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5화
“물러서라!”
“도망쳐!”
“어서 피해!”
광신도 무리가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
저 정도 타격을 받으면, 누구라도 도망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나저나 저쪽의 보스는 처리됐나?
[알 수 없습니다.]
하긴. 누가 보스인지도 모르겠는데, 뭘.
어쨌든 막아 내긴 했네.
사실 지금 상태면 역으로 저들을 모두 토벌하는 게 가능할 것 같다.
거의 궤멸 아닌가, 저거?
“후… 막긴 했네요.”
어쨌든 우리는 승리했다. 그리고 적들의 공세를 막아냈다.
“하핫. 막긴 했죠! 하지마안~ 아직 끝난 건 아니라고요. 저쪽도 이제는 생존 문제가 되었으니까. 엄지 군. 곧 재미난 선택을 해야 할 겁니다.”
“네?”
“두 개의 세력이 약화되었지만, 완전히 몰살한 건 아니잖아요? 저들도 이제 자신들이 살 다른 방법을 궁리하겠죠. 마음 단단히 먹어 두는 게 좋을 거예요.”
“그게 무슨…….”
무슨 말인지 물어보려는 순간.
리블은 바이크에서 벌떡 일어나 스스로 지상을 향해 다이빙했다.
“미친!”
막 그를 잡으려고 염혼염동을 쓰려는 순간.
그의 어깨에서부터 불길한 어둠이 생겨나 날개처럼 펼쳐지며 활강해 지상으로 향한다.
그걸 보고는 멈칫했다.
어쩐지 냅다 뛰어내리더라니.
날 수 있는 능력도 있었던 건가?
자세히 보면 저 날개… 날개 같은 게 아니라 망령 계열 언데드를 이용한 거 같은데 진짜 재주도 많다.
“쯧.”
혀를 찼다.
재미난 선택을 하게 될 거라고?
뭘 또 의미심장한 소리만 하고 가는 거야. 좀 가르쳐 주고 가든가.
[주군. 우선은 팀원들과 합류하시지요.]
후… 그러자고.
나는 잠시 지상의 시체들을 보았다.
저들 모두가 본래부터 저런 자들은 아니었을 텐데…….
이 숲에서 [선택]한 끝에 저렇게 된 건가.
입맛이 쓰군.
그때 동료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 *
“자네들이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이 벌어질 뻔했군. 정말 고맙네.”
백탄의 마카우.
그를 본 순간. 나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저게… 저럴 수 있나? 아니. 왜 저렇게까지…….
“허허헛. 그렇게 볼 필요 없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자라나니까. 식물이라는 게 본시 그러하지 않던가?”
그는 머리와 흉부만 남아 있다.
그것도 깨끗하게 남은 게 아닌 상황.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옆구리까지 사선으로 그어지듯이 몸이 사라져 있었다.
팔과 다리는 당연히 없고.
머리와 몸뚱이, 그것도 반절이 없는 채로 그는 나무뿌리가 엮어져 만든 의자에 놓여져 있었다.
그 옆에는 드루이드 위저드인 베르나데 이트가 서서 정지한과 나를 보고 있다.
“우선,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네. 정말 고마우이.”
그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다.
“저희의 목적을 위해서일 뿐. 개의치 마십시오.”
정지한은 냉정침착한 얼굴로 답했다.
이 인간… 저런 사람에게도 저런 철면이라니.
가끔 감정이 거세된 양반이 아닌가 싶을 지경.
“자네들의 강함은 처음 본 순간 알았지. 죽음과 닮은 저 화신체(化神體)를 동료로 데리고 다니니……. 허허헛. 그렇다지만 그 정도로 강할 줄이야! 그간 살면서 이런저런 것을 많이 보아 왔지만. 제법 놀랐지 뭔가?”
리블을 말하는 것 같다.
사실 리블의 활약은 나도 놀랐다.
시체 폭발이 그 정도 위력을 가지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그리고 그런 리블의 정체를 확실히 꿰뚫어 보다니.
백탄의 마카우.
이 사람은 확실히 보통 헌터는 아니었다.
“우리를 돕자고 온 분들에게 실례할 수는 없지. 그래서 제법 힘을 써 본 것일세. 자네들이라면 우리를 구원해 줄 것 같아서 한 일일 뿐.”
“당신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정지한은 그렇게 짧게 말했다.
그리고 백탄의 마카우는 빙그레 웃었다.
