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5화
파멸의 시계는 이제 조금 유예되었을 뿐.
그러나 인간은 어두운 미래보다는 밝은 지금을 보길 원했다.
시간을 놓치면 놓칠수록 더욱 위험해진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면서도 인간은 변함이 없었다.
어쩔 수 없으리라.
파멸이 다가오기 전까지 인류 전체를 경각시킬 정도의 일은 벌어지지 않으니까.
뉴저지의 일을 만약 엄지척이 막지 않았다면 경각심을 가졌을 수도 있겠지만…….
그걸 막지 않았다면 파멸의 시계가 더 빠르게 돌아갔을 터였다.
“믿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할아버님.”
“그럼?”
“사실입니다. 정비가 누나도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걸 아실 텐데요.”
“정비가 그 아이가 허튼 망상에 빠져있다는 건 내 알고 있었지. 흐음……. 하지만 여전히 믿기가 어렵구나.”
“어차피 할아버님을 설득하거나 납득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허면?”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니, 방해하지 말아 주시면 됩니다.”
“방해한다면 네놈이 어쩔 거냐?”
정수기가 다시금 끼어들었다.
정지한은 무표정하게 정수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처리할 겁니다.”
“이 새끼가… 감히 할아버님 앞에서…….”
“허허헛. 아주 냉정하구나.”
정만득은 능글맞게 웃어 보인다.
왜일까.
손주들의 이름을 미래에 받을 능력대로 지은 그가, 이 멸망을 정말로 예측하지 못한 걸까?
몇 번을 회귀했지만 정만득의 속은 극히 알기 어렵다.
하지만 왜인지 지금 자신의 손주들을 시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할아버님. 세계가 멀쩡해야, 할아버님의 제국도 존재할 수 있는 겁니다. 골든 호라이즌 쪽과 손을 잡은 게 아니라면 제 말을 명심하셔야 할 겁니다.”
정지한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가는 게냐?”
“예.”
“그러면 SL 그룹은 내가 주워 가겠다.”
“그리하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주저 없이 방을 나선다.
“허허헛. 어느새 저리 컸는지…….”
“그러면 할아버님. SL 쪽을 흡수하는 공작을 진행하겠습니다.”
“그리하거라. 나가 봐.”
“예.”
정수기가 방을 나선다. 정만득은 홀로 앉아서 입을 열었다.
“그래, 내 손주가 해낼 것 같소?”
[후후후후. 미래는 혼돈 속에 있다. 정해진 미래 따위가 있을까 보냐.]
정만득의 그림자. 그 안에서부터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긴. 그런 시대지……. 위대한 성좌들끼리 서로 경쟁하거늘 정해진 운명 따위가 있을까.”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이 늙은이가 뭘 어떻게 하겠소? 하던 일이나 해야지.”
[크크큭. 그래야지. 그래야 ‘철심의 상인’이겠지.]
정만득.
직업 ‘철심의 상인’ 소유자.
모든 것을 거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고, 결코 손해 보지 않는다.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권능의 조각이었다.
그는 일찍이 세계의 파멸을 알아냈고, 그 스스로의 생존과 미래를 위한 거래를 진행한 바가 있었다.
그것은 몇 번이고 회귀를 반복한 정지한도 모르는 비밀 중의 비밀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어차피 정만득 회장은 전면에 나서서 무언가를 할 생각이 전혀 없으므로.
이미 그의 거래는 예전에 끝냈으니까.
* * *
“어렵네.”
무신의 수련 공간은 시간이 다르게 흐르기 때문에, 매일 한 번은 여기에 들어온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심검]을 수련 중에 있다.
[심원검계]의 경지에 도달한다면 성좌도 베어 죽일 수 있다고 하는데, 이걸 사용하려면 이미 성좌여야 한다는 모순적인 경지.
애초에 성좌가 성좌를 못 죽일 것도 없잖아. 상대 성좌보다 강하냐 아니냐의 문제가 있을 뿐이니까.
[검을 제대로 수련하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나를 지켜보고 있던 척량의 의견.
그 말이 옳긴 했다.
하긴, 내가 검을 제대로 수련한 건 아니지. 따봉으로 스킬을 이것저것 익히면서 여기까지 왔던 거니까.
무공을 주력 공격 기술로 삼았고, 심지어는 무신의 가르침까지 받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무공이라는 것을 제대로 수련했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긴 하죠.
