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그렇게 넋을 잠깐 놓고 바라보고 있으니, 척량이 말했다.
[주군! 홀리지 마십시오. 제가 나중에 근사한 마파두부를 요리해 드릴 터이니!]
아니. 척량이 너 말하는 포인트가 이상한 거 아니냐.
그리고 카레와 마파두부는 서로 다른 요리잖아!
‘애효, 모르겠다.’
역시 던전 3연속은 무리였나. 별로 체력이나 마력을 과소모한 것도 아닌데.
왠지 몸이 무겁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가 없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 나가며, 일단 씻었다.
장비를 벗어서 전용 장비함에 넣고, 그다음 욕실로 직행.
깨끗하게 씻어내고 마법으로 마무리.
그리고 나와 보니 식탁에는 카레 세 그릇이 놓여 있다.
하나는 내 것.
하나는 리블의 것.
남은 하나는?
“소환수도 미각은 있으니까요. 게다가 엄지 군의 소환수는 지능도 높잖아요?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거랍니다.”
음……. 이 성좌 녀석.
혹시 척량이와 내가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알아차리는 걸까?
[역시……. 성좌는 성좌로군요. 하지만. 모른 척하십시오. 주군.]
음, 그래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마늘과 카레향이 확 나는 것이 식욕이 확 살아났다.
“맛있게 드세요, 엄지 군. 제가 손수 요리를 해준 첫 번째 존재가 바로 당신이랍니다?”
“어… 그렇게 거창한 음식이 카레인가요.”
“그럼요! 카레는 건강에 좋거든요. 맛도 좋고요.”
“그거야 그렇지만……. 그러면. 잘 먹겠습니다.”
숟가락을 들고, 한입 떠먹었다.
이, 이것은!
마치 고전 애니메이션 요리왕 승룡 같은 느낌의 영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거… 맛있어!
“맛있네요. 진짜…… 맛있네요, 이거.”
카레 특유의 향이 식욕을 자극하는데, 여기에 매콤한 마늘 향까지 더해지니 끝내준다.
그리고 불 맛을 주고 육즙을 가둔 고기까지 더해져서, 우와!
“후후훗. 그렇죠?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제 특별 레시피 마늘 듬뿍 햄 고기 카레는 최강의 맛이니까요!”
리블이 잘난 척한다.
팔짱을 끼고 콧대가 아주 그냥 높아지는 걸 보니 그래, 이 정도 잘난 척은 할 만하군.
인정해.
그만큼 이거 맛있으니까.
먹으면서 깨달았다.
확실히 각성하고 나서 지금까지. 제법 가열차게 살아왔다는 것을.
느긋하게 시간을 보낸 적이 없고, 휴식을 한 적도 없다.
특히.
절망의 던전을 다녀온 이후에는 더더욱 그랬다. 폭주 기관차처럼 달렸다고 할까…….
힘들었었던 거네.
지쳤었다고도 할 수 있고.
그걸 카레 먹으면서 깨달은 것도 웃기지만.
“잘 먹었습니다.”
나는 감사 인사를 했다.
이 악마가 왜 갑자기 친절하게 구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감사한 일이다.
배가 부르니까, 갑작스레 졸음이 밀려왔다.
악마 리블이 그릇을 치우고, 씻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는 잠시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하암, 조금만… 눈을 살짝 붙여 볼까… 그리고 이따가 방에 가서 자야지…….
* * *
“냐하하하핫. 역시. 이 몸의 특제 카레. 효과가 만점이군요. 그렇지 않은가요? 소환수 군?”
리블.
아름다운 미남자의 모습을 한 악마와 같은 성좌는 웃으며 옆을 보았다. 식탁 위에 올라선 작은 여우가 그를 노려보고 있다.
[무슨 짓이냐.]
“어라라. 이 몸을 너무 나쁘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순수한 호의랍니다. 별 기대도 안 했는데, 오랜만에 발견한 귀한 원석이거든요. 귀중하게 관리해야죠.”
[네놈…….]
“인간의 정신은 연약하거든요. 시스템이 보호하는 것은 일정 이상의 충격뿐. 정신적인 피로까지는 막지 못한답니다~”
[……인간은 어렵군.]
