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부상자 계십니까! 제가 힐이 되니까 말씀 주십시오! 제 소환수도 힐이 되니 부상자는 말씀 주세요!”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다. 생존자들, 부상자들을 치료해야 한다.
의료반이 도착할 때까지 연명은 해야 하니까.
“여기 힐러! 힐러 오라고 해요!”
“저… 저는 Healer입니다. 한국어 조금 가능합니다.”
외국인 헌터가 힐러인 듯 자기 스스로를 치료하고서는 일어나 다른 사람들에게 힐을 쓴다.
힐러가 아닌 이들이라고 해도, 연회장 한쪽의 반쯤 박살 난 응급 키트에서 포션을 꺼내 와서 부상자들에게 들이부었다.
“엄지척 헌터가 저렇게 강했다니…….”
“아래층에서는 왜 사람이 안 오는 거야!”
그렇게 정신없이 사람들을 치료하고 있을 때.
신주란이 다가왔다.
철컥-
투구를 벗으니까 정말로 어디 신문 시사 면에서 나오던 그 얼굴이 보였다.
“와… 완전 밀폐형 투구네요. 외부가 제대로 보이긴 하나요?”
내 말에 그녀가 웃었다.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그거예요? 그런 질문?”
“아, 네네.”
“하여간. 진짜로 방송밖에 모른다니까.”
첫 질문치고 좀 그랬나?
좀 멋쩍어질 적에 그녀가 손을 올렸다.
따봉.
“훌륭했어요. 엄지척 헌터.”
-10따봉을 받았습니다!
아니… 굳이 손가락으로 따봉은 안 주셔도 됩니다만…….
이거 참, 부끄럽네.
* * *
신주란은 눈앞의 엄지척을 바라본다.
‘이놈 참 진국이네.’
술로 치면 칵테일 같은 사람이다. 이것저것 죄다 섞여 있는 주제에 그 모든 색이 전부 다 어울리니까.
‘필시 방송을 하겠다 어쩌겠다 이야기한 건 적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한 계책이었겠지.’
특히 대화가 통하는 지능형 몬스터들의 경우 이런 걸로 빈틈을 만들기가 좋았다.
‘그래. 이 세상에 누가 이 상황에서 촬영해 보겠다고 목숨 걸겠어. 말도 안 되지. 이건 분명 밑바닥부터 지옥을 경험해온 자만이 할 수 있는 그런 냉혹한 계책이겠지.’
이렇게 밝게 웃는 표정 뒤로 얼마나 많은 계산이 숨겨져 있을까.
신주란은 그런 엄지척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거기다가.
‘그 상황에서 사람 구조할 생각을 하는 게 대단했지.’
인간이란 누구든 자신이 위기에 빠지면 제 몸부터 건사하려고 하지 않나.
엄지척은 그런 법이 없었다.
‘실력과 두뇌, 거기다 인품까지 더해진 진짜 헌터지.’
어떤 색과도 조화롭고, 어떤 걸 섞어도 맛이 배가된다.
술이 부담스러울 때는 논 알코올로 스스로 바꿔서 곁에 다가간다.
그걸 알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도 그녀의 비계 친구들이 하루 1엄지를 외치며 다니지 않나.
여기서 어떤 식으로 파든, 각자 뭘 착즙하고 있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의외로 신주란은 덕질에 관해서는 둥글둥글한 스타일이다.
다만 신주란의 익명 공계 개정에 직원을 시켜서 비밀리에 깎아낸 아름다운 짤방을 올렸는데.
그걸 굳이 긁어다가 엄지 까는 용으로 쓸 때.
그걸 보는 순간 속에서 천불이 올라왔지만 그 또한 내 새끼가 그만큼 잘나서 그런 것 아닌가 했다.
‘잘생겼다. 내 새끼.’
이미 뇌 내의 리틀 신주란들은 ‘엄지는 이 순간에도 잘생겼고, 자상하고, 머리가 좋은 게 벌써부터 효도를 하고 있다.’라며 행복에 겨워하고 있었고.
뇌 내 마약이 뿜뿜 펌핑질을 하든 말든 일단 몸뚱이는 정상적으로 주행 중이다.
“엄지척 헌터께서 굳이 직접 치료하러 뛰어 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 다른 치료 헌터들도 계시니까 좀 쉬시는 게 어때요?”
“아, 저는 괜찮습니다.”
손을 착 들며 단호하게 답하는 모습을 보라.
‘크윽, 방금 뇌 내 연성 백 개 쯤 지나갔다. 엄지야…….’
