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6화
4성급 던전부터는 영상이 거의 없다.
귀중한 던전이고, 그 안의 정보 역시 비싼 값에 거래되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5성급 던전 영상도 ‘그 헌터’가 거의 다 올린 거다.
5성급 던전을 솔플하고 다니는 ‘그 헌터’는 확실히 대단한 자다.
나중에 한번 만나서 진지한 대화를 해 봐야 할지도.
[5성급 던전부터는 그 내부 면적이 적어도 호주와 거의 비슷한 크기인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국가나 이종족도 살고 있죠. 다만 아직까지 엘프나 드워프 같은 종족을 발견한 적은 없다고 합니다만…….]
사이클롭스 종족들이 문명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확실히 확인했지. 그러고 보니 그 던전은 그대로지?
[예. 던전 공략을 하는 중이라고 합니다만, 아직 소멸되거나 클리어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박살 낸 사이클롭스 진영. 그 중심의 포탈은 여전히 건재하다.
몇 번 공략 팀이 들어갔지만 실패했다나.
이대로라면 다시금 사이클롭스들이 튀어나와서 또 난리 칠 게 뻔하다.
내가 직접 가서 처리해야 할지도.
“다들 친밀하시니 보기 좋네요. 저만 뭔가 따돌림 받은 느낌인데…….”
“그거야 형제님은 바빠서 따로 계셨으니까 그렇죠. 참. 하시는 일은 전부 봤어요. 대단하세요, 형제님.”
“대단할 게 뭐 있겠어. 어쩌다 보니 하게 된 거지. 그나저나 던전 일부러 소멸 안 시킨 거야? 아니면 못 한 거야?”
“일부러 안 한 거예요. 계속해서 클리어하려고요. 거기만큼 수련 잘되는 장소가 없거든요.”
별하나가 병나발을 불다가 답해 주었다. 주스 한 병을 혼자 다 마실 기세다.
정지벽이야 늘 저랬지만, 별하나가 저러니까 특이하다.
고된 생활이 그녀의 식생활을 바꾼 건가? 와일드해지셨네.
“자. 다 됐습니다.”
무척이가 식사를 내왔다.
무척이표 볶음밥!
“형제님의 볶음밥. 감사히 먹겠습니다.”
“무척아 잘 먹을게!”
“무척이 감사.”
다들 뭐라고 하면서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딱히 배고픈 건 아니었지만, 같이 어울려 먹었다.
식사를 하고. 후식을 먹고.
모두 앉아서 차 한잔하면서 그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들어 보니, 팀원들이 들어간 던전에는 비버 종족이 국가를 이루며 살고 있단다.
비버? 그 비버?
아니.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지능 높은 비버 종족이라니? 귀여운데?
어쨌든 이 비버 종족을 도와서 악마를 물리치면 된다는데, 안에서 해야 하는 퀘스트만 적어도 오십여 개가 넘는다고.
미친 거 아닌가?
그걸 다 깨고 소환된 악마와 싸우는데, 이놈이 또 엄청나게 강하단다.
그걸 이기면 퀘스트 올 클리어.
첫 번째는 1년이 걸렸고. 두 번째는 10개월. 세 번째는 8개월 안에 처리했다고.
들어갈 때마다 동일한 내용이 반복되는데, 비버들은 팀원들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정지된 세계.
5성급 이상의 던전들은 본래 그런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소멸 안 시킨 것도 있어. 소멸시키면, 저 비버들이 전부 사라지는 거잖아.”
무척이의 설명에 마음이 조금 불편하긴 하다.
[저들은 어차피 허상에 불과한 것이지만……. 마음이 가벼울 수는 없겠군요.]
그러게. 척량아. 저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싶다.
“어쨌든 오랜만에 모두 모여서 이렇게 대화도 하고 나니까 느긋하고 좋네요.”
내 말에 다들 흐뭇하게 웃는다.
“참. 그래서, 얼마나 쉬다가 던전에 또 들어갈 거예요?”
“비버 던전은 그만 가고, 다른 데 가기로 했어. 5성급에도 난이도 차이가 좀 있다고 하더라고.”
“그거야 그렇겠지.”
“형은 어쩔 건데? 지금 밖이 난리라던데.”
“어쩌긴. 사람들 머리채 부여잡고 끌고 나와야지.”
초거대 차원 방벽 생성기.