“네. 그래요. 단단한 마음을 풀어 주는 것도 중요한 일. 책사인 소환수 군은 신공정령이니 그런 건 모르겠죠? 애초에 옛 과거에서 초인들과 같이 지냈으니까.”
척량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상대는 자신에 대해서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뿐.
“오늘의 일은 그저 호의. 하지만, 제 호의를 받은 자는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보여서 저를 기쁘게 해 줘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곤란하다고요.”
리블이 턱을 괴고서 잠이 들어 버린 엄지척을 염동력으로 들어 올린다.
그리고 침실로 옮겨 놓고는 방을 나섰다.
“거미 녀석 때문에, 곧 큰 이벤트가 열릴 테니까요. 그때에는 저를 더 즐겁게 해 주면 좋겠네요.”
그리고 방문이 닫힌다. 엄지척은 리블이 하는 말을 듣지 못했다.
* * *
“아.”
눈을 뜨고 무심코 시계를 확인했다.
벽에 걸린 시계는 오전 5시 3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엄청나게 푹 자버렸네.
[기침하셨습니까, 주군.]
“어. 좋은 아침……. 이렇게 푹 잔 건 오랜만이네.”
[리블이 뭔가를 섞은 모양입니다. 시스템에도 걸리지 않는 것으로.]
“과연 성좌라는 건가. 이거 당해 버렸는걸.”
[그렇다고 해도. 호의로 한 행동 같습니다. 주군의 안색이 확실히 더 좋아졌군요.]
“그래? 하긴. 뭔가 개운하긴 해.”
[그것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스템이 보호하는 것은 일정 이상의 충격뿐. 아주 조금씩 들어가는 정신적 침식까지는 막지 못한다.]
“리블이 그랬단 말이지…….”
무공을 본격적으로 수련한 이후로.
하루의 수면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운기조식을 하면 육체의 피로가 아주 빠르게 풀리기도 하지만, 내공도 모인다.
즉, 피로 회복과 내공 수련을 동시에 하는 것이 가능. 그래서 늘 그렇게 지내왔다.
‘그러다가 시간이 나면 [무신의 수련 공간]에서 수련하고.’
그리고 스킬 조정을 하다가, 던전 깨러 갔다가, 방송 촬영해서 따봉을 번다.
나 자신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정신적인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던 것일지도.
“그래도 자고 나서 상쾌해졌으니 됐어. 자, 오늘의 일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오늘부터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한다.
[우선은 예산 내에서 생산량을 증대시킬 아이템을 구해야 합니다. 일전 1억 정도의 물건인 ‘환수의 결정’을 말씀드렸습니다만. 더 나은 방법을 찾았습니다.]
“어, 진짜?”
옷을 주섬주섬 입으면서 되물었다.
[예. 주군이 직접 만들면 더 저렴한 가격에 더 대단한 물건을 만드실 수 있습니다.]
“아하. 그거 괜찮네. 나 제작계 스킬 이거저거 가지고 있긴 하니까. 그래서 내가 만들어야 할 건 어떤 건데?”
[이겁니다.]
척량이 정보를 띄워 주었다.
[소환된 자의 근성]
등급 : B-
분류 : 장신구
소환되는 모든 종류의 존재에게 장착 가능한 장신구.
그들이 끌어다 쓰는 소환사의 마력을 절감한다.
기능 : 소환체가 사용하는 스킬의 마력 소모가 50% 감소.
[소환된 자의 손재주]
등급 : B-
분류 : 장신구
소환되는 모든 종류의 존재에게 장착 가능한 장신구.
그들이 생산하는 모든 것의 생산량을 증가시킨다.
기능 : 소환체가 생산 및 소환하는 것 100% 증가.
[소환수가 사용하는 스킬도 소환사의 마력을 소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걸 감소시켜 주는 아이템입니다.]
호오, 그런 것도 있다고?
[네. 아이템 시장에서는 10억 정도에 거래되는 물건들입니다만, 제작하신다면 5천만 원 정도면 만드실 수 있습니다.]
둘 다 반지처럼 생긴 물건이다. 그런데 능력은 범상치가 않았다.
과연 B- 등급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저번에 전리품으로 가져온 [청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B+등급의 물건이었으니까.
“그런데 척량.”
[예, 주군.]
