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핏빛 눈동자가 영혼을 관통한다.
이 순간 말을 하려다가 목이 막혔다. 마치 목소리 금지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
“계약에서는 진실된 욕망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방금 말하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거죠. 자, 말해 보세요. 뭘 원합니까? 돈? 명예? 자유? 권력? 아니면 사랑인가?”
그 말에 정지한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짓는다.
“낭패군.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나? 네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을 빌도록!”
“뭐, 인간이란 이렇게 하면 보통은 하늘에서 천억 정도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빌더라고요. 그거면 나도 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을 거고…….”
그 순간. 목이 풀린다.
내 진짜 욕망이 나왔다.
“사람을 지켜…….”
“네?”
웃기다. 나도.
고작 이게 내 진짜 욕망이라니.
헌터 보조원 일 하는 동안 남 장례 치러 주던 게 익숙해져 버렸나.
나는 입을 열었다.
“튜토리얼 이후의 세계가 오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게, 죽지 않게 해 줘.”
……두 번 다시 그 ‘풍경’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어떤 절망은 자국을 남긴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 자국이 남아서 내게 속삭인다.
곧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그 지옥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내 말에 어이가 없는지 리블은 한참 웃었다.
“아핫! 아하하하! 미친 거 아닙니까? 그게 진짜 욕망? 의식주를 뛰어넘는 욕망이라고요?”
얼굴이 귀까지 시뻘게졌다.
“와, 어디서 이런 걸 주워 왔습니까? 정지한 군?”
그의 손이 자유롭게 풀린다.
“이래서 인간은 마지막까지 방심하면 안 된다니까. 과제가 너무 무겁잖습니까. 어기면 저는 끝나는 거라고요?”
왜일까. 그는 묘하게 즐거워 보였다.
“좋아요. 계약자님. 당신의 소원대로. 아~ 이래서 튜토리얼 전의 세계가 재미있어. 이런 순진해 빠진 광인도 있고.”
정지한이 말했다.
“일단 민번부터 등록해 봐야겠군. 각성자 등록을 어떻게 속일지가 관건인가.”
과연 대한민국이다.
모든 것은 K-시스템으로 통하지.
내가 이 미친놈들 사이에서 지구를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척량아.
정지한이 말했다.
“우리 집안 성으로 해야겠군. 능력도 속일 겸. 알려지지 않은 분가 사람들 중 하나로 하면 되겠어.”
“……?”
그렇게 정리블이 탄생했다.
정수기, 정남향, 정비가, 정지한, 정지벽 그리고 뜬금없이 정리블인가?
‘정리 정돈 잘하는 이능인 줄 알겠어.’
* * *
“와우, 튜토리얼 이전의 차원은 공기부터 달달하네요~”
리블.
계약한 악마.
악마라고는 하지만 솔로몬의 명부며 오래된 사법(邪法)에 이런 놈은 없다고 한다.
스스로를 악마라고 부르긴 하나, 정지한의 말로는 악마가 맞는지도 모호하다고.
정확한 단어로는 ‘심연’ 정도로 생각하라고 했는데. 그 의미가 아득하여 나 같은 평범한 갓튜버는 머리가 빙그르르 돈다 이거예요.
밖에 나오자 붉은 눈동자는 빛 하나 없는 새카만 눈으로 돌아온다.
리블은 몸을 종이 인형마냥 팔랑이며 역시 튜토리얼 전의 차원은 최고이며 개박살 나기 전에 이걸 즐겨야 한다는.
지구 주민으로서 가슴이 찢어지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정지한은 말했다.
“선택에 너무 영향을 주게 될까 말을 조심했는데, 저자에게 얻어낼 건 무력보다 지식입니다. 비록 스스로 힘을 내려놓고 영락(靈落)했지만 최소 성좌, 그것도 마왕급의 존재이니까요. 다루는 데 주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대체 진짜 이름이 뭘까?
마왕급의 존재가 튜토리얼 전의 세계에 와서 무엇을 찾는 걸까.
그런 의문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는 순간 갑자기 심상치 않은 힘의 파동이 느껴졌다.
[주군 이건…….]
누군가의 습격? 아니면 공격인가.
