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리셋 (6)화 (6/393)

<던전리셋 6화>

[던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다음 게임이 시작되었다.

갑자기 낯선 곳에 소환되어 어리둥절 당황하는 101명의 참가자들을 향해 토끼는 중절모를 벗으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오늘의 컨셉은 마술사.

녀석의 중절모 안에서 뾱, 하고 핑크색 꽃 한 송이가 튀어나왔다.

그 꽃송이를 뽑아 그윽한 표정으로 향기를 슥 맡으며, 토끼는 언제나처럼 사람들을 향해 정해진 멘트를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자, 그럼 게임을 시작해 볼까요? 응, 무슨 게임이냐고요? 여러분이 앞으로 할 게임은 바로 생존 게임이랍니다!]

“……!”

웅성웅성!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당황하는 참가자들의 모습은 언제 봐도 우스꽝스러웠다.

늘 이런 식이었다.

사람들은 매번 달라지지만, 던전 게임의 상황은 언제나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게 다 무슨 장난질이야! 여기가 대체 어디냐고 묻잖아! 이 미친 짐승아!”

[오? 미친 짐승? 참신한데?]

한 남자가 험악한 기세로 토끼를 향해 달려든다.

얼굴이 시뻘게져서 씩씩거리는 모습이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뭐, 아무래도 좋았다.

이런 멍청이는 게임을 시작할 때마다 꼭 한 명씩은 나오기 마련이니까.

그는 단지 선착순 1명에 당첨된 것뿐이다.

[에효. 암튼 반가워요, 멍청이님.]

토끼는 한숨을 폭 내쉬며, 그의 목을 뎅겅 베어 버렸다.

푸슛!

“……!?”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꺄아아아악!”

“으아악! 죽었어!?”

남자가 죽음과 동시에 폭죽처럼 여기저기서 비명들이 터져 나왔다.

언제나 반복되는 연례 행사였다.

이렇게 게임 초반에 1명을 잔인하게 죽이고 나면, 그 뒤로 나머지 100명의 참가자들은 도우미의 안내에 고분고분 따르게 된다.

바로 원활한 게임 진행을 위한 처형권인 셈.

[이제 딱 100명이네요?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요?]

토끼는 손을 탁탁 털며 100명의 참가자들에게 게임의 시작을 선포했다.

‘휴. 그 오류 종자도 이렇게 깔끔하게 죽일 수 있다면 얼마나 개운할까.’

그런 생각을 해 보며 남모를 한숨을 짓는 토끼였다.

사실 참가자들에겐 비밀이었지만, 실제로 도우미에게 허락된 ‘처형권’은 한 게임당 단 한 명뿐이었다.

도우미가 참가자들을 다 죽여 버린다면 게임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규칙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규칙 때문에 토끼는 정다운을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었다.

그가 ‘나머지 100명’에 속해 있기 때문.

‘이번엔 죽었겠지?’

토끼는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사실 도우미 입장에서 정다운은 별 능력도, 비중도 없는 인간에 불과했다.

살아 있든 죽어 있든,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죽을 인간이었기에 신경 쓸 가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찝찝했다.

자신이 만들어 낸 던전의 오류가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거슬렸다.

[……역시 시간 날 때 한번 들려 봐야겠다.]

이번엔 부디 죽었기를…….

*   *   *

물론 정다운은 여전히 잘 살아 있었다.

식량도 아직 여유가 있었고, 심적으로도 안정을 찾은 상태였다.

이젠 리셋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앞으론 무작정 땅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계획 하에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지하 동공을 본거지로 삼고, 그곳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방향을 나눴다.

어느 쪽이 동쪽인지는 몰라서 그 앞에 1번부터 4번까지 번호를 매겼다.

‘1번 방향부터 시작하자.’

작업은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사실 건너편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무작정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행여나 지하수의 수맥이라도 만난다면 그대로 물에 빠져 수장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뿐이랴. 혹시나 지반이 약해서 갑자기 천장이 무너지는 상황도 고려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흙 뭉치기 스킬 효과로 땅굴의 표면이 단단해져서, 어지간해서는 천장이 무너지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내 목숨은 하나니까.’

그렇게 생각한 그는 일정 거리 이상 앞으로 나갈 때마다 통로보다 조금 더 넓게 공간을 파서, 중간 거점을 만들어 나갔다.

