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1화
내 주력 전투 능력은 결국 무공으로, 혼원건곤신공이 가장 강하다.
그와 함께 요긴하게 쓰는 건 염혼염동과 라이딩 스킬.
거기에 크투가의 걸음 및 블레이즈 워크와 그림자를 잘 쓰고 있다.
염력화살도 쓰기는 하지만, 요새는 거의 안 쓰다시피 하는 스킬.
무공으로는 더 이상의 진전을 기대할 수 없다.
아니면… 다른 종류의 무공을 익혀야 할까?
혼원건곤신공은 결국 육체가 강건해지고, 내공이 강맹해지는 종류의 무공.
효과는 심플하다.
그냥 빠르고, 강하다.
그것뿐이지만, 그게 결국 강자의 조건 아닌가.
반면 무공에는 음공(音功)이나 독공(毒功) 같은 종류도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런 종류를 익히는 것은 어떨까?
“음…….”
아니. 그건 아니야.
현재 혼원건곤신공도 따봉으로 억지로 랭크를 올려 둔 것.
내가 완전히 체득하지 못했지.
스스로 가진 힘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새로운 무공을 익힌다는 건 어불성설.
차라리 무공을 보조해줄 다른 종류의 스킬을 얻는 게 훨씬 나아. 그렇다면…….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심플하게 가면 된다.
* * *
우리는 완전 무장을 한 채로 필리핀의 공항을 걷고 있다.
일반 공항이 아니고, 군에서 운용하는 군 전용 공항이다.
때문에 우리 외의 사람은 없다.
고개를 슬쩍 돌려 보니, 다들 복장이 바뀌어 있었다.
내가 따로 움직이는 몇 개월 사이.
다른 이들도 각자 열심히 굴렀던 모양이다.
본래 내 전투 복장은 이랬다.
모노 블레이드와 전투 슈트 위에 흑염의.
손가락에는 트롤 재생력의 반지를 끼고, 목 아래쪽에 야광 페어리 클립을 꽂아 놓는다.
한쪽 팔에는 강완의 팔찌.
목에는 넉넉한 피의 목걸이를 걸었다.
신발로는 두 번 타격하는 장화를 신고, 허리에는 천사옥대를 끼고 있다.
전국옥새는 그림자 주머니 안에 들어가도 효과가 발휘되기 때문에 들고 다니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일단 흑염의와 전투 슈트는 벗었다. 흑염의의 블레이즈 워크는 훌륭한 스킬이지만, 따봉으로도 살 수 있다.
지금의 레벨에서 입을 만한 방어력을 지닌 물건은 아니다.
전투 슈트도 마찬가지.
이 녀석은 공산품이라서, 이제는 내가 입고 다닐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대신에 입은 것은 척량이 (내 기준으로) 천문학적인 가격을 써서 구해 온 물건으로, [헤테론의 비늘 갑옷]이라는 물건이다.
[헤테론의 비늘 갑옷]
등급 : B-
드래곤이자 대장장이로 유명한 헤테론은 자신의 비늘로 무구를 만드는 것을 즐겨했다. 그가 아직 미숙한 시절 만든 전신 갑옷.
기능 : 착용자의 움직임을 제한하지 않는다.
기능 : 마력 랭크에 비례하여 방어력이 상승한다.
기능 : 착용자는 갑옷의 무게에 제한받지 않는다.
방어력에 올인한 아주 심플한 방어구.
생긴 것도 멋졌다.
거기에 더해서 칼도 바꾸었다.
모노 블레이도 내가 강화해서 쓸 만하긴 하지만, 지금 레벨에 쓸 만한 물건은 아니었기 때문.
새롭게 얻은 것은 척량이 남은 예산을 가지고 구해 온 것으로 능력은 이랬다.
[일월검]
등급 : B
태양의 힘과 달의 힘을 동시에 쓰고 싶었던 고대의 전사는, 대주술사의 힘을 빌려 두 자루의 검을 만들었다. 일검(日劍)과 월검(月劍)으로 나눠진 이 검은 불길과 얼음의 힘을 발산한다.
기능 : 일검 – 상시 화염 칼날 생성. 마력 사용 시 위력 증가.
기능 : 월검 – 상시 한빙 칼날 생성. 마력 사용 시 위력 증가.
기능 : 일월지혼 – 음과 양의 힘을 합일하여 폭발한다. 위력 크게 증가.
모노 블레이드가 방어력을 무시하지만, 사실 무기 자체가 가진 위력은 그다지 높지 않다.
그러나 이 일월검은 내가 검기나 강기를 사용하면 화염과 냉기의 속성을 더해주고 증폭한다.
일월지혼 스킬을 사용하면, 그 위력은 더욱더 강력해지는 셈.
척량이 잘 구해 왔다고 할 만했다.