일순 내공을 끌어 올리고 경계를 하는 찰나.
빛이 하늘에서부터 뻗어 내려와 리블에게 꽂힌다.
이건 대체!?
“와우?”
빛의 기둥이 리블에게 꽂히고, 놈의 옷자락이 부풀어 오른다.
놈이 말했다.
“문 파워 크리스털~ 변신~★”
나는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식겁했잖아!! 이딴 게 외차원의 심연이라고?
그의 손끝부터 발끝까지 새카만 문신이 새겨진다.
마치 담쟁이덩굴과도 비슷한 형태인데 자세히 보면 엄청나게 많은 문자들이 적혀 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래?
척량이 말했다.
[시스템 언어군요. 정교한 봉인 술식입니다. 계약자가 생겼고 인과율에 따라 힘 대부분을 봉인하며, 그로 인해 훗날 존재가 소멸하게 된다고 해도 자기 책임이라고 적혀 있네요.]
와. 시스템도 가차 없다.
아무튼 리블은 목 아래까지 문신이 생겼다.
정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성좌를 권속으로 넣은 것을 축하드리며 이만 저는 다른 일을 하러 가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신전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불러도 다시 나타나지 않아서 폰을 드는데 리블이 말했다.
“저런 인간은 보통 자기만의 법칙 안에서 매우 바쁘게 움직이거든요.”
“네, 그런 것 같더군요.”
“어리석은 짓이죠. 개미가 천 번을 죽든 십만 번을 죽든 그저 개미일 뿐인데~”
그는 엄청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더니 뒤를 돌았다.
“그래도 드디어 개미가 그럴듯한 짓을 했군요.”
“저와의 계약 말입니까?”
“네. 당신은 꽤 보기 드문 ‘혼돈의 조각’이니까요?”
“그게 무슨 뜻이죠?”
내 말에 그는 쓰러진 통나무 위로 올라가서 느긋하게 걸어갔다,
“운명이 어디까지 정해져 있다고 봅니까? 엄지척 군?”
“뭐 사주팔자를 말하는 건가요?”
“길흉화복을 말하는 정도로 운명이라는 게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그런 거죠. 인간이라는 종족의 평균 아이큐는 100, 사실 두 자리여도 이상할 건 없어요. 머리 위 분들은 인류와 돌고래와 코끼리 모두 비슷한 지적 생명체로 보고 있거든요. 다만 인구수가 인류가 더 많다 보니 시험 자격이 주어진 것뿐이고.”
“…….”
“뭐, 열심히 환경 파괴를 한 덕분이죠. 안 그랬으면 돌고래가 지구 상위 거주민이 됐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미친 소리를 태연하게 말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 녀석. 이차원에서 왔다면서 지구를 너무 잘 아는 것 같은데…….
아까는 붉은 눈이었지만 지금은 까만 눈이었다.
“그러다 보니까 결국 주어진 지능 안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한정이 되어 있어요. 거기다가 조직을 이루는 생명체다 보니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죠.”
“인간의 가능성은…….”
“……그건 인간이 인간을 찬양하는 매체에서 하는 말이고요. 당장 회사원만 하더라도 출근한다, 안 한다 두 가지의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하고, 후자는 병가든 월차든 낼 거 아니면 책임을 져야 한답니다.”
왜일까.
놈은 본래 성좌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하늘 높은 곳에 있다가 스스로 떨어져 인간이 되어 버린 놈.
그런 까마득한 존재임에도 왜인지 인류를 꽤 세심하게 지켜봤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인류의 가능성이 무한합니까? 30대 자가 없고, 직장 있고, 아이큐는 고등학교 이후로 계속 떨어지는 사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가능성은 이직 정도입니다. 뭐, 주식이나 코인을 시도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주어진 시간과 지능 한도 내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운명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거죠?”
일단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장단을 맞춰 주자.
“네. 대부분은 비슷비슷하게 삽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재미가 없죠. 그렇기에 여기에 ‘운’이라는 요소가 들어가요. 엄지 군?”
그는 나를 엄지 군이라고 부르기로 정한 모양이다.
