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3화
드루이드 복식을 한 레이크 공작을 보호하던 수십 가지의 보호 비술과 신비술이 모조리 깨어져 나갔다.
마침내 레이크 공작의 심장에 정지한의 손이 틀어박힌다.
피를 토해내며, 충혈된 눈으로 레이크 공작은 정지한을 노려보았으나.
이내 고개를 떨구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옷과 함께 빛의 입자가 되어 정지한의 손으로 모조리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또한.
석실 전체에서부터 빛의 입자가 생겨나 그대로 모조리 빨려 들어간다.
그것은 이 석실에 걸려있던 강력한 성좌의 힘, 그 자체였다.
수룡에게 걸렸던 시간 정지의 힘이 곧이어 풀리고, 수룡은 평범한 물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압도적인 광경!
그때다.
강력한 마력이 은의 수조에서 일어나 파동이 되어 사방을 흔들었다.
-네놈이 감히 본녀의 마도를 가로채려 하느냐!
은의 수조에서부터 물이 일어나 여인의 형상을 만들어 낸다.
그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감정을 자아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지극히 아름다운 형상을 하고 있었다.
멀린의 연인이었으며, 요정의 혈통을 이은 성좌 [호수의 여인]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
성좌의 화신체가 강림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나 정지한은 무표정했다.
조금의 감정 동요도 없이.
마치 강철로 만든 조각상처럼 차갑게 쳐다만 볼 뿐.
“현세에 거닐지도 못하는 성좌 따위의 힘을 내버려 둬야 하는 이유가 있나?”
부르르르.
-감히! 본좌를 우롱하는가!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그걸 우롱으로 받아들인다면, 너의 격이 그만큼 저열하다는 것이겠지.”
분노가 성좌의 화신체에서 터져 나왔다.
우르르릉!
석실 전체가 뒤흔들린다. 그러나 정지한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방금 전.”
그가 품 안에 손을 집어넣는다.
“너를 따르는 추종자가 죽었다. 그러나 너는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고, 이 석실에 대한 것만 이야기하는구나.”
그리고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그것은 낡은 회중시계같이 생긴 것이었다.
“그런 너희를 내가 왜 존중해야 하지?”
-아하하하핫! 그런가. 그랬구나. 네 녀석은…… 필멸자 따위가 아냐.
“필멸자 따위가 맞다.”
-흐응… 네 녀석에게서 시간의 흔적이 이토록 진하게 느껴지는데도 그렇게 생각하는 게냐?
분노하던 성좌 [호수의 여인]은 흥미롭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 변덕스러움은 인간과는 확연히 달랐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네 녀석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누구도 나 니뮤에의 것을 훔쳐갈 수는 없느니라!
“할 수 있다면 해 봐라.”
회중시계를 든 정지한은 고요히 [호수의 여인]을 본다. 그리고 두 명의 힘이 충돌하면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날.
레이크 공작의 거성이 폭발해 사라졌다.
그 폭발을 멀리서 [원탁의 기사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 * *
내가 사는 집은 본래 서울이었지만, 지금은 파주의 세계수 바로 옆 빌딩 펜트하우스다.
세계수는 여전히 무럭무럭 자라고 있고,
이 근방은 대한민국 특유의 빨리빨리 민족성에 부동산 불패 신화.
거기다 각종 스킬과 마법에 힘입어 50층 빌딩들이 우후죽순처럼 1년도 안 돼서 완공을 하는 기염을 토해내고 말았다.
순식간에 파주 지역 최고가 땅값을 자랑하는 지역이 되어 버린 이 지역은 아직도 여기저기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시끄럽지만, 동시에 활기와 활력이 넘쳐난다.
펜트하우스는 옥상까지 혼자 통으로 쓰기 때문에 정원도 만들어져 있는데, 그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기분이 기묘하다.
만화처럼 ‘하하핫! 우민들!’ 하면서 와인 잔을 기울이는 흑막 같은 기분이 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뭐 없다.
저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그동안 그렇게 개고생을 했구나…… 하는 그런 감각이라고 할까?
이런 게 또 모티베이션을 채우는 데 도움이 된단 말이지.
[주군. 지치셨군요.]
“응. 맞아. 약간 지쳤어.”
결국 굵직한 일들은 전부 처리했다.
남극대륙은 확실히 해결했고, 이제 정비가 사장이 남극대륙에 두 번째 차원 방벽 생성기를 세우면 일은 끝난다.
이번 일 덕분에 각국의 정부들이 자원을 집중해 주기로 했고, 그 금액을 환산하면 2,000조 원이 넘는다더라.
즉. 이걸로 내가 할 일은 거의 다 달성했다…….
