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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봉으로 레벨업-155화 (155/305)

제155화

어둠 속으로, 그의 발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내공을 돋구어 시력을 강화시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 그러나 소리를 들으며 걸으니 이내 빛이 있는 구간이 나타났다.

벽에 그려진 문양들이 희미한 빛을 내며 주변을 밝힌다.

그 사이로 정지한은 걷고 있다.

[아래로 내려가고 있군요.]

맞아. 그러고 있어. 지하로…… 향하는 거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한참을 걸었을까.

이윽고 거대한 지하 공동이 나타났다. 넓이는 5층 건물이 들어가도 넉넉해 보이고, 그 가운데에는 제단이 하나 있다.

제단 아래로 길게 홈이 파져 있었는데 검붉은 자국이 보이는 게 틀림없이 피를 흘려보내도록 만든 곳이다.

양이나 닭을 잡아서 제물로 바쳤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설마하니 사람은 아니겠지?

[모르죠. 이 공간 자체가 지구의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 그렇지. 그리고… 절망이 보여준 그…… 괴이한 이형의 존재들은 분명 인간을 먹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흡사 성찬에 초대된 게스트처럼 즐거이 그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떤 것은 알기 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

광기가 심마가 되어 올라오려는 것을 억누른다.

그리고.

그 제단에는 웬 사내가 앉아서 이쪽을 보며 히죽거리고 있다.

“지하아아안.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아아? 저 심심해 죽을 것 같아서 이미 몇 놈 죽여 버렸다구요?”

지나치게 쾌활한 목소리.

비릿한 피 냄새가 훅 끼쳐온다.

정지한이 손가락을 퉁기자 주변이 밝아졌다. 그러자 사내의 얼굴이 그대로 보였다.

‘검다.’

그 이상으로 표현하기 어렵다.

흑색 머리카락에 새카만 손톱과 발톱.

피부는 색소 없이 창백하고 옷은 그저 검다.

기묘하게도 검은 옷이라고 해도 반사되는 광택이 조금은 있어야 한다. 하지만 흡사 빛을 삼킨 것 같은 색.

마치 검은색과 흰색으로만 만들어진 인간 같아 보였다.

“또 범죄자를 잡아먹은 건가.”

사내의 눈동자는 붉다. 그게 무채색이 아닌 유일한 색.

동공은 세로로 길게 나 있어서 이자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고.

“음~ 그 정도는 당신도 허가한 거잖아요? 이 장소의 비밀을 지키려고 저를 여기다 놔둔 거면서 비난하시면 안 되죠. 어차피 제정신인 인간은 여기에 들어올 수도 없게 만들어 놓은 게 정지한 당신이면서.”

정지한은 두통이 밀려오는지 이마를 꾹꾹 눌렀다.

문득 사내가 서 있는 제단 아래에 원이 둥글게 그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일단 저… 얼빠진 놈은 인간이 아니며 극히 위험한 이차원 존재입니다. 편의적으로 말하면 심연의 조각 정도로 해두죠.”

심연의 조각?

“와하하하! 그렇게 표현하는군요. 요즘 중학생들은 그런 거 좋아하나?”

‘닥쳐라. 생긴 것부터 중2병인 남자!’

이미 손발톱에 까만 매니큐어인지 뭔지가 있다는 점에서 네놈은 중2병이야!

척량이 말했다.

[일단 인간이 아닙니다. 주군.]

그래……. 누가 봐도 저게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놈은 없을 거야.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리블입니다. 러블리의 리블이에요~”

무슨 큐티 청량 아이돌 이름 같네.

손 하트까지 하는 게 딱 그 모양새다.

“거짓말입니다. 보통 이러한 존재들은 진짜 이름을 감추니까 현혹되지 마시길.”

“거참, 너무하네요. 지한 군. 이렇게까지 사람을 막 대하다니.”

그러며 웅크리고 우는 포즈를 취한다.

거대한 체구가 웅크리는 게 볼만하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어쨌든 사람도 충분히 잘 먹었고. 인신 공양도 잘된 셈이랍니다.”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그에게 정지한은 무표정하게 답했다.

“네놈이 알아서 한 거지.”

“어라? 저한테 핸드폰 개통해 준 사람이 누구더라? 이쪽 차원은 폰으로 할 수 있는 게 많다고요~ 굳이 대규모 현혹 마법을 거는 대신 그냥 마약 밀매 카르텔의 폰 번호만 따도 어떻게든 되더라고요.”

여기도 인터넷 되는구나.

아니, 그 전에… 어떻게 한 거야. 이 자식?

“역시 인류는 참 친절해요. 저 비트 코인도 받았습니다!”

“……뭘 했는지 알고 싶지도 않군.”

그 코인은 죽어 있는 저 시신들의 것 중 하나일까?

알 수는 없다.

확실한 건 눈앞의 사내는 인간의 지혜로는 측정하기 어려운 존재라는 것.

정지한은 고개를 내젓더니 말했다.

“계약이다.”

정지한이 나를 본다.

잠깐잠깐잠깐.

계약? 갑자기?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잠깐만요.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요.”

내 말에 리블이라고 스스로를 밝힌 사내는 히죽 웃으며 나와 정지한을 번갈아 바라본다.

“일단. 심연의 조각이라는 이 리블…….”

“러블리의 리블이랍니다~★”

미친놈아. 그만해. 범죄자 시체 배경으로 K-하트 하지 마!

“그……. 리블이라는 사람과 계약을 하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는 거죠?”