그걸 만드는 데 모두를 강제 참여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걸 방해하려는 악신이나 비밀멸사 광신도 새끼들은 전부 없애 버릴 거고.
그게 내가 스페인의 도시에서 죽어 가는 소년의 손을 잡고 결심한 것이다.
* * *
-당신들의 일은 안타깝지만, 우리가 도울 건 없소.
커다란 모니터의 안쪽. 그곳에는 중국 전통의 도사 복장을 한 이가 앉아 있었다.
황색 도복을 입은 그는 기괴하게도 얼굴이 검은 일렁거림으로 뒤덮여 있어 보이지가 않았다.
-얼마나 허술했으면 민간인에게 정체를 들켰지? 멀린의 이름이 부끄럽군.
또 다른 모니터에서는 고대의 마법사 같은 로브를 입은 자가 있었다.
그의 얼굴은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어서 전혀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원탁의 기사들]이겠지. 그렇지 않나?
호퍼 넬슨. 그가 또 다른 화면에서 담배를 피면서 말했다.
처음 말한 자는 [곤륜산].
그다음으로 말한 이가 [세피로트 조하르].
거기에 마지막으로 [골든 호라이즌]의 호퍼 넬슨까지.
세 개의 모니터 앞에 앉은 이는 고대의 드루이드 같은 복장을 한 늙은 노인이었다.
이 노인이 바로 영국에서 발견된 비밀 결사 [호수의 여명회]의 주인인 그랜드 마스터.
그가 지금 다른 3개의 세력을 소집한 것이다.
모두가 [골든 호라이즌]이 인정한,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비밀결사들이다.
이들 외에도 이들에 견줄 만한 조직은 몇 개 더 존재하긴 하지만, 이들보다 반 수 아래의 조직들일 뿐.
스페인에서 일을 터트린 호세 멘도사가 속했던 [영생의 뱀] 같은 곳들이 그런 자들이었다.
“원탁의 기사 놈들 덕분에 정부 내의 우리 부하들도 숙청당했다는 점은 인정하지.”
-그러게 미적거리지 말라고 했잖나?
“네놈들도 불가능한 걸 우리에게 요구할 생각이냐? [세피로트 조하르] 네놈들도 [황금장미회]와 싸우는 주제에…….”
-그래도 너희들처럼 허술하지는 않아.
[세피로트 조하르]의 수장이 영상 너머에서 비웃었다.
-어쨌든 우리는 너희를 돕지 않을 거다. [곤륜산]도 그렇지 않나?
-그렇소. 우리도 도움을 줄 이유는 없지.
“나는 도움을 바라는 게 아니다, 이 머저리들아. 이 정도 일은 조금 귀찮고 짜증나는 일에 불과하니까.”
노인은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렇다면 왜 회의를 소집했지?
호퍼 넬슨이 여상한 어조로 되묻는다.
“이대로 저놈을 내버려 둘 건가? 엄지척이라는 놈이 어떤 성좌의 가호를 받는지 알 수 없지만, 내버려 둔다면 우리의 승천을 방해할 것이다.”
-아하. 그쪽 이야기로군?
[세피로트 조하르]의 대표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그가 흥미를 가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요? 북극의 차원 방벽 건설 현장은 건드릴 수 없을 텐데. 이미 어마어마한 인력이 들어차 있소. 테러를 일으켜 봤자야. 그곳에 있는 놈들에게 압살당하고 말 것이오. 비효율적이고 쓸모도 없소이다.
[곤륜산]의 대표인 얼굴 없는 도사의 말이 끝나자 호퍼 넬슨이 웃어 보였다.
-알 것 같군. 당신은 엄지척을 불러들일 함정을 파자는 제안을 할 생각인가?
“그렇다.”
-흠……. 우리 [골든 호라이즌]은 그 일에 도움을 줄 수 없겠군.
“왜냐?”
-엄지척과는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으니까. 미국의 뉴저지 일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받았지.
“그렇다면 네놈과는 볼일이 없다.”
노인이 손을 흔든다.
그러자, [골든 호라이즌]의 모니터 영상이 꺼졌다.
접속을 끊어 버린 것이다.
“다른 둘은 어떻지?”
-[곤륜산]은 아직 지켜보겠소. 우리는 어차피 당신들과 다르니까.
[곤륜산]의 말이 끝나고, 이번에는 [곤륜산] 측에서 통신을 끊어 영상이 사라졌다.