이런 건 학생회장 포지션이 좋다.
1999년 세기말 원시 고대부터 판치던 그런 팬픽, 팬아트들.
엄지는 옆선까지 아름답지 않던가.
이런 국보급 턱 선이라면 24시간 빨아먹을 자신이 있었다.
신주란이 답했다.
“그러면 저랑 좀 대화할까요? 그것도 싫으세요? 우리 전우잖아요.”
“…….”
신주란의 말에 엄지척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실제로, 부상자 대부분은 이제 정리가 되었고. 이 정도면 의료 요원이 도착하기 기다릴 정도는 되었다.
이미 사망한 분들은 어쩔 수 없지만, 일단 살아남은 분들 중에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은 없으니까.
엄지는 생각했다.
‘음, 슬슬 더 따봉 받기는 무리려나?’
이미 따봉을 엄청나게 받아냈다.
사람을 치료하는데 초마다 따봉이 붙더라.
역시 절박한 사람일수록 따봉을 퍼부어 준다. 어쩔 수 없다. 그게 사람 감정이니까.
‘지금은 일단 대화를 하는 게 좋겠지.’
그런 엄지척의 속을 모르는 신주란이 말을 이어 나갔다.
“사람을 구하신 것도 멋졌어요.”
“고맙습니다.”
“작전도 멋있었고요.”
“아, 정말 고맙습니다.”
“팬입니다.”
“어, 엄지 검지.”
뭔가… 대화가 요상하게 흐른다는 것을 신주란은 깨달았다.
“아무튼 제 공격대 팀원들에게 오늘 영상을 보여 주고 싶을 정도였네요.”
“아, 그러면 역시 녹화본 공개해도 되는 건가요?”
표정이 확 밝아지는 것을 보며 신주란은 다시 가슴이 뛰었다.
‘하……. 역시 엄지는 전설이다.’
신주란은 떨리는 손으로 갑주 사이에서 지갑을 꺼내서 명함을 건넸다.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 주세요.”
“아, 네넵! 감사합니다.”
“나중에 광고 관련으로 비서를 통해 연락 넣을 테니 꼭 받으시고요.”
“어이쿠, 고맙습니다.”
그녀가 흐뭇하게 웃었다.
“성광 씨나 동생분이랑도 같이 셋이서 찍으시는 게 좋겠어요.”
“네?”
“성광 씨가 보육원 운영하느라 힘들다 들었거든요. 이런 식으로 후원하면 좋죠.”
“아아, 넵! 맡겨 주세요.”
그렇게 명함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그녀는 흐뭇하게 엄지척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응원합니다아.”
그렇게 말하며 아쉬운 듯 떠나려는 게 아닌가.
“자, 잠시만요.”
“네?”
엄지척은 그림자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신주란에게 건넸다.
“제 명함입니다.”
“아앗! 이건……!”
“네네, 그. 새로 인쇄한 지 얼마 안 되어서요. 첫 개시를 해보네요.”
엄지척의 말에 신주란의 눈이 빛난다.
‘최애의 명함. 이제 막 개시했대……. 세에상에~ 뒤에 깨알같이 엄지 마크 봐봐. 하아, 귀여워서 천장 뿌숴야겠다.’
뇌 속에서는 온갖 주접이 퍼레이드 중이나 현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안하기 그지없었다.
“디자인 잘 짰네요.”
“그거 동생이 짰어요. 무척아!”
“왜, 형?”
엄무척이 다가온다. 엄지척이 자연스럽게 엄무척의 목에 팔을 걸었다.
“이 녀석이 직접 디자인했거든요. 타고났어요. 너도 하나 드려.”
그러자 엄무척이 명함을 꺼내서 건넸다.
“안녕하세요. 엄지척 형의 동생 되는 사람입니다.”
“……둘이 같은 디자인이네요? 색만 다르고.”
“네. 아무래도 형제니까요.”
그리 말하며 두 사람은 주먹을 탁 부딪쳤다.
“그렇군요.”
엄무척이 처진 눈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늘 형을 시청해 주시고 후원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만큼 좋은 콘텐츠였으니까요.”
그렇게 신주란은 최애와 차애의 명함을 받았다.
계 탄 날이었다.
‘이걸 이제 진공 압축해서 십 년을 빨아먹어야겠다…….’
머릿속에서 화려하게 축포가 터진다.
행복했다.
‘이래서 직관이 최고구나. 그림이 좋네.’
그때였다.