수맥을 만나거나 하면 물의 흐름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게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피곤할 때는 반드시 지하 동공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서 잠을 청했다.

자는 사이에 무슨 일이 터진다면, 좁은 땅굴보단 넓은 곳이 안전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아무래도 사람이 하루 종일 계속 일만 하다 보니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걸 느꼈다.

어두컴컴한 지하라서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그는 땅굴을 파는 중간중간 취미 삼아 본거지를 조금씩 살기 좋게 개조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째 그게 스케일이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화장실만 따로 만들 생각이었다.

‘사람이라면 응당 밥 먹는 곳과 싸는 곳은 구분해야지. 난 두더지가 아니라 인간이니까.’

정다운은 지하 동공 한구석에 작은 방 하나를 동그랗게 뚫었다.

그리고 화장실이라면 뭐가 있어야 할까 생각했다.

‘화장실이라면 역시 변기가 있어야겠지?’

그는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흙을 조물조물 뭉쳐 어설프게나마 변기를 구현해 냈다.

물론 생김새만 그렇고, 그 안쪽은 깊게 구덩이를 파 두었다.

물을 내리지는 못하지만, 한번 싸고 그 위에 흙을 쏟아 덮는 구조였다.

어차피 냄새는 ‘정화’ 스킬이면 제거됐다.

정화 스킬은 공기도 정화할 수 있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하 동공 증축 작업!

워낙 할 게 없다 보니 이상한 쪽으로 의욕이 불타올랐다.

‘테이블에 의자 두 개만 더 만들까?’

어차피 혼자지만 의자가 하나면 너무 외로워 보였다.

‘이렇게 넓은데 쇼파 정도는 있어야겠지?’

푹신하진 않겠지만 어디까지나 기분상의 문제였다.

‘접시를 좀 더 곱게 다듬을 수 없을까?’

곰곰이 생각하다 접시 표면에 물을 발라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러 봤다.

그러자 표면이 매끌매끌해졌다.

성공적!

이쯤 되니 정다운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적성을 찾았다.’

대학교에 가서도 못 찾았던 자신의 적성을 이런 곳에서 찾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숨겨진 재능이나 적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게 꼭 노래나 춤 같은 게 아니더라도, 수다 떨기나 혼자 놀기 같은 것도 일종의 재능이 아니겠는가.

그런 비주류 재능이라고 해서 절대로 무시할 건 아니었다.

나중에 수다 떨기 재능이 진화해서 훌륭한 토론자나 강연자가 될지 또 누가 알겠는가.

아무튼 그런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의미에서 정다운의 재능은 ‘혼자서 흙 가지고 놀기’쯤 되시겠다.

그리고 사실 이건 그의 스킬 덕분이기도 했다.

‘흙 뭉치기’ 스킬로 만들어 낸 흙덩이는 흙 상태가 단단하고 찰졌다.

점성이 생긴 것이다.

잘 뭉쳐지는 만큼 생각하는 대로 요리조리 모양이 잘 만들어졌다.

게다가 스킬 효과가 아직 남아 있는지, 특정 형태로 한번 만들어 두면 그 상태 그대로 잘 흐트러지지 않았다.

요컨대, 가지고 놀기 딱 좋았다.

- 띠링!

[<흙 뭉치기> 스킬이 5레벨로 발전했습니다.]

“어? 레벨 업?”

어쩌다 보니 스킬이 또 한 번 발전해 버렸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 달랐다.

‘뭔가 다른 느낌인데?”

하루 종일 흙만 만지작거리던 정다운은 스킬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챘다.

“스킬 창.”

<스킬>

정화 (초급 7레벨)

- 불결한 것을 깨끗하게 한다.

 

흙 뭉치기 (5레벨)

- 흙을 빨리 잘 뭉칠 수 있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점점 더 크고 단단하게 뭉쳐진다.

스킬 설명은 달리 변한 게 없었다.

하지만 정다운은 거기서 힌트를 얻었다.

‘더 크고 단단하게? 압력이 달라진 건가?’

하긴, 처음부터 찰흙이나 점토가 아니고서야 흙을 뭉치기 위해서는 일정 이상의 압력이 필요하다.

레벨이 올랐다는 것은 그 힘이 강해졌다는 말이다.

그 말이 뭘 의미할까?

‘압력. 압력이라…….’

뭔가 잡힐 듯 안 잡힐 듯 간질간질한 기분.

