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리셋 1화>
갑자기 바닥이 훅 꺼지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이 꼴이 되어 있었다.
“……큭.”
[아이쿠, 조심해요! 유적 깊은 곳에는 보물도 숨겨져 있지만, 동시에 위험천만한 함정도 존재한답니다. 던전의 규칙이죠!]
멀리서 방정맞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 빌어먹을 도우미는 반드시 누군가가 죽고 나서야, 뒤늦게 규칙을 알려 준다.
까마득한 구덩이 밑바닥.
그곳에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던 뾰족한 쇠꼬챙이들.
정다운은 바로 그 흉기에 배가 꿰뚫려 죽어 가고 있었다.
“큭.”
그는 마지막 힘을 내서 몸을 뚫고 나온 꼬챙이를 뽑아냈다.
그리고 바닥을 기어 한구석에 몸을 기대앉았다.
힘겹게 천장을 올려다보니 까마득한 어둠 끝에 동그란 빛이 보인다.
바로 자신이 추락했던 함정의 구멍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보물에 눈이 멀다니…….’
후회가 막심했다.
누굴 탓할 수도 없이, 바로 자신의 실수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렇게 죽는 건가.’
시야가 점점 아득히 멀어져 간다.
피를 너무 흘렸나 보다.
시간이 갈수록 몸이 점점 추워졌다.
귀에서는 삐- 하고 이명이 들리고, 머릿속은 그저 멍했다.
오감은 점차 둔해지고,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죽기 싫어서 발버둥 쳤지만, 결국 이렇게 죽음이 목전이다.
‘아니, 처음부터 비현실적이었지. 이 끔찍한 세상으로 소환당한 후부터 줄곧.’
그렇다.
정다운의 현실이 박살 난 건, 바로 그때부터였다.
한 달 전.
갑자기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이 ‘던전’이라고 불리는 정체불명의 세상으로 강제 소환당한 순간부터.
그리고 우왕좌왕하던 자신들 앞에 그 빌어먹을 토끼 놈이 나타나, 활짝 웃으면서 주절거리기 시작했던 바로 그 순간부터!
* * *
[짜란! 던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여러분은 게임에 초대되었어요! 응? 무슨 게임이냐고요?]
나비넥타이에 턱시도를 입고, 사람처럼 말을 하는 토끼는 자신을 ‘도우미’라고 소개했었다.
그 앞에서 성별과 연령, 직업들도 다양한 101명의 사람들이 당황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을 느긋하게 감상하던 도우미는 하늘로 둥실 떠올라 짤막한 두 팔을 벌리고 발랄하게 소리쳤다.
[여러분이 앞으로 할 게임은 바로 목숨을 건 생존 게임이에요! 우와! 재밌겠죠?]
‘재미는 개뿔. 미친 토끼 새끼.’
이런 게 주마등인가 보다.
죽음의 목전에서, 정다운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잔혹하고 끔찍했던 지난 한 달을 되새기고 있었다.
시시각각 죽어 가는 중이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절로 이가 갈렸다.
갑자기 눈을 떠 보니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이런 이상한 곳에 서 있으면, 누구나 다 어안이 벙벙해지기 마련이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순식간에 알아채고, 곧바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소설 주인공 같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게임이요? 규칙이 뭔데요?”
몰래카메라니, 영화 세트장이니 하고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한 여학생이 조심히 손을 들어 보였다.
소심해 보이지만 똘똘해 보이는 인상이다.
[뀨? 규칙이 뭐냐고요?]
턱시도 토끼는 여학생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며 귀여운 척을 떨었다.
자신을 도우미라고 소개한 주제에, 하라는 대답은 안 하고 상큼한 미소를 짓더니 갑자기 어깨를 들썩이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짜란, 짠짠! 죽으면서 배우는 던전 게임! 던전 게임!]
“대체 뭐라는 거야! 이 미친 토끼 새끼가! 여기가 어디냐고!”
토끼의 대답에 욱했는지, 험악하게 생긴 깍두기가 토끼를 향해 욕설을 터뜨리며 뛰쳐나갔다.
조폭인지 양아치인지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남자였는데, 입과 혀에 온 세상 욕들이 자동 탑재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험악한 기세로 자신을 붙잡기 위해 달려드는 그를 향해, 토끼는 한쪽 눈을 귀엽게 찡그리며 손을 까딱였다.
[그럼 일단 중요한 규칙부터 알려 줄게요. 첫째, 게임 도우미에겐 항상 상냥하게 대할 것.]
번쩍!
“……!”
