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화
“이곳은 [선택의 시련]을 받는 던전이라네.”
선택의 시련?
“자네들도 정보를 어느 정도 가지고 왔겠지? 하지만 이것들은 모를 게야. 이 던전은 몇 번이나 [선택]을 강요하거든.”
“어떤 [선택]입니까?”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 신의 권속이 될 것인가. 혹은 스스로 괴물이 될 것인가. 세 개 중 하나는 선택해야만 한다네. 쉽지?”
노인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하지만 그 내용은 무거웠다.
“이 던전에서 죽으면, [변이체]가 되어 살아남을 것인가 혹은 그대로 죽을 것인가를 선택해야 해. 거기까지는 알 테고……. 그다음부터 점점 더 재미있어지지. 우리라고 해서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건 아닐세. 그런데 먹을 게 그다지 많지 않아. 농작물이 제대로 자라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무엇을 먹어야겠나?”
아!
[섭식 회복이군요, 주군.]
그래. 그런 특성이 왜 달려 있었나 했더니…….
“홀홀. 다들 눈치챈 모양이군. 그래. 몬스터를 잡아먹는 게지. 그래도 몬스터는 제법 많으니까. 문제는 몬스터를 잡아먹을수록 변이가 더욱 심화된다는 거야. 내 몸을 보게. 이미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
“그리고 만약 인간을 먹어 보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한 놈이 우리 중에 없었을 것 같나?”
이미 한번 상대했던 자들이 떠올랐다.
노인의 말대로.
그는 이미 인간으로서의 형상을 잃었다.
베르나데는 그래도 아직은 인간처럼 보이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신화 속의 엔트 같은 이종족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는 그래도 최후의 인간성을 지키려는 자들일세. 적어도 사람을 먹지는 않고, 이곳에서 구원을 기다리고 있지.”
“구원……이라고요?”
“그래. 구원. 우리 모두의 올바른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
노인의 마지막 말에 누군가 내 머리를 망치로 후려치는 기분이 들었다.
“자네들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지 않겠는가?”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뒤틀리고 변이된 지성체들이 바라는 구원]
난이도 : 던전 4성 – 최상급
[뒤틀린 성좌의 숲]에 귀속된 이들에게 구원을 주어라.
보상 : 레전드 스킬 교환권
추가 보상 : ???
말도 안 되는 퀘스트가 생겼다.
* * *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퀘스트다.’
정지한은 눈앞의 퀘스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것 역시 엄지척이라는 특이점 때문에 생긴 것.
‘이들에게 구원을 준다라……. 던전의 소멸이 구원이 아니라는 건가. 아니면, 과거에는 이 퀘스트를 받지 못했기에 내가 알지 못하는 건가.’
과거 정지한은 이 던전에 들어와 [뒤틀린 성좌의 조각]을 회수했다.
그것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꼭 필요한 물건이다.
리블과 같이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시간을 되감을 때마다 같이 오는 동료들도 제법 달랐다.
하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피해를 입지 않고 순조롭게 [뒤틀린 성좌의 조각]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하려고 했으나 변수가 생겨났다.
[타마tama]의 퀘스트가 생긴 것.
여기서 ‘타마’란 이 생존자 그룹의 이름이다.
타마란 필리핀어로 ‘올바르다’라는 뜻.
이쪽 그룹 사람들은 사람을 먹지 않고 그래도 인간으로서 살아왔던 흔적들을 이어 나가고 있다.
그래서 ‘올바르다’, 즉 ‘타마’인 것.
그런 그들이 준 퀘스트의 내용은 상당히 애매모호했다.
구원.
그게 무엇을 뜻하는 걸까.
‘특이점의 발생을 따라가야 하는가? 아니면…….’
정지한은 엄지척과 이 던전에 들어온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엄지척은 그때마다 저들을 돕기 위해서 노력했었다.
그 결과는 전부 실패였었지만.
‘우선은 계획대로 진행한다.’
공략을 짜는 것 자체는 익숙했다.
리블까지 있으니 더욱 손쉽겠지.
* * *
머릿속이 복~잡하다.
[저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정지한이 이곳으로 온 것은 납득이 갑니다.]
확실히, 예지 능력이라는 게 대단하긴 해.
여기 있는 사람들은 이 던전 유일의 아군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조오금 마음이 씁쓸하네.