“마력 소모량 감소 쪽은 알겠는데. 소환체가 생산 및 소환하는 것 100% 증가는 뭐야? 나 같은 독특한 소환체를 가진 사람이 많아?”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것이 인기 있는 것은 이런 것 때문입니다.]
척량이 갓튜브를 열어서 나에게 보여 주었다.
그곳에는 식물 형태의 소환수가 있었다.
그 소환수는 꽃봉오리가 입처럼 되어 있었는데, 뭔가 고전 게임에 나오는 몬스터처럼 생겼다.
그 녀석이 입에서 씨앗을 뱉자, 그 씨앗은 순식간에 자라서 작은 꽃봉오리 소환수가 되었다.
[증식 타입의 소환수입니다. 증식에 마력의 소모가 없다 보니, 집단전에서 시간만 충분하다면 대량의 소환수를 만들 수 있다고 하더군요.]
호오, 저런 종류에 쓰이는 아이템이라는 거구나.
그나저나.
“저거 편리해 보인다. 나도 쓸까?”
[특정 상황에서는 유용할 수 있겠습니다만, 지금의 주군께는 비효율적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럼 말고. 자, 그러면 지금부터 재료 사서 아이템 만드는 게 일정이지?”
[그렇습니다.]
“좋아. 가자고.”
쇼핑 타임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방을 나왔다. 그리고 그때.
딩동.
벨이 울렸다.
* * *
“아담 브론즈라고 하지. 이름과 얼굴 정도는 알고 있나?”
OH! FXXKING 아메리카!
손이 달달 떨린다.
대체 왜 이놈이 우리 집에 벨을 누르러 왔는지도 모르겠고.
높으신 몸이신데 왜 미리 연락도 없이 불쑥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아, 아니……. 내가 왕년에 미드 좀 본 짬밥으로 생각해 보면 미국은 인싸들의 나라.
뭐만 하면 파티를 열고 뭐만 하면 벨을 눌러서 라자냐를 했다고 툭 건네더라.
한국은 요즘 이사 왔다고 떡도 잘 안 돌리는 판국인데 파티는 무슨 놈의 파티.
아무튼 간에 그런 국가 문화다 보니 이렇게 연락도 안 하고 불쑥 찾아올 수도 있……기는 개뿔.
이건 그냥 회장님의 오만이지.
미쿡 금융계를 휘두르고 헌터로서 살아가면서 던전을 마치 유전 사업 하듯 굴리고 있는 이 왕자님은.
우리 집 소파에 앉아서는 나를 보며 자신만만한 태도로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었다.
하기사.
삼국지 보면 조조가 어디 가서 애걸하면서 인재 영입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었다.
빈털터리 유비야 제갈량을 삼고초려했지만.
“집사이자 비서인 오즈월드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리고 아담 브론즈의 뒤편으로 ‘집사의 귀감이다!’라고 외칠 법한 노신사가 서 있다.
음. 혹시 헌터로서의 직업이 집사 같은 건 아니겠지?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시스템의 세계는 넓고 깊으니까요. 한번 그런 직업이 있는지 검색해 볼까요?]
아니. 굳이 알아볼 필요까지는 없어. 척량.
“만나서 반갑습니다. 엄지척입니다.”
우선 나도 인사를 했다.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자고. 우리 몇 번 정도는 대화를 해 봤잖아? 서로 얼굴도 알고 있으니 모르는 사이도 아니지.”
이야… 지나치게 인간친화적인 사람이네, 이 사람.
‘랜선친구라는 말 혹시 아시나요?’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음…. 그러시면 본론부터 이야기하죠.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물론 엄지척이라는 인간을 직접 보기 위해서 왔지.”
“단지 그것뿐은 아니시겠죠?”
“본 다음에 할 일은 뻔하지 않아? 스카우트다.”
스카우트.
세계 최대, 최강의 길드 중 하나.
그런 길드의 수장이 직접 와서는 나에게 이렇게 스카우트 제의를 할 정도로 내가 성장한 건가.
[물론입니다, 주군. 던전 소멸은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특히 저 레벨의 입장 제한 던전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긴…. 그게 가장 더러운 경우지.
“아. 스카우트하기 전에 선물을 하나 주지. 이거는 던전 소멸에 대한 정보를 인류를 위해서 풀어버린 바보 같은 네 행동에 대한 보답이다.”
그러면서 물건을 척하고 꺼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