 못 보지만, 이 아이들 덕분에 정다운은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한시름 덜었다.
소지품에 있는 식량은 아직까지 충분했고, 그 식량들이 다 떨어질 때쯤이면 아마 이 귀여운 아이들이 다 자라서 한 가문의 조상이 되어 있으리라.
시작은 비록 여섯 마리에 불과하지만 그 끝은 심히 창대하리니, 이 얼마나 안심이란 말인가.
“아, 근데 진짜 귀엽네. 이놈들 이름이라도 지어 줄까? 비늘이 은색이니까 은둥이, 은숙이, 은돌이, 은길이…….”
이름만 지었을까.
내친김에 그는 연못 안에 조물조물 흙벽을 쌓아서 물고기들의 방을 각각 만들어 주기 시작했다.
“여긴 은둥이 방, 여긴 은숙이 방, 여긴 거실이고, 그럼 여긴 화장실. 아 보물 창고도 만들까?”
정말 워낙 할 게 없다 보니, 쓸데없는 데 또 재미가 들렸다.
“그래! 자고로 그릇이 커야 밥도 많이 풀 수 있는 법!”
내친김에 연못을 좀 더 넓게 확장시켰다.
가장자리를 따라서 연못에 물길을 쪼로록 내다 보니, 본의 아니게 본거지를 중심으로 네모난 구조의 해자(垓字)가 만들어져 버렸다.
이게 처음엔 장난으로 시작했는데, 막상 완성하고 나니까 또 의외의 효과가 있었다.
사방이 흙으로 막혀 있다 보니 공기가 워낙 건조하던 차에, 물길을 한 바퀴 두르자 습도가 조절되어 한층 이 공간이 쾌적해진 것이다.
“좋아 좋아.”
[놀고 있네, 진짜. 저번엔 흙장난하며 놀더니 이젠 물놀이까지 해요?]
“오, 왔어?”
토끼는 던전 게임을 수행하러 사라졌다가도, 잊을 만하면 이렇게 불쑥불쑥 나타나곤 했다.
정다운이 넌지시 물었다.
“근데 토끼야, 얘네는 뭘 먹고 살까? 도우미면 뭔가 아는 거 없어?”
[그니까 내가 미쳤냐고요. 그걸 내가 왜 알려 줘요?]
“너 원래 미친 토…….”
[뭠마?]
째릿!
“흠흠. 뭐, 업적 보상으로 나온 거니까, 내버려 둬도 알아서 잘 살겠지.”
또 어물쩍 넘어가는 정다운의 말에 토끼의 표정이 움찔했다.
‘찍었는데 맞나 보네.’
그의 예상대로 물고기들은 뭘 하지 않아도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리고 일과 셋.
틈틈이 ‘벽 쌓기’ 기술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겁결에 깨달은 요령이었지만, 연습하면 할수록 이것의 대단함을 점점 깨달아 가는 중이었다.
손짓만으로 소지품 안에 있던 흙벽돌들을 일렬로 내려놓는 기술.
마치 테트리스 일자 막대기를 원하는 곳에 척척 내려놓는 느낌이었다.
이걸 연달아 사용하면 순식간에 벽이 하나 만들어지는 것이다.
[흥. 벽 만드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이래도?”
척척척척척척!
그가 연습하는 모습을 비웃던 토끼는 정다운이 바로 눈앞에서 벽 4개를 세워 가건물 하나를 뚝딱 만들어 내는 모습에,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니 비웃을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집을 만들었어?’
토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한눈에 그 가치를 알아본 것이다.
겨우 흙으로 만들었다지만, 위험천만한 던전에서 이 최소한의 안전지대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잠깐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었다.
던전의 밤은 정말 위험한 시간이었다.
밤이 되면 던전의 괴물들은 한층 더 흉폭해지고, 햇빛을 싫어하는 괴물들도 어둠 속에서 기어 나와 참가자들을 덮쳤다.
그래서 참가자들은 밤만 되면 항상 동굴 같은 안전한 곳을 찾아 숨어야 했고.
밤새도록 순번을 돌아가며 불침번을 세우고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그런 그들에게 만약 몬스터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집이 생긴다면 어떨까?
그것도 이렇게 순식간에 만들 수 있다면?
아마도 던전 게임의 상황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도우미 입장에서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역시 이 인간은 오류야. 이 완벽한 세계에 오점을 만드는 치명적인 오류 종자!’