나무가 움직여 웃는 얼굴이 되는 것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참 미묘해지는군.
“그렇다면 이제 본론을 말씀해 주시죠. 저와 엄지척 헌터만 따로 부른 이유가 있지 않으십니까?”
“오오…. 물론 그래야지.”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다.
“이 몸은 백탄의 마카우라고 불린다고 소개했었지. 하지만 알다시피 본명은 아니네. 그냥 별명이지. 이 늙은이의 클래스는 [정령을 섬기는 자]라네. 드루이드로서 일로정진하다 보면 얻게 되는 상위 직업인 셈이지.”
그런 것이 있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어 본 적이 있다.
“우리를 도와준 자네들에게 보답하고자 이 늙은이가 모시고 있는 분께 공양 의식을 해 두었지.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분께서 자네들을 직접 치하하겠다고 하지 뭔가?”
직접 치하한다고?
정지한의 철가면 같은 표정도 미세하게 변화했다.
눈썹이 조금 올라간 것! 그것만으로도 인상이 확 바뀐다.
“잠시만 기다려 주겠나? 베르나데. 부탁 좀 하겠네.”
베르나데가 고개를 끄덕이고 들고 있던 나무 지팡이를 마카우의 아래쪽에 놓는다.
바스라진 흉부의 바로 아래.
그러자.
나무 지팡이에서부터 줄기가 자라나 마카우의 몸으로 파고든다.
그것은 이내 생명력으로 충만한 녹광의 에너지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마카우의 얼굴이 변했다.
본래도 나무껍질 같았지만, 지금은 눈처럼 보이는 자리에서 꽃이 피어난다.
기괴해 보이는 그 모습은 이질적이지만 일견 신성해 보이기도 했다.
[시간의 조각과 경외의 총아가 여기에 있구나.]
그리고.
마카우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것은 듣기만 해도 가슴 한편이 포근해지는 느낌의 여성의 목소리.
아름다우면서도 심신이 이완되어 편안해진다.
그 순간 뼈저리게 깨달았다.
눈앞의 목소리는 신적인 존재, 성좌의 것이라는 것을.
일찍이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기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余)의 인지(認知)에서 벗어난 시간의 조각이여. 너에게는 이것을 주마.]
우리와 마카우 사이에 작은 녹색의 반지가 생겼다.
그것이 정지한의 앞으로 나아간다.
“거절하지 않고 받겠다.”
정지한은 그리 말하고서 반지를 받았다. 기묘한 기분이 든다. 뭔가… 이상한데…….
[그리고 경외의 총아.]
그가 나를 바라본다.
[얼마 전부터 내 너를 지켜보고 있었나니. 인과율에 맞는 조언을 해 주겠노라.]
엥? 조언이라굽쇼? 아이템이 아니고. 조언이요?
[이곳은 두 성좌가 서로 싸우다 소멸하며 남은 조각이 뒤얽힌 곳. 선택(選擇)의 신과 녹음(綠陰)의 신이 하나 되어 잠들어 있느니라. 뒤섞여 잠든 것을 찾아낸다면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선택의 신. 그리고 녹음의 신.
두 신이 하나 되어 잠들어 있다?
[앞으로도 지켜보겠노라.]
그 말을 끝으로. 신을 마주하는 압박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게 대체…….
“허허헛. 이리도 영광될 수 있나. 우리의 어머니께서 이 늙은이의 몸에 강림하시다니.”
마카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랬다.
일어섰다.
머리와 흉부 일부만 남았던 그의 몸이 어느샌가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던 것.
식물의 형태인 것은 변함이 없지만 사지가 멀쩡해진 것은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되돌아와!?
[성좌의 개입이군요. 하지만 누구인지, 왜 개입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선신 계열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추측됩니다만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이겠지.
그러면 물어보자.
“마카우 님.”
“말해 보시게나.”
“방금 그분은 대체…….”
“이 늙은이가 모시고 계신 분이지. 쉽게 하자면… 정령신(精靈神)이시지. 성좌들 중에서도 가장 드높고 존귀한 분들 중의 하나이신 분이라네.”
[정령신……. 격이 아주 높은 성좌입니다. 물의 신이나 불의 신 같은 존재도 정령신의 하위에 속해 있다고 알려져 있는, 모든 자연적인 것의 근원적 존재입니다! 어찌 이런…….]