그 순간 무언가가 휘둘러지며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그러자 기세 좋게 달려들던 덩치의 목에서 머리가 분리되었고.
머리가 툭, 떨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푸슉!
시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 일련의 광경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아직까지도 뇌리에 선명하다.
“……어?”
순간적으로 바짝 굳어 버린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토끼가 공중에서 배를 잡고 깔깔댔다.
[꺄하! 죽었다, 죽었어! 봤죠? 이렇게 하나하나 배워 가면 돼요! 참 쉽죠?]
사람들의 안색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지, 진짜 죽었어!?”
“꺄아아아악!”
정신이 바짝 들었다.
공기 중에 확 번지는 피 비린내.
그 앞에서 화사하게 웃고 있는 말하는 토끼의 모습은 몹시도 이질적이고 비현실적이어서, 마치 한편의 B급 공포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결코 꿈도 아니고, 몰래카메라도 아니었다.
바로 눈앞에 처한 지독한 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헷. 이제 딱 100명이네요?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요?]
공포에 질린 사람들을 향해 녀석이 선포했다.
[그럼 어떻게든 살아남아 보세요! 던전 게임! 시작입니다!]
그렇게 던전 게임, 아니 ‘지옥’이 시작되었다.
어둠 속에서 시시각각 덮쳐 오는 괴물들.
목숨을 노리는 위험천만한 함정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계속해서 죽어 나갔다.
방심하면 죽고, 실수해도 죽었다.
때로는 살기 위해서 서로를 죽여야 하는 상황도 생겼다.
그렇게 그 모든 위험을 뚫고 살아남은 이들이, 바로 오늘 결국 여기까지 도착하고 말았다.
던전의 끝.
보스가 기다리고 있는 최종 유적지.
* * *
쿠쿵!
혼신의 전투 끝에 결국 최후의 괴물이 쓰러졌다.
“끄, 끝났다!”
[수고했어요! 정말 수고 많았어요!]
전투가 끝나자, 생존자들 앞에 도우미가 나타났다.
도우미 토끼는 사람들 앞에 나타날 때마다 조금씩 복장이 바뀌었는데, 오늘은 특히나 한껏 꾸민 듯한 정장 차림이었다.
[정말 대단해요! 그 약해 빠졌던 분들이 이 무시무시한 최종 보스를 결국 쓰러뜨릴 줄이야!]
녀석은 어느 때보다도 신이 나서 하늘을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꺄핫. 역시 인간은 재밌어! 세상천지 어디에 이렇게 성장 속도가 빠른 종족이 또 있을까요! 신기해! 신기해!]
시간상으론 한 달, 겨우 4주가 지났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은 확실히 처음과 비교해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수많은 괴물들과 사투를 벌이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치열한 쟁투에서 승리한 자들. 아니, 살아남은 자들.
그 많던 게임 참가자들 중에서 결국 여기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7명에 불과했다.
최후의 7인.
그들은 여기저기 상처를 입어 지친 몸을 이끌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 한 사내가 호들갑 떠는 토끼 앞을 막아섰다.
“도우미. 이제 우린 돌아갈 수 있는 건가? 원래 세계로?”
[꺄. 목소리 좋고! 류승우 님은 언제 봐도 멋있네요! 팔은 하나밖에 없지만.]
도우미는 부끄럽다는 듯 몸을 배배 꼬며 사내를 쳐다봤다.
외팔이 사내, 류승우.
그는 100인의 참가자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활약을 펼친 인물이었다.
본래 태권도 사범이었다던 그의 육체는 이곳에 온 처음부터 단단하게 단련되어 있었고.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독려하고 이끄는 리더십 또한 그는 갖추고 있었다.
비록 그 와중에 한쪽 팔을 잃게 되었지만.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제 다 끝났으니까 우리를 집에 보내 줘!”
류승우의 옆에 있던 생존자들도 못 참고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토끼가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들을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에엥? 아까부터 자꾸 무슨 헛소리들이세요? 갑자기 집에는 왜 가요? 이 기세를 몰아서 힘차게 ‘다음 판’으로 넘어가야죠!]
우뚝.
“……뭐?”
순간 생존자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류승우가 당황한 모습으로 다그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저번에 분명히 보스 미션을 끝내면 던전이 클리어된다고 했을 텐데!”
[네. 그러니까 이제 겨우 스테이지-1이 끝난 건데요? 이제 다음 던전을 향해 떠나셔야죠?]
“……!”
그 말에 아연실색하는 최후의 7인.
“뭣!? 다음 던전!?”
“지금까지가 겨우 스테이지 1이었다고!?”