그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흙덩이를 이리저리 굴려 보다가, 문득 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흙덩이를 다른 모양으로도 뭉칠 수 있지 않을까?’

꾸우욱.

“어?”

순간 만지고 있던 흙덩이에서 어떤 변화를 느낀 정다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가능성이 보인 것이다!

‘실험해 보자!’

그는 하던 작업을 다 내려놓고, 이 느낌 하나를 붙잡고 매달리기 시작했다.

“흙 뭉치기! 흙 뭉치기!”

꾸욱. 꽈아악.

스킬로 만들어 낸 흙덩이는 기본적으로 완벽한 구체를 이루고 있었다.

중심을 향해 일정한 압력이 가해지는 셈.

정다운은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 압력의 방향을 조금씩 비틀었다.

그랬더니…….

결국 정육면체의 네모난 흙벽돌이 만들어졌다.

“오, 됐다!”

그는 뛸 듯이 기뻐했다.

이제야 비로소 이 ‘흙 뭉치기’ 스킬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된 기분이었다.

‘그래! 반드시 동그랗게만 뭉치라는 법은 없는 거지!’

만일 그랬다면 아마 스킬명이 ‘동그랗게 흙 뭉치기’였을 터!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다른 형태로도 뭉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신이 나서 눈앞에 있는 흙덩이들을 전부 흙벽돌로 바꿔 버렸다.

그리고 그것들을 침대 맡에 차곡차곡 쌓아서 순식간에 네모난 협탁을 뚝딱 만들어 냈다.

‘이 위에 스탠드라도 있으면 딱이겠는데?’

아쉬운 대로 그 위에 횃불을 꽂았다.

그랬더니, 화룡점정!

협탁과 횃불 스탠드로 인해 정말로 그럴싸한 침실이 완성된 것이다.

‘역시! 장난감 레고 블록들이 전부 네모난 이유가 있었어.’

확실히 기본 도형일수록 무언가를 만들기가 쉬웠다.

이 작은 깨달음이 시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침실을 하나 더 뚫었다.

방을 넓게 뚫고 벽을 세워 통로를 만들었다.

그러자 휑했던 공간에 구조가 생겼고, 가정집처럼 좀 더 안락하게 변했다.

내친김에 욕심이 나서 침대를 좀 더 다듬어 봤다.

심혈을 기울여서 개조했더니, 어째 공주님 침대 같은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거기에 운치를 더하기 위해 침실 모서리에 횃불을 하나씩 꽂아 두었더니, 또 그게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특히 공주님 침대 뒷벽으로 차곡차곡 쌓인 벽돌의 느낌이 마치 단란한 신혼 방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오. 이쁜데? 큭큭.”

정다운은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두컴컴하고 아무것도 없는 이곳이 어찌나 심심하고 무료한지, 이젠 별게 다 웃겼다.

삭막한 땅속에 어울리지 않게 웬 공주님 취향의 침대가 덩그러니 있으니 자기가 봐도 어처구니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아무튼 소소하게 기분 전환용으로는 제격이었다.

그리고 그때쯤, 집들이 손님이 등장했다.

[이게 뭐야! 더 넓어졌잖아!]

“응?”

정다운은 갑자기 들려오는 쩌렁쩌렁한 비명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토끼가 돌아온 것이다.

[아니! 대체 왜 아직도 살아 있는 거예요!]

“아, 왔어?”

정다운이 1번 땅굴에서 손을 탁탁 털며 걸어 나오자, 그 태연한 모습에 토끼는 어처구니가 없어 소리를 빽 질렀다.

[아, 왔어? 아, 왔어어? 진짜 웃기고 앉았네, 이 양반이! 대체 식량을 얼마나 들고 있었던 거야!]

“아직까진 먹고살 만해.”

[빨리 좀 먹어요!]

그런데 그때였다.

쩌적! 하고 갑자기 정다운의 뒤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

[어? 저, 저……!]

“어?”

놀란 토끼의 표정에 정다운의 시선도 뒤로 향했다.

조금 전 파다 만 벽에 금이 갈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푸확!

“……!”

벽이 무너지며, 그 안에서 물이 터져 나와 정다운을 덮쳤다.

결국 지하수를 건드리고 만 것이다.

[그래! 잘한다! 그대로 죽어 버려라!]

토끼가 쌍수를 흔들며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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