그렇게 새롭게 장비를 입은 나이지만, 동료들도 장비가 모두 바뀌어 있었다.
성광은 [성자의 지팡이]라는 물건을 가지고 왔다.
복장은 바뀌지 않았지만, 지팡이에서 느껴지는 마력.
아니 신성력이 강력했다.
정지벽은 나처럼 전신이 바뀌어 있었다.
나처럼 던전산 갑옷을 입었는데,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플레이트 메일(판금 갑옷)과 금속의 건틀릿을 꼈다.
[강완의 갑옷]과 [강완의 장갑]. 거기에 [강완의 장화]까지.
내가 낀 강완의 장갑과 같은 물건들이다.
그런데 저거 세트 아이템인 줄은 몰랐는걸?
투구는 쓰지 않았지만 대신 머리 위에 별 모양의 고리가 떠 있는데 [적의를 불러 모으는 별]이라는 물건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별하나는 가죽으로 된 하얀 부츠를 신고, 몸 역시 약간 새를 연상시키는 디자인의 옷을 입었다.
[바람을 달리는 장화], [하늘 새의 옷], [구름의 장갑]이라는 장비들. 거기에 등에 멘 것은 [뇌령의 활]이라고 했다. 전과 달라져 있는 장비들은 전부 고가로 보인다.
무척이도 복장은 달라진 상태다.
총이야 그대로지만(사실 내부적으로는 업그레이드를 했다고 했다.) 전투 슈트는 가져다 버렸다.
대신 [마도공학 아머]라는 것을 입었는데, 환상의 조각을 목에 걸고 있다.
마도공학 아머는 SF물에 나올 법한 느낌의 옷으로, 제법 멋져 보인다.
요즘 저런 걸 ‘테크 웨어’라고 부르던가.
정비가의 협찬으로 가져온 건가 본데 나중에 내가 더 나은 걸 만들어…… 줄 수는 없으려나.
그에 비해서.
정지한은 정장 슈트다.
통찰의 눈으로 봐도 그냥 평범한 정장 슈트라고 나온다.
저 인간은 저걸로 괜찮은 건가 싶다.
[옛날 게임에 삐까번쩍한 갑옷 입고 다니는 놈은 사실 하수고, 팬티 한 장에 곤봉 하나만 들고 다니는 게 진짜 고수라고 하던데 혹시 그런 걸까요?]
모르겠다.
일단 저 이탈리안 장인이 만든 명품 슈트의 방어력은 생살과 크게 다를 것 같진 않다만?
그리고 리블.
이놈은 그냥 평복. 이놈도 아무런 장비가 없다.
하지만 뭐……. 이놈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
공항의 통로를 얼마쯤 걷자, 필리핀의 군인들이 나타났다.
정지한이 먼저 앞으로 걸어가 가장 앞에 선 군인에게 말을 건다.
“로드리고 소령.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입니다, 미스터 정.”
필리핀의 언어가 아니라, 둘 다 영어로 대화를 하네.
“우리 요청을 들어줘서 고맙습니다. 점점 버거워지고 있었는데…….”
“조직들은 처리했습니까?”
“처리했습니다. 피를 많이 흘렸지만… 해내야 했죠.”
영어로 하는데, 통역 스킬 때문인지 약간 억양이 어색했다.
“다행이군요. 그러면 바로 움직이죠.”
“비행으로 피곤할 텐데. 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던전 옆의 섬에 지금은 군용으로 쓰고 있는 빈 호텔이 있는 걸로 압니다. 그곳에서 쉬면 됩니다.”
“철저하군. 그러면 그렇게 합시다.”
대령과 이야기를 끝낸 정지한이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다들 이야기 들으셨겠지만, 던전 옆 비어 있는 호텔로 가서 쉴 겁니다. 그리고 내일. 던전에 진입합니다.”
나를 비롯해서 다들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이동합시다.”
정지한을 따라 차량에 탑승한다.
우리 뒤쪽으로, 우리와 같이 물 건너온 서포터 팀이 뒤따르고 있다.
* * *
본래는 관광지였다는 섬이다.
섬과 섬의 거리가 적게는 100미터, 멀게는 1km 정도씩 떨어져 있다.
그런 섬에는 각기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데, 전부 휴양 관광을 하러 오는 이들을 위해서 지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이 없이 싸늘하기만 하다.
이 던전이 나타난 지가 벌써 5년째라고 브리핑 때 받은 서류에 적혀 있었다.
지금은 이 지역을 수비하는 군인과, 군에 고용되어서 일하는 헌터들을 위한 숙소로 이루어져 있다나?
우리도 그런 호텔 중 하나에서 쉴 수 있었다.
“그래서. 다들 잘 지냈어요?”
하룻밤 푹 자고, 모두들 일찍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했다.