토끼는 가늘게 뜬 눈으로 정다운을 노려봤다.
‘무슨 수를 내야겠어.’
* * *
꼬르륵!
알람 시계가 울렸다.
“아, 배고파! 진짜 뭐만 하면 배고프네! 이번엔 또 뭘 먹지?”
훈제 고기와 생선 구이, 둘 중에 더 먹고 싶은 음식을 고르시오.
어차피 메뉴라고 해 봐야 두 개뿐이면서, 정다운은 매 식사 때마다 고민하고 있었다.
“휴, 아무리 나라도 이젠 좀 질린다. 대학교 때만 해도 주구장창 치킨 마요 도시락만 먹고도 안 질렸었는데.”
훈제 고기를 집어 드는 정다운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입맛이 까다로운 편이 아니었다.
쉽게 질리는 편도 아니었고, 오히려 메뉴 하나에 꽂히면 수십 번도 연달아 먹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제대로 된 음식이었을 경우고, 던전에서 구한 재료로 만든 음식들은 언제나 조미료가 부실해 맛이 풍부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그렇지. 화덕을 만들어 볼까?”
화덕을 만들어서 훈제 고기를 불에 한 번 더 구우면 어떨까?
“고기는 역시 뜨거울 때 먹는 게 맛있지.”
[화덕이요? 그런 것도 만들 수 있어요?]
토끼가 관심을 보였다.
“못 만들 건 또 뭐야? 어차피 흙으로 모양 잡고, 밑에 모닥불을 지피면 끝인데. 횃불에 바로 익히는 건 아무래도 좀 오래 걸리거든.”
[흥. 누가 생산직 아니랄까 봐.]
정다운은 바로 양손에 흙벽돌을 소환했다.
그런데 갑자기 토끼가 딴죽을 걸었다.
[설마 여기다 만들게요? 고기를 구우면 연기가 심할 텐데?]
“아, 그러네? 환기를 생각 못 했네.”
토끼의 지적에 정다운은 아차 싶었다.
사실 정화 스킬을 이용하면 공기도 정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고기를 구우면 이 지하 전체가 매캐한 연기로 꽉 차 버릴 것이고, 그걸 일일이 정화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함정 바로 밑에서 만들지 그래요? 연기도 바로 위로 빠지고 좋겠네.]
“어? 그렇구나! 올, 어쩐 일이야? 이런 좋은 의견도 내고? 고기 구우면 한 점 줄까? 아, 토끼는 초식 동물이라 고기 못 먹나?”
정다운이 감탄하며 엄지를 치켜들자, 토끼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흥. 내가 왜 못 먹죠? 난 토끼 중에서도 몹시 특별한 토끼라 고기도 잘 먹거든요?]
“음. 역시 미친 토…….”
[뭐, 이 자식아!?]
정다운은 함정으로 서둘러 움직였다.
* * *
함정에 도착하자, 리셋된 쇠꼬챙이들이 을씨년스럽게 그를 반겨 주었다.
정다운은 먼저 그것들을 뽑아 버렸다.
“챙겨 두면 다 쓸데가 있겠지.”
쇠꼬챙이 30개를 추가로 획득했다.
이렇게 싹 뽑아 버려도 던전이 리셋될 때마다 매번 새롭게 생겨나니까, 미리 챙겨 두면 좋을 것 같았다.
문득 뻥 뚫린 천장으로 시선이 갔다.
‘단순히 올라가기만 하는 거라면 이쪽에 흙을 쌓아서 올라가도 되긴 하지.’
하지만 애초에 그림의 떡이었다.
이 위는 지옥이었으니까.
최종 유적지는 스테이지-1에서도 가장 위험한 곳.
특히 이 위엔 보물 상자를 지키는 괴물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보물은 가짜였지.’
정다운은 여기로 추락하기 직전에 확인했던 텅 빈 보물 상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보물 상자는 참가자들을 유혹하는 미끼에 불과했던 것이다.
“에이, 우울한 생각은 그만하고 밥이나 먹자!”
기분이 안 좋을 땐 역시 고기다!
그는 본격적으로 함정 구석에 화덕을 만들기 시작했다.
“먼저 바닥을 좀 파고. 흙 뭉치기!”