휘청-
격렬한 전투 후유증 때문일까.
엄지척의 다리가 한번 옆으로 휘청이더니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아앗?’
신주란이 재빨리 손을 뻗는다. 그리고 엄무척도 놀라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제3의 인물이 엄지척의 등 뒤에서 그를 붙잡았다.
“어이쿠~ 제 한시적 친구가 너무 힘을 쓰셨네요. 확실히 끝장내겠다고 무리한 건 알겠지만~ 안 좋은 선택이랍니다?”
키 크고, 늘씬한 사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검은색으로 물든 사내가 등 뒤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신주란은 생각했다.
‘……저놈은 뭐 하는 놈이지?’
왜일까. 헌터의 육감이 불길한 경보를 뿌렸다.
* * *
‘죽겠군. 이거 힘을 너무 많이 썼구나.’
신주란과 헤어지고 혼자서 마력을 갈무리하고 정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림자 주머니를 소환한 후, 포션을 꺼냈다.
‘후, 내가 헌터인지, 약쟁이인지.’
웃기게도 최상위 헌터일수록 포션을 많이 먹는다.
그만큼 돈이 많다는 뜻이거든. 어찌 보면 참 재미있는 세상이다.
“바로 몸부터 정비하다니 좋은 습관이네요.”
“이대로 그냥 누워 있을까 했는데 혹시 몰라서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무척이는 내 옆에서 총신을 점검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문이 안 열리니까.”
“호오?”
“형도 느낀 거 아니야. 지금 문이 전혀 열리지 않고 있다는 걸.”
“응.”
확실히.
아직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문이 안 열린다는 거 자체가 이상 사태니까.
“형. 저것들부터 챙겨.”
“뭐? 저것들?”
“어. 혹시 모르니까.”
무척이가 연단 뒤쪽 멀리 날아가 있는 물건들을 가리켰다.
경매에 낙찰은 되었지만, 아직 인도되지 않은 물건들이 굴러다니고 있다.
전국옥새, 천사옥대, 만파식적은 내가 이미 챙겼지만, 그거야 눈에 띄니까 챙겼던 것.
더 멀리 날아가 있던 것들을 지금 본 거다.
“오…. 무척 군은 눈이 좋군요. 좋은 생각이에요.”
리블의 호평 속에서 염혼염동을 사용. 그것들을 끌어당겼다.
독룡의 어금니 반지, 염마족의 오른쪽 눈, 자소단, 청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그리고 악마가 봉인된 동상.
다른 것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것들만 해도 어마어마한 가격들의 물건이었다.
그것들을 일단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반대로, 주머니에서 포션을 더 꺼내서 마시고, 장비도 더 꺼냈다.
슈트까지 갈아입을 시간은 없어 보여서 흑염의, 트롤 재생력의 반지, 야광 페어리 클립, 환상의 조각, 강완(强腕)의 팔찌, 넉넉한 피의 목걸이, 두 번 타격하는 장화를 꺼냈다.
환상의 조각과 두 번 타격하는 장화 그리고 방금 주워온 1,800억짜리 독룡의 어금니 반지는 무척이에게 던졌고, 녀석이 바로 착용했다.
나 역시 꺼낸 것들을 전부 착용. 그러고 있자니 리블이 입술을 삐죽였다.
“너무하네요~ 저는 아이템 안 주나요?”
“필요한 물건이 있어요?”
사실 이 녀석에게 대체 뭐가 필요한지조차 나는 모르겠다.
마력체라는 수수께끼의 강력한 기술을 자유자재로 쓰고, 거기에 인간이 사용하지 못하는 금단의 지식까지 끌어 쓴다.
그러니 뭐가 필요한지 내가 알 수가 있나.
“음~ 그 염마족의 오른쪽 눈을 주시면 좋겠네요.”
이거 몇백 억짜린데…. 으음. 그래도 일단 줘야겠다.
위급 상황이니까.
“여기요.”
그림자에서 다시 꺼내서 눈동자를 주자, 그가 히죽 웃더니 입에 넣고 그대로 삼킨다.
“아악!? 그게 얼마짜린데!”
“워워. 진정해요. 아무리 비싸도 목숨보다는 싸잖아요? 이게 있으면, 재~미있는 짓을 할 수 있다구요. 그리고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겠죠?”
리블의 말에 일단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저 말대로다.
살아남는 게 중요해.
그때였다.
쾅쾅!
“뭐야! 왜 문이 안 열려!”
“통신도 되지 않아요. 이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