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정지한이 스킬을 발동했다.
미닛 리피터(Minute repeater).
어느샌가.
가면의 주변으로 톱니바퀴 여섯 개가 나타나 있었다.
그것이 가면을 가운데에 둔 채로 좁혀져 움직이기 시작한다.
톱니바퀴의 작은 날 하나가 마치 분쇄기처럼 조금씩 가면을 으깨기 시작했다.
“네놈의 비웃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꺼져라.”
[이… 이럴 수가. 어찌 한낱 필멸자가 신격의 힘을……! 크아아악!]
콰직. 콰지지직.
가면이 으깨지고, 그 파편은 톱니바퀴에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이윽고, 가면이 완전히 부서진 자리에는 돌아가는 톱니바퀴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도 이내 사라진다.
“그러면… 다음은.”
정지한의 시선이 보이지 않는 먼 곳을 향했다.
* * *
인생 원래 그런 법이다.
신주란은 모처럼 가면을 쓰고 경매장에 참석해 있었다.
엄청난 물건이 나온다는 소문은 그녀의 귀에도 들려왔고, 멀리 떨어져 있는 VIP룸에서 경매를 모니터로 지켜보는 것보다는 현장에서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현장까지 찾아와서 앞쪽의 테이블에 앉아서 경매를 지켜보던 중이었다.
‘제발 나 빼고 다 경매 접질리게 하소서.’
기우제를 지내고는 자리에 착석했다.
그리고 대망의 전국옥새가 나타났을 때.
이번 경매를 위해서 준비한 팀과 실시간으로 정보를 교환했다.
-사장님. 다른 업체들 쪽에서도 자금 이동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비서의 목소리.
“그래서. 우리 쪽보다 금액이 더 세?”
-그건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A/B도 움직였습니다.
신주란의 이마가 찌푸려진다.
A/B.
‘아니, 그 미친놈은 또 왜 여기서 지랄이래?’
머나먼 미국 땅에서 이 경매를 지켜보고 있는 모양.
돈도 많은 새끼가 안 끼는 곳도 없어서 더 짜증난다.
가뜩이나 요즘 엄지척이 갓튜브 할 때마다 후원금을 틈틈이 뿌리면서 열심히 호감을 사더만.
제아무리 신성 그룹이 대한민국에서 날고 긴다고 하지만.
월가의 테디베어를 무슨 수로 이기겠나?
거기다가.
‘이놈은 스릴을 즐기지. 그만큼 벌어먹었으면 뒷짐 지며 ‘엣헴, 내가 길드 마스터다.’ 하며 목에 힘 빳빳하게 들어갈 법도 한데, A/B는 위험천만한 던전에 직접 들어가는 미친놈으로 유명하지.’
때문에 강했다.
“쯧.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이 월가의 테디베어가 부디 전국옥새에 진심이 아니길 바랄 뿐.
그때…….
콰쾅!
호텔 전체가 흔들리는 폭발음이 났다.
-사장님! 습격입니다! 헬기가 두 대나…… 치직.
신주란은 비서와의 통신이 끊김과 동시에 손목을 매만졌다.
번쩍!
손목에 빛이 일어나며 팔찌가 생겨나고, 그것에서부터 빛이 점점 커져가며 그녀의 전신을 뒤덮었다.
이내 그것은 중무장의 갑옷으로 변했다.
투구까지 완전히 눌러쓰자, 그녀의 외모는 조금도 보이지 않게 된 상태.
재빠른 상황 판단!
그와 함께. 사방의 창문이 박살 나며 일단의 무리가 침입해 들어왔다.
“꺄아아악!”
비명이 일어난다.
‘이 X할 새끼들아! 내가 입찰한 전국옥새에 손끝 하나 대지 마라!’
하필 재수도 없게 경매장에 와서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다행히 이 마음은 신주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신주란처럼 헌터인 자들도 꽤 많다 보니 무장을 소환하거나, 꺼내 들었다.
왜에에에에엥!
[공습경보. 공습경보. 민간인분들께서는 신속하게 안전한 장소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민간인분들께서는 신속하게 안전한…….]
시끄러운 경보음이 울리고, 이미 아수라장이 되었다.
‘대체 어떤 놈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대헌 그룹 호텔을 공격했지? 물론 오늘 나온 물건이 놀라운 것이긴 한데…….’
7성급 호텔 예신.
국내의 굴지의 대기업인 대헌 그룹에서 건축하여 운영하는 최고급의 호텔.