[기초부터 다시 해 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그럴 시간이 될까…….”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심원검계’에 닿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거라면 수련을 중단하시고 따봉으로 다른 권능을 구입하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그게 맞는 말이라서 고민이 되는걸…….”
기초인가.
이럴 때는 역시 우수한 스승님을 부르는 것이 정답이겠지.
“무신의 가르침 구입!”
무신의 가르침을 따봉으로 사면 싸더라.
옛날에는 비싸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싸다고 느끼는 것이, 이게 참 격세지감 아닐까?
“오……. 불렀냐.”
기척도, 그리고 빛이 번쩍인다든가 하는 것도 없이 내 앞에 무신이 나타났다. 전과 같은 복장에 같은 모습을 한 그.
그러나.
성좌가 된 지금 그를 본 나는 절로 위기감을 느끼게 되고 말았다.
이 존재가 바로 무신…….
“어떻게 성좌가 되긴 됐다 야?”
“그렇게 되긴 했죠.”
공손하게 대답했다.
따지고 보면 이분이 내 스승님 아니냐?
무림에서 사승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과 같다더라.
그럼 여기가 무림인가?
사실 무림보다 더한 성좌 랜드!
“네 방송 지켜보다가 오랜만에 박장대소했지 뭐냐.”
“즐거우셨다니 다행이네요.”
이 불초 제자가 무공을 펑펑 써가면서 뛰어다니는 것을 보면서 흡족해서 박수를 치셨을 것을 생각하니 내 마음이 절로 흥겨워진다.
상대는 무공의 종주, 무의 근원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저 [심원검계] 좀 잘 가르쳐 주시면 참으로 좋겠습니다만. 헤헷!
“그래서, 아까 하던 이야기는 다 들었어. 네 권속이 한 이야기가 맞아,”
“역시 그랬군요.”
“혹시가 역시고, 역시가 역시인 거다. 네 녀석은 애초에 기초가 없어. 그걸 경외의 권능으로 억지로 이어 붙인 거니까. 맨 처음에 나를 불러냈을 때 이야기해 준 것이잖느냐?”
“기초가 없으면 역시 모래 위에 성 쌓기인가…….”
“그나마 네놈의 권능 때문에 모래를 어느 정도 굳혀서 성 비슷한 거라도 만든 거지. 아니었으면 진즉 주화입마로 뒈졌을걸? 지금은 성좌씩이나 되었으니 주화입마 같은 게 오지는 않겠지만.”
아. 역시 편하다, 성좌. 성좌는 불멸불사의 존재니까.
사실 지금의 나는 육체를 잃어도 생존한다.
왜냐고? 성좌라서.
성좌에게 육체란 결국 단말기에 불과하다. 그 본체는 영혼이고, 그것은 불멸하여 언제든지 부활할 수 있다.
바퀴벌레는 상대도 안 된다.
물론 지금의 내 육체가 죽어 버리면 몹시 곤란해지니까 주의해야 하긴 해.
몸이 죽어 버리면, 지구라고 하는 세계에 간섭하는 것 자체에 제약이 생겨 버리니까.
내가 성좌임에도 맘껏 돌아다니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두 가지.
애초에 지구에서 태어난 생명체고, 지구 출신의 성좌라서.
즉, 육체를 간수하는 한 성좌로서의 힘을 마음껏 쓸 수 있다는 것.
문제는 새끼 성좌라서 지금의 힘으로는 지구를 구하기가 빡세다는 거지만.
그래서 필요하다.
[심원검계].
앞으로 차원 방벽을 만들려는 나를 방해하려는 놈들이 우후죽순으로 튀어나올 거고, 그런 놈들을 반토막 내줄 능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
100억 따봉 내고 사는 방법도 있지만 지구 멸망까지 얼마나 남았다고 벌써부터 100억 따봉을 지출하겠냐?
아껴야 잘산다고.
뻑!
“컥!”
“잡념이 많아.”
머리에 통증이 뒤늦게 느껴졌다.
어느샌가 내 앞에 나타난 무신의 손바닥이 내 머리통을 후려친 거다.
언제?
“잘 들어라. 무의 본질은 결국 싸움이다. 하지만 이성적인 생각은 싸움의 순간에서 너무 느리지. 무의식과 본능이 무(武)를 이끌어야만 하는 법.”
“으윽.”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武)를 본능과 무의식에 때려박아야 해. 습관처럼. 혹은 숨 쉬는 것처럼. 그게 바로 기초다. 네가 기초만 튼실했어도, 방금 전의 내 공격을 막거나 최소한 피했을걸?”