“아닌가? 뭔가 지쳤다기에는… 조금 기분이 그래. 그러면 이건 지친 게 아니라. 일을 끝내서 생기는 일시적인 무력감일까?”
[아닙니다, 주군. 지치신 겁니다.]
번아웃, 뭐 그런 조짐이 온 건가.
직장인들 많이 겪는 그거.
“이유가 있어?”
[예. 주군은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뭘?”
[아직 모든 게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을요.]
“음…….”
그런가.
아직 뭔가가 남았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 건가.
[성좌의 직감]이 가르쳐 주는 경고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확실히. 뭔가가 남은 거 같긴 해. 찜찜하달까. 너무 쉽다고 해야 할까?”
나와 리블, 단둘이서 정리할 정도의 던전이었다.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지만, 지금의 인류로도 어쨌든 정리 가능한 던전이라는 의미다.
필리핀 던전도 그랬다.
사실 인류가 힘을 집중했다면 필리핀의 던전도 해결했을 거다.
물론 나도 그곳에 들어가서 개고생했지만, 그게 정말 마지막 시련일까? 싶은 기분이 든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불안 요소를 먼저 확인하고 처리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불안 요소를 특정하는 것도 못 하고 있잖아.”
[특정할 수 있는 불안 요소가 있습니다. 비밀결사들을 조사하는 것이죠.]
“아. 그러네.”
척량의 말에 머리가 밝아진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까 승천이니 뭐니 하겠다고 인신 공양하는 새끼들이 바로 비밀결사들이다.
물론 선한 비밀결사도 있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이야 나중에 따로 분류해서 안 건드리면 되잖아?
“가장 큰 곳이 4군데였지?”
[예. [호수의 여명회]와 [세피로트 조하르] 그리고 [곤륜산]과 [골든 호라이즌]입니다. [골든 호라이즌]은 저희와의 협약 때문에 승천을 위한 활동은 전면 중단했습니다만…….]
“다른 셋은 어떨지 모른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일단…… 가까운 건 [곤륜산]이네. [헤르메스의 발걸음] 덕분에 거리 문제는 아무 상관 없지만…….”
[그렇다 해도, 주군의 본진은 이 한국이시니 중국에 자리 잡은 [곤륜산]을 먼저 방문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좋아. 만나 보자고.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봐야겠지.”
[곤륜산]이 선과 악 중에서 어느 쪽인지. 나는 현재 모른다.
그러니까 우선은 만나 보는 게 좋겠지.
“그런데 어떻게 만나 보지? 그놈들, 그래도 비밀결사인데.”
[그거야 간단한 일입니다.]
“그래? 뭔데?”
[방송을 하시는 거죠.]
“어……. 그래도 되나?”
[안 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어차피 주군을 염탐하고 있을 터. 방송에서 그들을 찾는다면 알아서 찾아올 겁니다. 만약 찾아오지 않는다면…….]
“않는다면?”
[AB에게 요청하여 그들의 자료를 받은 뒤. 방송에서 뿌리시면 됩니다.]
캬… 척량이 역시 책사야.
“미친 생각 같은데… 아주 좋아. 바로 하자.”
[예. 주군.]
* * *
엄지척의 방송은 인기가 높다.
얼마나 높으냐면, 이제는 갓튜브 1위다. 본래 1위를 하던 ‘그 헌터’ 아일을 제치고 만 것.
사실 그럴 만도 했다.
햄볼을 굴려 지구를 구하겠다고 돌아다니는 미친놈을 어떻게 이기나.
게다가 우주 공간으로 공간 이동을 한다거나, 궤도 폭격을 하는 등의 능력은 그 어떤 헌터도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 와중에 혼자 제로투댄스를 하는 미친놈이 여기 있다.
엄지척의 능력은 현재 세계 최강으로 거론되고 있을 정도다.
또한 최근에 올렸던 영상.
남극대륙의 6성급으로 의심되는 초대형 던전의 클리어 영상은 신화적인 전투가 무엇인지 보여준 싸움이라고 할 만했다.
아쉽게도 현존 인류 중에서 엄지척과 그의 동료로 알려진 정리블보다 강력한 헌터는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런 엄지척이 생방송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역시 모두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안녕하세요! 엄지검지 엄지척입니다!”
요상한 햄스터 탈 같은 걸 쓰고 방송을 하기도 했던 엄지척. 이번에는 새로운 코스튬을 들고 나왔으니까!
그것은, 개 탈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아이돌 개 탈을 쓰고 왔다.
-이게…… 세계 구원자?
-세계를 구원한다는 헌터가 이래도 되는 거임?