어마어마한 대신이었단 말이야?
아니, 그런 신이 갑자기 왜? 그리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고?
[천신이 주시하는 자 타이틀을 얻으셨을 때 이미 주군을 주시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음.
그럴지도 모르겠는걸.
“다시 한번 고맙다고 말하고 싶네. 전리품은 우리 쪽에서 정리해서 건네줄 테니 푹 쉬시게나.”
그런 마카우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나와 정지한은 천막을 나섰다. 그리고 곧바로 텔레파시 마법으로 정지한과 나를 연결했다.
-정지한 대표님.
-예. 말씀하시죠.
-정령신이 대체 왜 우리를 콕 집어서 부른 걸까요?
-성좌들의 행동은 우리가 섣부르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일단 그 성좌가 저 마카우라는 노인을 버린 것은 아니군요.
-저분이 그거죠? 성좌의 대전사. 성좌의 지상 대리인. 사도.
-예. 맞습니다. 하지만 몬스터화되고서도 저렇게 연결이 유지되었을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정지한 대표님도 몰랐던 일인가요?
-제가 보는 미래도 완벽하게 일치하는 건 아닙니다.
정지한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렇다는 건, 이 사람을 완전히 맹신하면 안 된다는 의미.
때때로 내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건가. 어렵구나.
-그러면 저들을 구원하는 방법은…….
-저 역시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 봐야겠구나.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지는 않을 테지만.
반드시, 저들을 제대로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겠다.
* * *
엄지척 일행이 바위산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이.
도주를 감행했던 이들은 놀라운 일을 벌이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인다.
그리고 그런 상대를 잡아먹는다.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을 하며 충돌한 것.
실체를 가진 안개. 번개로 이루어진 칼. 증오가 형상화된 채찍. 굴절되는 빛의 방패.
여러 가지 힘과 온갖 스킬들이 충돌했다.
그중에서 가장 압권인 것은 바로 이 존재였다.
“우드득. 우득. 쩝쩝. 크흐… 신께서 허락하셨다! 모두 먹어 치워라!”
“신께서 허하셨으니! 우리는 모두 포식하리라!”
“으아아아아! 신이시여어어!”
그것은 마치 키메라처럼 머리가 세 개였다.
용의 머리, 사자의 머리, 거기에 독수리의 머리를 가졌다.
머리 하나가 사람 하나만 하고, 그 몸도 십여 미터가 넘는 거체.
그 세 개의 머리가 각기 떠들어 대는데, 몸은 사자의 몸을 했고 등에는 사람의 상반신만이 자라나 있다.
그 상반신도 체구에 어울리는 거대한 크기라서 거인의 상반신처럼 보였다.
몸체에는 나무줄기가 자라나 있고, 꼬리 역시 나무 덩굴로 이루어져 있다.
광신도 그룹의 리더.
케인.
그리고 광신도답다고 해야 할까?
괴물 그 자체로 변이한 것과 다르게, 그의 전신은 성스러운 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성광을 몸에 두르고 있는 그에게 저항하는 이들의 스킬은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다.
상대의 공격을 몸으로 버티고는 접근해서 물어 죽이고 씹어 삼키거나, 3개의 괴물 머리가 각기 다른 숨결을 내뿜어 공격했다.
거기에 거인의 상반신은 양손으로 신성법을 사용해 공격한다.
신의 철퇴와 신이 내려주는 신성한 망치가 손에 생겨나 그대로 던져지고.
그 공격에 머리가 박살나고, 뼈가 부러지며 적들이 쓰러진다.
본래라면 빌리 갤리거가 그를 막았겠지만, 지금은 빌리 갤리거가 사망했기에 그를 막을 자가 없어진 것이다.
이윽고 살아남아 도망친 소수를 제외하고는 포식자 그룹 대부분이 광신도 그룹에 잡혔다.
일부는 그 자리에서 먹혔고, 일부는 산 채로 묶여 끌려간다.
광신도 그룹은 이들을 인신 공양하여 신의 힘을 다시금 내려 받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신이 진정으로 눈을 뜨는 날.
이 던전은 깨어지고, 그들 역시 현세에 나가게 될 것이다.
“외부인 놈들… 이번에는 당했지만 다음에는 너희들을 신께 바칠 것이다.”
거인의 상반신, 인간의 얼굴로 케인은 중얼거린다.
오늘 크나큰 피해를 입었으나, 아직 그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