[뒤틀리고 변이된 지성체]는 기본적으로 이 던전에서 죽은 사람들.
즉, 저들은 죽었다가 되살아났다고도 볼 수 있지만…….
던전에 강제로 묶여 있으니 사실상 언데드나 마찬가지다.
생동감 있는 언데드라고 할까?
그래서 지금 이 바위산 요새의 [타마tama]라는 집단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올바르게 죽기를 원한다.
올바른 죽음이란 별거 아니다.
던전이 소멸되고, 그들의 영혼도 해방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미 한번 죽은 사람들이니까.
사후에서도 고통받는 중이라고 할 수 있겠지.
[타마tama]의 보스인 백탄(白炭)의 마카우의 직업은 대자연의 주술사.
그 주술로 점을 쳐서, 그들에게 언젠가 구원이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걸 믿고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이 지옥 같은 공간에서.
그들은 구원을 하염없이 기다려 왔다.
허허…. 이거 참, 꿈자리 뒤숭숭할 이야기구만.
그나저나 대자연의 주술사라는 직업이 예지 능력이 있나 보네. 그럴 거면 이 던전에 들어오지를 말았어야지…….
팔짱을 낀 채로 한숨을 푹푹 쉬었다.
옆을 돌아보니 다른 동료들도 심각한 얼굴로 고민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여기는 바위산 요새 한쪽에 마련된 움막.
저들이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준 것이다.
우리의 임시 거처인 셈이다.
다만 저번의 동굴처럼 이것저것 꺼내지는 않았다.
눈치가 보이니까.
지금 이곳에서 현대 문물을 멋대로 써 봐라.
충분히 지옥처럼 살고 있는 저분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겠나.
저 사람들이라고 텔레비전을 모르겠나, 라디오를 모르겠나, 인스턴트 라면이 밤에 얼마나 맛있는지 모르겠나.
“그러면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지한.
그는 정장 슈트만 입고 있음에도 몸에 먼지 하나 묻지 않는 깔끔함을 유지 중이다.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시간계 능력이 청결에도 도움이 되는 거야?
“첫째. 이 던전 내에서 죽은 이들은 리스폰되지만 지금은 그게 ‘정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정지한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리스폰 정지.
즉, 던전 밖에서 온 우리가 여기에 머무는 동안에는 리스폰이 발생되지 않는다는 것.
그야 그렇겠지.
우리가 사냥을 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몬스터가 리스폰된다면, 어떻게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겠나?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린다.
“두 번째. 몬스터화되어서 이곳에 귀속되어 버린 이들의 숫자는 약 400여 명. 그중 이 바위산 요새의 집단인 [타마tama]에는 약 80명이 속해 있다고 합니다.”
정지한은 말을 멈추고 잘 듣고 있는지 우리를 둘러보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방어적인 전략을 하고 있지만, 다른 두 집단은 몹시 포악하고 공격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하죠. 한쪽은 인신 공양. 다른 한쪽은 순수하게 [섭식 회복]을 위해서 그렇게 싸우고 있다고 합니다.”
인신 공양.
이 바위산에 오를 적에 만난 광신도 녀석들이 그쪽이겠지.
그리고 우리가 숲 안에서 사냥할 때 공격해 온 놈들이 아마도 [섭식 회복]을 쓰고 있는 놈들일 테고.
양쪽 다 미친 새끼들이다.
어쩌면 저쪽이 더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인신 공양 쪽은 [뒤틀린 성좌의 조각]을 부활시켜 이 던전에서 벗어나 현세로 되돌아가는 게 목적이며 인신 공양된 존재는 리스폰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게 된다고요?”
“네. 단, 인신 공양을 받는 걸 봐서는 상대가 제대로 된 성좌는 아닐 겁니다. 상당한 악신이겠죠.”
그리 말하며 리블을 쓱 바라본다.
같은 악신 계열 리블은 너스레를 떨며 딴청을 피웠다.
정지한이 말을 이었다.
“다른 집단인 [섭식 회복]을 사용하는 자들은 [섭식 회복]의 특성을 이용, 레벨과 힘을 강화시켜 [뒤틀린 성좌의 조각]을 [섭식 회복]으로 먹어 치워 던전에서 나간다는 목적이라고 합니다.”
이야……. 둘 다 막장 집단이다.