땅 파는 거야 이제 그에게 숨 쉬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일단 폭은 두 뼘 정도, 깊이는 한 뼘 정도로 바닥에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그 안에 방금 판 점토를 넓게 펴 발랐다.
나중에 이 점토는 불에 구워져서 돌처럼 단단해질 것이다.
그 주변도 꼼꼼히 발라서 점토를 균열 없이 한 덩어리로 만들었다.
장작을 태울 자리가 완성됐다.
그리고 그 위에 넓게 흙벽을 둘렀다.
이거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척척척척척!
손짓 한 번에 흙벽돌들이 5개씩 줄줄이 사탕처럼 쌓였다.
그렇게 위에 크게 구멍이 뚫린 네모난 박스를 만들었다.
구멍 위에는 조금 전 챙겨 둔 쇠꼬챙이 몇 개를 꺼내 적당한 간격을 두고 나란히 걸쳐 놨다.
쇠꼬챙이들이 바로 석쇠 대용이었다.
더러운 건 정화 스킬 한 방으로 해결!
“아. 공기 구멍도 있어야지.”
불이 타려면 산소가 필요하다.
공기가 장작 쪽으로 잘 흘러 들어가게끔 흙벽의 아래쪽을 쇠꼬챙이로 후벼서 구멍을 몇 개 뚫었다.
“짠. 완성.”
[이렇게 빨리? 뭔가 어설픈데요?]
“아냐.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해. 내가 뭐 용광로를 만들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고기 구울 건데. 볼래?”
정다운은 곧바로 횃불에 불을 붙여 화덕 아궁이에 집어넣었다.
장작은 다 마신 수통으로 대신했다.
괴물 부락을 습격하면서 노획해 온 이 수통들의 재료는 바로 마른 대나무였으니까.
타닥타닥, 잘도 탄다.
“숯불이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나중에 차차 만들지 뭐. 지금은 일단 이걸로 만족!”
그는 대나무 장작에 슬슬 불이 옮겨 붙는 것을 지켜보다가, 석쇠 위에 훈제 고기들을 쫙쫙 펼쳐 올렸다.
순식간에 자글자글 익어 가는 고기 냄새가 함정 안에 가득 찼다.
“흐흐. 좋다.”
정다운의 만면에 기대감이 가득 찼다.
침이 절로 고였다.
다 익은 고기 한 점을 집어 들고, 후후 불어 한입에 쏙 넣었더니.
“와흐! 으아!”
물컹하고 달콤한 육즙이 입안에서 팡팡 터진다!
혀끝에서부터 감동의 물결이 밀려 들어온다!
겨우 불에만 익혔을 뿐인데 매일 먹던 훈제 고기가 완전히 다른 요리가 되어 정다운에게 극진한 행복감을 안겨 주었다.
“한입 콜?”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토끼에게 슬쩍 한 점을 건네 봤다.
밉살맞은 놈이지만, 이제 와선 유일한 말벗이었으니 친해져서 나쁠 게 없었다.
하지만 상대의 반응은 뾰족했다.
[흥. 너님이나 많이 드세요.]
“진짜? 고긴데? 안 먹겠다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몇 번 더 권해 봤지만, 토끼는 끝내 고기를 먹지 않았다.
아무튼 그날은 파티였다.
“아, 배부르다. 이제 잠이나 잘까.”
[아주 툭하면 자는구만.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놈팡이가 따로 없네.]
“그럼 잠자는 거 말고 여기서 내가 뭐 할까?”
[음? 어?]
“먹었으면 자야지. 배부르면 자고. 졸려도 자고. 할 거 없으면 자고. 서 있기 싫으면 자고. 물고기 보다 자고. 땅 파다가 자고. 자는 게 남는 거야.”
[…….]
맞는 말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이 땅속에서 자는 것 외에 무슨 낙이 있단 말인가.
토끼는 정다운의 대꾸에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그는 흙 침대로 돌아가 순식간에 잠들었고, 토끼는 그 모습을 황당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토끼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요. 마지막 만찬이 즐거웠기를. 우후후.]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오늘 한 그의 행동이 스스로에게 어떤 위협을 불러올지를,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시각 함정 위.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괴물 한 마리가 있었으니…….
킁킁. 크르륵?
외뿔 멧돼지가 냄새를 맡았다.
녀석은 굶주려 있었다.
크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