“로또가 될 수 있죠. 찍어서 넣은 주식이 대박이 나거나. 그런 걸 뜻하죠?”
“네. 비슷합니다. 어쩌면 진짜 큰일을 하게 해줄 ‘귀인’을 만날 수도 있고요. 각성 자체가 적성과 유전자가 기여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 부분이고, 결정적인 건 ‘운’입니다.”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운의 총량도 정해져 있어요. 물론 최저한도도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재수 좋기만 한 인간이 없듯, 아주 재수 없기만 한 인간은 없는 거죠.”
“…….”
그는 인간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했다.
내가 그를 빤히 바라보자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가끔은 돌연변이 같은 개체가 나옵니다. 그 ‘운’의 총량과 최저한도가 정해지지 않은 존재죠. 그런 존재는 어디로 튈지 몰라요. 아주 일찍 죽어버릴 수도 있고, 튜토리얼 이후에도 살아남을지도 모르고. 이런 존재는 신도 예측이 어렵죠. 그걸 저는 ‘혼돈의 조각’이라고 부릅니다.”
“그게 저라는 겁니까?”
“으음. 제 추론은요. 사실 ‘혼돈의 조각’은 신들도 바로 알아보긴 힘들거든요. 맛이 간 인생을 십 년 넘게 질주하면 ‘아, 그 새끼 남달랐지.’ 하면서 후원이나 할 걸 그랬다고 후회나 하죠.”
‘혼돈의 조각’이라.
그가 말했다.
“정지 군은 당신을 ‘특이점’이라고 부를지 모르겠네요. ‘혼돈의 조각’이라는 단어 같은 건 모를 테니까. 당신은 주사위를 수만 번을 굴려도 다 다른 눈이 나오는 미친 존재니까.”
“……대단한 겁니까? 운의 상한선과 하한선이 없다는 게?”
주식으로 치면 한강 주 아닌가.
리미트가 없다는 거니까 개미 여럿 한강 보낼 것 같은데?
이 이야기를 하니까 그가 웃었다.
“그래서 정지 군이 ‘개미’인 겁니다.”
“…….”
“제 말을 다 이해할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이해하지 않는 편이 당신 같은 존재에게 더 도움이 되죠. 스스로 한계를 규정하지 않는 거니까.”
대충 그런 건가.
그가 말했다.
“자, 그러면 우리 엄지 군이 상한가를 칠지 한번 지켜보도록 하죠. 나도 이 종목에 올라타 버렸으니까.”
[저런 존재를 권속으로 둔 것을 축하할 일입니다만 반대로 근본 자체가 인간과 달라 계속 주의를 해야 할 것 같군요.]
‘역시 그렇지?’
[네. 인간을 좋아하긴 하지만 사람의 관점은 아닌 듯합니다.]
개미집 사다가 개미를 키운다고는 해도 개미 하나하나를 사랑하는 건 아니지 않나.
기껏해야 여왕개미 정도나 기억할 뿐이지.
[권속의 계약을 맺어도 다루기 쉽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정체불명의 성좌니까.]
그래. ‘한시적인’ 친구니까.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능력이 뭡니까?”
“호오, 엄지 군은 제 능력이 궁금한 모양이군요. 지금 대부분의 능력이 봉인당하긴 했습니다만……. 성장형 능력은 남아있죠.”
“성장형?”
그가 바닥을 짚자 이윽고 무언가가 땅 밑에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어억-”
아니, 미친……. 저거 방금 전에 죽인 범죄자들이잖아?
좀비가 되어 비척비척 땅 밑에서 기어 나오는 게 아닌가.
“네크로맨서? 아니 그런데 어떻게 신전 안에 있던 시신이 여기 땅 밑에서 기어 나오는 겁니까?”
내 질문에 그가 답했다.
“죽은 자는 땅으로 되돌아간다고 하잖습니까? 원래 땅이란 피안과 차안을 나누는 게이트 같은 거죠.”
“땅에서 좀비를 소환한다고?”
자기가 죽인 시체를? 아니면 모든 시체를? 어느 쪽일까.
“비주얼적으로 좀비 영화랑 비슷해서 상큼하지 않나요? 엄지 군~”
망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