“꼭 때리시면서 가르치셔야 했나 싶은데요.”
“원래 무공은 몸으로 익히는 거야. 맞으면서 배우는 거지. 꼰대 같겠지만 사실이다.”
이게 그 유명한 7080 교육 방식이구나.
무공이라 교육도 좀 올드하구만. 학생 인권은 생각도 안 하고.
“어쨌든 그런 이유로. 네가 [심원검계]를 익히고 싶다면 검법의 기초부터 수련해야지. 일단 내공의 기초는 일전 가르쳐 준 이후 상당히 빠르게 경지에 이르렀으니 됐다. 외공도 문제는 없고. 결국 검법 수련이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검법을 수련할게요.”
혼원건곤신공에는 장법, 권법, 각법, 검법 등등 여러 가지가 전부 혼합되어 있다.
괜히 따봉을 무식하게 잡아먹는 무공이 아닌 것.
“너. 혼원건곤검법 수련하려고 그러는 거지?”
“어… 그럴 생각이었는데요.”
“그게 무슨 기초야, 임마.”
“그… 그런가요?”
“창의 기본은 란나찰攔拿扎이라고 하지. 그러면 검은 어떨 것 같냐?”
“란나찰……이 뭔지도 모르는데요?”
잠시 나와 무신 사이에서 차가운 공기가 흘렀다.
“에라……. 이런 놈이 심검을 쓰고 자빠졌어?”
훙!
이번에는 보였다!
회피!
나는 극적으로 무신의 손을 피해냈다.
“오… 피했어? 역시 천무지체!”
“천무지체하고 무슨 상관인가요, 이게?”
“네 몸의 감각이 아까의 공격을 무의식에 때려박아서 본능적으로 피하게 만든 거야. 천무지체니까 가능한 거지. 이래서 천무지체는 때려야 제 맛이야. 때리면 때릴수록 강해지니까.”
그… 그랬던 거야? 내 몸뚱이, 그런 기능이 있었어!?
“어쨌든. 란나찰은 창술의 기본이다. 란이란 밀어내고, 나는 당기며, 찰은 찌른다는 뜻이지.”
오……. 그런 깊은 뜻이!
밀어내고, 당기며, 찌른다.
“검술은 다르다. 절자간(切刺干)이 기본이라고 할 수 있지.”
“절자간이요? 뜻만 보면 그거… 베기, 찌르기, 막기. 아닌가요?”
끊을 절.
찌를 자.
막을 간.
이건 뭐… 엄청나게 심플한데?
“기초가 왜 기초겠냐. 심플하니까 기초지.”
“그…건 그렇네요.”
“자. 그러면 너는 이제부터…….”
무신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서 나에게 휙하고 던져 주었다.
받아서 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육합검법(六合劍法)?”
이거… 정말 기초 검법이네?
“육합검법은 여섯 방위를 공격하고 방어하는 검법이다. 정말로 기초 검법 중의 하나로, 무의 종주인 내가 인정하는 생기초 검법이지.”
“그, 그렇군요.”
“그거 익혀. 그리고 익히는 방법도 아주 간단해.”
“어떻게 하면 되죠?”
여기서부터가 진짜다.
무신의 가르침! 천마신공 같은 그 가르침이여, 오라!
“거기에 초식이라고 해 봤자 열두 개밖에 안 되거든. 공격 초식 여섯 개에 방어 초식이 여섯 개야. 각각의 초식을 매일 1만 번씩 해라. 다 하면 12만 번이겠군.”
“넷?”
무… 무슨!? 1만 번!?
“공격 만 번, 방어 만 번. 그렇게 번갈아 가면서 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기초가 네놈의 몸에 저절로 들어박히겠지. 그게 천무지체니까.”
아니, 이게 무슨 찻숟가락으로 터널 파는 소리야?
찻숟가락으로 산을 파다 보면 터널이 됩니다? 50년 전통 공사?
하지만 반론을 꺼낼 수 없다.
왜냐? 이 소리를 하는 게 동네 렉카형이 아니라 무신이니까.
“알겠습니다. 하죠. 하루 12만 번 도전합니다!”
고민은 짧았다.
“보통 인간이라면 만 번은커녕 천 번째쯤에 탈진하겠지만, 네 녀석은 성좌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러면 열심히 해라.”
무신은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책을 펼쳤다. 좋아. 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