-엄지… 그는 프로다. 어떤 의미로 늘 초심인 남자
-일억 구독자를 올려도 개 탈 쓰고 춤추는 미친놈. 가슴에 엄지척이라고 이름도 붙여 놨네.
-원 따봉 드립니다. 개추!
실시간 생방송에 몰려온 시청자들은 그 복장에 경악하며 따봉을 누르니, 이것이 모두 엄지척의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모로 가도 따봉만 받으면 된다!
물론 이 방송은 따봉을 위해서 시작한 방송은 아니었지만, 이왕 하는 거 철저하게 하자는 생각이 엄지척의 뇌를 지배했음이 틀림없다.
“오늘은 이 복장으로 방송을 계속하려고 합니다. 코스프레 느낌인데요. 오늘은 그간 바빠서 못 했던 근황토크를 할까 합니다~.”
-간만에 엄지 근황 토크 하는 거야?
-이럴 때는 슈퍼챗을 해야지!
-[썬주란] 님이 1,000,000원을 후원했습니다.
[썬주란] : 엄지척 헌터님 오랜만에 근황 토크 하시네요. ^^
-썬주란이닷!
-진짜가 나타났지만… 놀랍지 않음. 왜냐면 이제 곧…….
-[A/B] 님이 1,000,000원을 후원했습니다.
[A/B] : 헤이, 브로! 남 일 시켜놓고 혼자서 방송하는 거야?
-역시가 역시로군.
-에이비 떳드아아아아!
-[GH] 님이 1,000,000원을 후원했습니다.
[GH] : 미스터 엄. 힘세고 강한 아침. 훌륭했다. 당신의 업적.
-이 아재는 또 누구래? 괴상한 번역체네.
-와, X. 기본이 100만 원…….
-살 떨린다! 살 떨려! 이것이 전 세계 최강 헌터의 위엄이냐!
채팅창이 완전히 폭발한다. 그리고 후원금을 달고서 채팅이 뜨는 것 역시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 상황에서 엄지척은 활짝 웃었다.
“썬주란 누님 슈퍼챗 감사드립니다! AB 브로도 땡큐 베리 머치! 그리고 GH 님은 [골든 호라이즌]이신가요? 칭찬 감사합니다!”
-골든 호라이즌이 뭐임?
-미국의 랭킹 3위 길드자너.
-아, 거기? 부자들이 만든 연합 길드?
-미국이 달려들고, 일본이 절을 하는 우리 엄지! 국뽕이 맛나다~~ 주모 여기 국뽕 한 그릇 가져오소!
“제 채널의 영상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요. 저번 달 내내 바빴습니다. 북극에서 그 난리가 나고, 남극에서 그 난리가 날 줄 누가 알았겠냐 이거에요.”
엄지척이 적극적으로 썰을 풀기 시작했다. 적절한 영상도 띄우면서, 북극과 남극에서 있었던 일들을 보여 준다.
그리고 한창 토크를 진행하다가 결국 본론에 들어갔다.
“그래서 말이죠. 여러분들, [곤륜산]이라는 곳에 대해서 아시나요? 듣기로 이 사람들이 중국 쪽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비밀결사라고 하던데. 이 사람들은 과연 어떨까요? 스페인에서의 그 일을 터트린 빌런들 같은 곳일까요?”
-[A/B] 님이 1,000,000원을 후원했습니다.
[A/B] : 돌았냐? 공개적으로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하냐!
A/B가 득달같이 달려와 소리를 질러댄다.
하지만 엄지척은 과감히 무시하기로 했다.
“그래서 제보를 받고 있습니다! [곤륜산]의 연락처를 아시는 분. 혹은 그쪽과 연관이 되신 분들 연락 부탁드릴게요!”
전 세계의 비밀결사들을 경악에 빠트리는 생방송이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요즘은 갓튜브가 공중파 언론 기능을 빼앗는다지?
그걸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고 한동안 뉴스니 칼럼이니 나왔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없다.
정치가 비서의 사돈의 팔촌까지 금시계를 받고, 그 일가가 주가 조작을 해도 방송은 침묵한 지 좀 됐으니까.
그나마 갓튜브도 조회 수 팔이용으로 자극적으로 내는 거지, 얘들이 취재 데스크를 운영하는 것도 아니니 조악해질 수밖에.
내가 대단한 언론인이 될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말이다.
그 비밀결사에 나도 좀 흥미가 있어요. 그러니까.
어디 한번 이 세계가 어떻게 굴러갈지 구경이나 해볼까?
-그렇게 대단한 비밀결사라면 엄지 죽이러 올 것 같은데? 괜찮음?
-그치. 나라도 엄지부터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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