이런 초고가 경매가 열리는 장소로도 자주 쓰였는데, 그만큼 보안과 안정성이 최고라고 인정받기 때문.
그런데 그런 결계, 방어막, 보호 마법 등을 모조리 뚫고서 침입했다는 것은 상대도 보통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실제로 지금 그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르르릉!
번개를 쏟아내는 자, 화염을 휘두르는 자, 뭔지 모를 촉수를 소환해서 싸우는 자. 가지각색으로 싸워대고 있다.
대략 400평 정도의 널찍한 연회장 안은 그야말로 지옥도!
경매에 참가했던 헌터와 호텔의 경비를 서는 헌터들이 침입자들과 격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아가씨! 대피…….”
“닥치고 전투 준비나 해! 오라! 나의 군대여!”
신주란이 자신의 스킬을 사용한다.
그녀의 직업은 [광휘의 지휘관]. 다수를 지휘하고, 집단 전투에 능한 최상위급의 클래스다.
그런 그녀의 주변으로 열 명이 소환된다. 기사와 힐러 그리고 궁수와 마법사로 이루어진 무리!
그녀의 레전드 스킬인 군대 소환이었다.
이것만으로도 그녀는 일당백의 힘을 지녔다.
“습격자를 처리한다!”
그녀의 눈이 습격자들의 숫자를 헤아렸다.
그 수는 불과 여덟이었지만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했다.
그들은 전부가 등판에서 거미 다리 같은 것을 꺼내서 헌터들을 찔렀는데, 마력의 방패나 번개 같은 것을 파쇄하고서 그대로 관통해 사람들을 학살해 대고 있었다.
얼마 안 되는 그 시간에, 이미 여럿이 죽어 자빠진 상태에서. 그녀는 연단의 가운데. 전국옥새를 향해 다가가는 자를 보았다.
저놈 새끼가 보스겠지!?
“적의 군주가 저기 있다! 돌격하라!”
그녀가 내달렸다.
그 양옆으로 기사가 붙고, 뒤에서는 마법사가 마법을 시전했다.
몸에서 마력이 폭증하고, 힘이 가열차게 부풀어 오른다.
그녀의 대검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줄기줄기 뻗어나가는 그때.
연단으로 다가가던 이의 시선이 신주란을 향했다.
위웅!
“컥!?”
신주란. 그리고 그녀를 따르던 소환체들이 모두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이게 뭐야!? 염동력으로 이 정도 출력을 내다니!!’
염동력.
분명 상위 스킬로 분류되는 것이지만, 출력이 이렇게까지 강력한 것은 신주란으로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예 몸을 억눌러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다니!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아니. 염동력이 아냐! 이 정도 위력이면 나를 들어 날려 버릴 수도 있을 텐데… 그러면 중력…… 어?’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이었다.
상대의 시선이 돌아가더니, 다른 방향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왠지 눈에 익은 쌍검을 든 사내가 서 있었다.
“지금 관계자분이 안 계셔서 그런데, 이거 라이브 송출해도 됩니까? 안 되면 녹화 방송이라도 하겠습니다!”
따봉에 미친 놈이 왔다.
* * *
폭음과 함께 호텔 전체가 흔들렸다.
경보가 울리고, 동시에 유리창을 박살 내며 테러리스트가 쏟아져 들어왔다.
“뭐, 뭐야!?”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다.
테러리스트들은 주저 없이 무기를 뽑아서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덤벼들었다.
“꺄아아악! 살, 살려 줘요!”
우리 앞 테이블의 참가 고객이 도망치려다가 넘어졌다.
그 여성을 향해 달려와 칼을 내리치는 테러리스트.
나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번개처럼 내달렸다.
달려 나가며 그림자 주머니에서 두 개의 검을 꺼내어 쥐는 데는 눈 한 번 깜빡할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카앙!
테러리스트의 칼을 모노 블레이드로 튕겨 내며 참가 고객의 앞을 가로막았다.
테러… 테러라.
내가 그렇게 내버려 둘 것 같으냐!
후욱!
놈의 몸에서 검은 증기가 피어오른다. 그리고 갑자기 빨라진 속도로 검을 찔러 왔다. 내 목을 노리는 정확한 한 수!
하지만 나도 검법을 제법 잘 익혔다 이거지!
챙! 채챙!
놈의 검을 튕겨 내고, 나는 앞으로 한 걸음 더 내디뎠다.