“이쪽의 경우에는 [섭식 회복]에 의해서 먹힌다고 해도 리스폰되지만, 리스폰되었을 때 능력과 힘이 떨어지는 현상이 발견되었답니다.”
그나마 죽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섭식 회복] 쪽 놈들에게 당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
“이 두 집단이 가진 목적이 실제로 달성 가능한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이들 전원이 비정상적인 광기를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즉, 저희의 적이겠죠.”
그거야 그렇겠지.
인신 공양으로 쓰든 잡아먹든 대화의 여지는 없는 거니까.
정지한의 설명에 다들 침묵으로 일관한다.
“일단 정석적인 방법으로 간다면, 두 집단을 전부 처리하고 던전 보스에게 도전, 이후 던전 핵을 파괴한다는 방식으로 진행해야 됩니다만……. 상황상 그건 어려워 보이는군요.”
“저들의 규모가 생각 이상으로 크기 때문이죠?”
별하나가 불쑥 꺼낸 말.
하지만 우리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예. 그래서 저는……. 다른 방법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어떤 겁니까?”
“리블은 뛰어난 네크로맨서죠. 언데드를 대량으로 양산해서 게릴라전을 벌이는 사이 보스에 도전하려고 합니다.”
[정지한이 가진 능력으로 추론한 정보인가 봅니다. 성동격서의 계책이기도 하니, 승률은 높다고 생각됩니다.]
성동격서라.
동쪽에서 소리를 내서 소란을 피우고, 사실은 반대쪽인 서쪽에서 공격하는 기만전술.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다.
게다가.
이 던전이 소멸된다면 저들, [타마tama]의 사람들은 정말 올바른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걸까?
애초에 저들은 선량한 이들.
이 상황에서도 타인을 해하고 싶지 않아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바위산에 틀어박혀 끊임없이 이 지옥 속에서 싸우는 자들이지 않나?
저들이 죽게 내버려 둬야 하는 걸까?
왜일까.
목에 가시가 탁하고 박힌 기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저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지한이라고 딱히 거기까지 방법을 아는 것 같진 않다.
알았으면 리블을 이용한다는 이야기를 안 했겠지.
정지한의 방법은 쾌속.
그야말로 빠르게 던전을 소멸시키는 방법이었으니까.
“잠시만요.”
내가 손을 들었다.
다들 나를 본다.
“일단 이 던전에 대한 정보는 없는 상태잖아요? 그리고 우리가 아직 피해를 입은 것도 없고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최대한 던전 탐색을 하고, 숨겨진 것들까지 찾아낸 다음에 소멸을 시켰으면 해요.”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타마tama]의 사람들을 구할 수 있으면 구하고 싶으니까요.”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광신도들처럼 성좌에게 매달리며 인신 공양을 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강해지겠다고 다른 사람을 잡아먹는 놈들처럼 미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대로 아무 시도도 하지 않는 건 왠지 꿈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다.
“해 보는 데까지는 해 보자고요.”
“저는 찬성이에요.”
성광이 먼저 손을 들었다.
과연 ‘광신도’.
신관으로서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거겠지.
무척이는 뭔가 생각하는 눈치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을. 그것은 저의 신께서도 명하신 것. 아직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지척이 형의 말에 찬성해요.”
“저도 찬성입니다. 던전은 그 규모가 커질수록 숨겨진 것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단순히 이들을 돕는 것을 떠나서, 급히 일을 처리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의 보급은 지척 씨 덕분에 든든한 상태이니 가능하다고 봅니다.”
“음~ 저는 중립이요! 사실 둘 다 맞는 말 같아서.”
정지벽은 찬성. 거기에 별하나는 중립. 그러면 무척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무척이가 입을 연다.
“저도 찬성입니다.”
별다른 이유는 말하지 않고, 무척이는 그냥 찬성이라고 딱 잘라서 말했다.
이 녀석. 그냥 내 의견 따라가는 건 아니겠지?
어쨌든 네 명이서 찬성을 했다. 사실상 과반수가 넘은 것.
“네 분이 찬성하시고. 두 분은 기권이군요.”
리블도 기권이다.
정지한이 차분히 정리한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정석대로 공략하되 [타마tama]분들을 구하기 위해서 노력해 봅시다.”
그렇게 우리들의 작은 회의는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