“머저리들 같으니.”
-글쎄. 어느 쪽이 머저리겠나? 자네들의 복수에 우리를 휘말리게 하지 말게나.
“그래서. 협조하지 않을 거냐?”
-우리도 그다지 협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는걸. 적절한 대가를 내놓는다면 그만큼의 도움을 줄 수는 있지.
[호수의 여명회]를 이끄는 노인은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모니터 너머를 응시했다.
“좋다. 니뮤에의 마법서 절반을 복사해 주지.”
니뮤에.
멀린의 연인이며 제자인 대마법사.
그리고 [호수의 여인]이라고 불리는 요정이기도 한 존재.
본래부터 필멸자가 아닌 불멸자였으며, 이후 멀린을 사랑하여 그를 독점하고자 바위에 봉인한 여인.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녀는 성좌이다. 성좌인 그녀의 마법서는 그야말로 초월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진짜인가? 그렇게 복수를 하고 싶었나?
믿기지 않는다는 어조로 [세피로트 조하르]의 로브 사내가 되물었다.
“단순한 복수가 아니다. 성좌께서 녀석의 목을 원하신다.”
그러나 노인은 침착했다. 그리고 무거운 사실을 말해 주었다.
[호수의 여명회]가 모시는 성좌가 엄지척의 생명을 가져오라 명했다는 것!
-[아발론의 여왕]께서? 하……. 이거 재미있군. 너희들은 참 재미있단 말이야…….
성좌 [아발론의 여왕].
이 역시 아서왕의 전설에 나오는 존재였다.
이상향인 섬나라 아발론을 통치하는 강대한 마력과 힘을 가진 존재!
이들 [호수의 여명회]는 그런데 어째서 [호수의 여인]이 아닌 [아발론의 여왕]을 섬기는 것일까?
“닥쳐라. 감히 우리의 일을 네놈들의 유희로 삼다니…….”
-크흐흐흐흐. 그거야 우리의 마음이지. 좋다. 도와주지. 그래서 계획은 어떻지?
“대의식을 치르는 척하겠다. 놈이 공격해 올 것은 뻔한 일이니…….”
-준비하고 있다가 잡는다. 이건가? 간단하지만 효과적이군. 동의하지.
“좋다. 그렇다면…….”
두 세력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 * *
“헤르메스의 발걸음은 좋긴 좋은데, 이게 참……. 애매하게 좋네.”
북극.
얼어붙은 빙하의 세계.
그리고 지금은 대규모의 공사가 이루어지는 장소.
그런 장소의 한쪽에 서서 나는 투덜거리고 있다.
[주군. 어디서 그런 소리 하시면 뺨 맞습니다.]
“배가 부른 투정인 건 아는데……. 이게 나 혼자만 왕복해서 그런가, 좀 그래.”
헤르메스의 발걸음.
공간을 넘어서 이동 가능. 거리가 멀어질수록 마력이 더 많이 들지만, 영약을 제작해서 배 터지게 먹었겠다.
거기다 [에너지 드레인]에 [북명신공] 효과를 이용해서 이제는 마력과 내공이 극한에 이른 나에게 큰 문제는 없다.
고로 어디든지 갈수 있다 이거지. 지금 내 능력이면 달로도 이동 가능할걸?
잘하면 화성까지도 갈 수 있을지도.
화성까지의 거리가 6,300만 km 정도 된다니까……. 좌표만 알면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내 마력&내공은 초월적인 상태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런 강력한 힘이 샘솟아도, 헤르메스의 발걸음이 가진 제한을 넘길 수는 없었다.
이 스킬은 1인용이기 때문.
나 혼자만 돌아다닐 수가 있다.
척량이야 내 소환수니까 가능하지만, 인간은 불가능.
권속들의 경우에는 내가 직접 [소환]할 수 있긴 하니까 괜찮긴 하다.
결국 무척이가 내 권속이 된다면 모를까, 그러지 않으면 데리고 다닐 수…….
잠깐.
나 성좌잖아.
그렇지? 나 성좌야. 아아! 그렇구나! 나 성좌구나!
[오오……. 옳습니다, 주군! 좋은 생각이시군요!]
그래, 척량아! 나 성좌야!
무척이나 다른 팀원들을 [사도]로 삼거나… 스킬이나 아이템을 [하사]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