놈은 방금 전의 공격 때문에 몸 여기저기 빈틈이 많았다. 그걸 향해 찌르는 건 어렵지 않다.
쐐엑!
이대로 한 명 처…….
카카캉!
갑자기 녀석의 등 뒤에서부터 무언가가 나타나 내 검을 쳐낸다.
흡사 거미 다리와도 같았는데 새카만 키틴질이 조명 아래에서 칼날처럼 번뜩였다.
등에서 거미 다리를 뽑아내? 변신술 스킬? 아니면 소환?
딱 한 가닥의 다리였지만 굵기가 사람 팔뚝만 하고 위력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크왕!
그러나 녀석은 내 목에 목도리마냥 감겨 있던 이놈이 소환수라는 걸 몰랐던 모양.
허나, 찰나의 계산 실수는 생사를 가른다.
이 잠깐의 틈 사이에 척량이 뛰어올라 거대화하며 녀석의 목을 물어뜯었다.
우드득!
끔찍한 소리가 나며 상대가 쓰러진다. 그러나 그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지.
사람들이 죽고 있으니까!
“형. 어서 대피…… 할 생각 없구나?”
등 뒤로 무척이가 다가왔다.
“없어. 이게 다 방송 아이템이다. 무척아. 진정한 프로는 때와 장소를 가리면 안 돼요~”
그림자를 늘린다.
장비를 꺼내서 무척이에게 던지고, 나 역시 희망의 수호자를 꺼냈다.
하필 오늘 입은 게 연미복이라 어째 아쉽네. 그래도 기본적인 무기는 챙겨 나와서 다행이다.
텔레파시 마법을 활성화했다.
기억까지 전송하는 건 시간이 걸리고 힘든 일이지만, 대화 정도는 원거리로 가능해진 게 이 마법의 편리한 특성이니까.
이런 난전에서 특히 쓸모가 있거든.
-리블.
사방이 난리가 나 있는데도, 조용히 와인을 홀짝이며 히죽거리고 있다.
이 악마는 이 난장판이 즐거운 모양이다.
그렇긴 하지. 피와 폭력, 그리고 광기. 이 모든 게 그에게는 성찬일 테니까.
내 감정을 읽은 건지 그는 그제야 나른하게 답했다.
-네이~ 부르셨습니까요?
-습격자 방어를 도와주세요.
-마스터를 공격하는 자들인데 죽여도 됩니까? 적당히는 못 합니다.
‘…….’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 제법 각오가 된 모양이군요. 좋은 눈빛입니다. 한시적 친구로서 분부대로 하지요.
이제야 알겠다.
정지한이 나를 여기 보낸 이유.
쓸 만한 물건을 사라고 보낸 것도 아니고, 견문을 넓히라고 보낸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우리가 살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이 경매장에 보낸 거겠지.
이걸 막으라고 보낸 거였어.
‘이게 예지자의 좋은 점인가. 이래서 대형 길드에서는 반드시 예언 능력자부터 포섭하려는 거군.’
하지만 놀랍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대형 길드의 다른 예언자들은 이 사태를 예지 못 했다는 거니까.
[정지한만이 가능했다는 뜻입니다. 주군.]
글쎄. 그 녀석이 얼마나 확신을 가졌는지는 모르겠네.
[네. 만약 확신이 있었다면 미리 중무장을 하라고 조언했을 테니까요.]
그 녀석의 예지 능력 범위를 모르겠어. 분명 본인이 예지 능력자가 아니라고도 말하기도 했었고.
어느 쪽이든.
그놈은 내가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으로 초대장을 보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건 사소한 직감입니까?]
아니, 온갖 진상 사장을 경험해 본 피고용인의 감이야.
사장만 사람 보는 눈이 느나?
나 같은 놈들도 사장 보는 눈이 늘어요.
‘사실, 이런 꼴을 보고 참을 수도 없고.’
그때 무척이가 권총 슬라이드를 당긴다.
철컥-
“가. 형. 내가 엄호할 테니까.”
무척이의 몸에서 마력이 스파크가 되어 튀어나갔다.
그와 동시에 총탄을 비처럼 쏟아냈다.
타타타탕!
“미친! 중화기 메카닉계 헌터까지 끼어 있다. 도망쳐!”
권총이 무기인 헌터.
보통 그런 헌터는 거대한 몬스터보다 작고 빠른 적.
즉, 사람을 죽이는 데 더 특화되어 있지.
나는 동생의 엄호를 받으며 곧바로 땅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