그 이후에는 홀 같은 데 모여서 우리 모두 커피 한 잔씩 하고 있다.
정지한하고 리블은 어디론가 사라진 채다.
그들이 돌아오면 바로 던전으로 출발할 것이다.
“저야 뭐 바쁘게 보냈죠. 하나 씨는요?”
“장비 맞추느라고 뼈 빠지게 일했죠. 우리 같은 팀인데, 미묘하게 사건에 많이 휘말리느라고 던전 사냥도 같이 못 했잖아요? 따로 떨어져서 일하느라 힘들었다구요.”
“그래도 레벨은 많이 올리셨잖아요.”
별하나는 내 말에 어깨를 으쓱한다.
“엣헴. 이래 봬도 고레벨 던전에 들어갔거든요. 저만의 레전드 스킬 때문에. 여기 지벽이도 같이 들어가서 레벨 업을 잔뜩 한 거죠.”
이 두 명은 예전부터 친하더니, 이제는 아예 말을 놓고 사나 보네.
“레전드 스킬이라면…….”
“탐지 계열 스킬인 [별의 인도]라는 스킬. 이걸로 던전 핵을 찾을 수 있거든요.”
“오…….”
던전 핵! 그렇다는 말은…….
“하나 씨가 던전 핵을 찾고, 다른 이들이 던전 핵을 파괴하는 건가 보군요.”
무척이가 옆에서 말을 받는다.
“정답! 분업하면 편하니까요.”
아하!
그렇네.
나는 둘 다 혼자서 했지만, 생각해 보면 일반적으로는 분업을 하면 해결되는 일이니까?
던전 핵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헌터.
던전 핵을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헌터.
그리고 다른 동료들이 이 두 명을 보조한다.
그나저나… 던전 핵 탐지는 찾아보면 제법 있을 테지만. 던전 핵 파괴 능력자는 어떻게 구했대?
내 의문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별하나가 생글생글 웃으며 커피 잔을 들어 올린다. 그리고 한 모금 후룩 마시더니 말을 꺼냈다.
“던전 핵은 파괴 불가 옵션이 달렸지만, 파괴 불가를 파괴하는 옵션도 몇 개 있거든요. 스킬이 아니라 아이템도 몇 개 있으니까. 예를 들어 ‘절대 파쇄’ 옵션이 붙은 장도리 같은 거?”
절대 파쇄의 장도리…….
장도리면 그거잖아.
앞에는 망치, 뒤에는 쇠지레가 붙은 거.
그거에 ‘절대 파쇄’ 같은 게 붙어 있는 거야?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성좌가 그딴 걸 만들었지?
“그걸 저번 던전에서 썼다 그거죠? 그거 위력은 강해요?”
“아뇨. 아아주 구렸어요. 그래서 메인 딜러가 달라붙어서 네 시간 동안 그걸로 두들겨야 했다고요. 끔찍했다고 할까……. 그렇지 않았어?”
“음. 확실히 끔찍했지. 본래 스킬이 단검에 집중된 사람이라 더욱 그랬던 거겠지만. 확실히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어.”
정지벽은 모닝 커피와 함께 역시나 특제 육포를 우물거리며 대답한다.
그렇게나 끔찍했었나?
내 시선에 정지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치열하다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끔찍한 지루함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거였죠.”
“아무래도 절대 파쇄 능력만 있지, 공격력은 형편없었나 본데?”
무척이의 말에 왠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 졌다.
이게 무슨 숟가락 살인마도 아니고. 장도리 들고 달라붙어서 네 시간을 두들겼어? 아득하다. 아득해.
“그래서 다들 장비도 레벨도 빵빵했었군요.”
“그럼요. 그거 다른 대기업이 의뢰한 거였거든요. 하긴 자기네 본사 앞에 던전이 떡하니 있으면 부동산 가격 문제도 있지만, 본사의 안위도 문제니까요. 이 장비도 그쪽에서 의뢰금으로 뜯어낸 거고요.”
“오오…….”
[현재. 다른 헌터들이 주축이 되어 소멸한 던전은 국내에 5개입니다. 해외 전체로 보면 38개의 던전이 소멸되었습니다.]
오올? 인류가 조금 더 안전해지는 걸까나.
[다만 소멸된 던전 중 레벨 제한이 걸린 것은 2개에 불과하다는 게 문제입니다만…….]
A/B가 그랬었잖아.
나 말고도 레벨이 1로 고정된 헌터들이 몇 명 있던 거 같던데.
그런 사람들의 활약인가?
[아닙니다. 레벨 80 미만 입장 제한 던전의 2개가 소멸했습니다. 입장자들 전원 레벨 79의 헌터들이었고, 피해도 제법 많았습니다.]
그냥 목숨 걸고 던전 없앤 거구나.
입맛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