토끼가 풋, 하고 입을 가리며 웃었다.
[어라라? 설마 이번이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아항, 내가 말 안 했었나? 죄송. 깜빡했네요.]
‘농락당했구나!’
누가 봐도 지금의 순간을 위해 고의적으로 언급을 피한 것이 분명했다.
그걸 눈치챈 7인의 참가자들에게서 수많은 격렬한 감정들이 솟구쳤다.
처음엔 당혹, 그다음엔 분노.
그리고 종국엔 절망하고 말았다.
드디어 이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유일한 희망이 사라진 것이다.
[던전 게임은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랍니다.]
지옥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 * *
한편, 그 지옥에서조차 낙오당한 사람이 있었다.
“하악…… 쿨럭!”
정다운은 죽어 가면서도 허탈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던전 게임은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랍니다.]
거리상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신기하게도 도우미의 목소리는 던전 어디에 있더라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이 도우미의 능력.
도우미가 최후의 7인에게 하는 말들을 다 듣게 된 정다운은 그냥 속 편히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헤헤. 에잉, 왜들 이러셔? 게임 한번 안 해 본 아마추어들처럼? 게임이 한판이면 재미없잖아요.]
최종 보스인 줄 알았더니, 이제 겨우 스테이지 보스를 쓰러뜨린 것이었다니.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다행일지도…….’
바로 코앞까지 와서 함정에 빠져 죽는 것이 허무하고 억울한 참이었는데.
억울하긴 개뿔. 이제부터 고생 시작이란다.
[자아! 쉴 틈이 없어요! 쉴 틈이 없어요! 죽으면서 배우는 던전 게임! 던전 게임! 열려라, 참깨! 열려라, 던전 게이트!]
‘아우. 저 미친 토끼 새끼.’
정말 지치지도 않는지, 쉴 새 없이 주절대는 토끼의 목소리가 죽어 가는 와중에도 너무나 거슬렸다.
[이 게으름뱅이님들아! 던전 게이트 열린 거 안 보여요? 미적거리지 말고 얼른얼른 넘어갑시당!]
정다운은 어차피 죽을 거, 저 토끼의 명치를 딱 한 대만, 정말 딱 한 대만 때리고 죽고 싶었다.
[아이, 참. 지쳐서 그래요? 괜찮아, 괜찮아! 이럴 때를 위해서 스테이지 클리어 보상이 나가는 겁니다! 얍! 얍!]
‘아, 저 주둥이 제발 좀 닥쳤으면 좋겠…… 응?’
사르륵.
그때, 정다운의 눈앞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은빛 가루들이 내려왔다.
‘어어?’
실로 아름다운 광경.
하지만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 은빛 가루가 그의 몸에 스며드는 순간, 갑자기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생존자 완전 회복!]
‘상처가…… 낫고 있어?’
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죽기 직전이었던 자신의 모든 상처들이 급속도로 치유되고 있었다.
상처뿐만 아니라 피가 범벅되어 찢기고 해져 있던 옷까지도 깨끗하게 복원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이것은 기적이었다.
새로운 힘이 샘솟고 있었다.
생사의 기로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원받은 것이다!
그때, 토끼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자. 이제 됐죠? 우왕, 류승우 님! 팔이 두 개 되니까 훨씬 멋있어졌네요! 아무튼 이제 얼른 얼른!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갑시당!]
그 말에 깜짝 놀란 정다운은 벌떡 일어나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자, 잠깐! 나도……! 나도 데려가! 나 여기 살아 있어!”
있어! 있어-!
최고의 컨디션으로 돌아온 정다운의 목소리가 함정 안에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거리가 너무 멀어 그 목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못했다.
* * *
[스테이지-2를 향해 출발!]
기분 탓일까.
토끼의 재촉에 게이트를 향해 걸음을 옮기던 류승우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떠나려 하니, 마지막에 와서 함정에 빠져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소중한 동료의 존재가 생각난 것이다.
‘끝까지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하다. 정다운…….’
그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함정이 있던 방향을 한차례 쳐다보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게이트가 닫혔다.
쩌적!
…….
* * *
삽시간에 적막해진 유적지.
“잠깐! 나 여기 있다고!”
정다운은 당황해 소리쳤다.
“거기 누구 없어요!?”
없어요? 없어요? 없어요?
지하에서 울려 퍼지는 그의 덧없는 목소리에 대답해 줄 이는 이 던전 안에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렇게 그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함정 구석에 홀로 낙오되어 버린 정다운.
곧이어 그의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던전이 리셋됩니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