정체불명. 적어도 인간은 아닌, 이차원의 이해 불가능한 존재와 계약을 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

“호오, 바로 수락하지 않고 물어본다고요? 보통은 저와 계약하고 싶어 부모나 자식의 심장을 바치는데 말입니다. 잉카나 마야에서는 제 힘을 얻기 위해 수없이 많은 이들의 목과 심장을 바쳤는데 말이죠.”

와, 벌써부터 섬뜩해지네. 망할.

정지한이 말했다.

“짐작하겠지만 위험한 물건이긴 합니다. 그 본질은 인간이 측정하기 어려운 마(魔)로, 우리의 세계로 막 넘어와서 무력해진 순간. 인과율의 지배를 받아 이대로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의 말에 아까의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저 리블은 사람을 ‘잡아먹었다’. 그리고 그걸 ‘인신 공양’이라고까지 말했고.

‘몹시 위험하다’라는 표현은 어쩌면 겸손한 단어일 수도 있다.

정지한이 이마를 꾹꾹 눌렀다.

“지척 씨가 계약하신다면, 그 힘을 세계를 위해서 쓸 수 있을 겁니다.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하지만 저 역시 확신은 없습니다. 이건 ‘처음’ 하는 거니까요.”

“그렇겠죠. 이런 존재와 두 번 계약해 봤겠어요.”

“……네.”

정말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다는 거네.

“제가 계약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처분할 겁니다. 지척 씨 외에 이것을 활용할 방도가 없다고 판단하니까요.”

정지한이 담담히 말하는 사이. 리블은 나를 빤히 바라본다.

처분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모를 자가 아닌데 그의 표정에는 공포라고는 전혀 없었다.

“흐음.”

붉은 눈동자가 흡사 핏물과 닮았다.

“권속 계약이라는 부당한 계약서나 들이밀 생각인가 보네요.”

리블의 목소리는 정지한의 속내를 말했다.

“어차피 네놈은 외차원의 파편 아닌가. 튜토리얼이 끝나지도 않은 이 세계에 오기 위해서는 달리 선택지가 없을 텐데?”

리블의 검은 비단 같은 머리카락이 미끄러지며 흘러내린다.

키는 180 후반? 어쩌면 그 이상인가.

어두워서 짐작은 어려우나 어쨌든 사람을 압도하는 체구.

상당한 근육질이지만 사람을 압도하는 건 아마 그 특유의 기묘한 광기 어린 분위기 때문이겠지.

그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호오, 보기 드문 영혼이긴 하군요. 거기다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어 인연의 힘도 충분하고 생긴 것도 잘생겼네. 심지어 그 나이까지 순수성도 보존되어 있고. 강인하고. 이런 존재는 꽤 귀한데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그는 손을 뻗다가 둥근 원으로 이루어진 결계에 막혔다.

그러자 그의 거대한 손이 고양이를 부르듯 까딱인다.

“잠깐 들어올래요?”

“들어가면 저 시체처럼 되는 겁니까?”

내 퉁명스러운 답변에 그가 답했다.

“아니오. 죽지 않을 거예요. 악마는 거짓말 안 한답니다아. 그러니 잠깐 들어와요.”

악마는 거짓말을 안 한다라…….

아까 정지한이 분명 이 녀석은 거짓말을 한다고 했었다.

누구의 말이 맞는 걸까?

사소한 직감에 물어봤지만 왜인지 모호한 감각만이 되돌아온다.

일단 떠보기로 했다.

“그러면 리블도 러블리의 리블이 맞긴 한 겁니까?”

“네. 러블리의 리블입니다. 하지만, 다른 의미도 있죠. 옛날 게임에서 RGB 0, 0, 0의 검은색을 그렇게 부르더군요. ‘리얼 블랙’의 줄임말이래요.”

이름 정말 대충 짓는구나. 아주.

정지한이 리블에게 말했다.

“권속 계약이라고 해도 문제는 없다. 네 녀석에게 어차피 과도한 제약은 걸리지 않는 것을 알아. 긴급 명령 같은 것에 따르는 정도겠지.”

“그렇기는 하죠. 그래서 지한 군은 원자폭탄에 안전핀 몇 개 꽂아서 사용해 보겠다는 거죠? 그게 잘되려나~? 이 심연은 도무지 모르겠는데?”

원자폭탄이라는 말에 내가 정지한을 바라본다.

“봉인된 상태지만 그것만으로도, 때에 따라서는 소형 원자폭탄 정도의 화력을 낼 수 있긴 합니다.”

그래서 이게 첫 번째 퀘스트라 말하는 거군.

그 정도의 강력함을 내가 제어할 수 있다면, 확실히 미래에 도움이 된다는 것.

내가 물었다.

“사람을 잡아먹습니까?”

“네. 잡아먹습니다. 좋아하거든요.”

그는 빙긋 웃는다. 티 없이 맑은 표정이었다.

“적어도 범죄자만 먹는 걸로 타협이 가능합니까? 살인을 밥 먹듯이 하고 다니는 그런 무기수들이요.”

“……원하신다면.”

결국 나는 성큼 걸어갔다.

정지한이 말리려고 팔을 뻗었다.

하지만 이 결정에 망설임은 없다.

안으로 들어가니 그는 한참 웃었다.

“신기하네. 나를 보고 미치지 않고, 이 시체를 보고도 제 발로 안으로 들어온다라.”

-1따봉을 받으셨습니다.

이 악마도 따봉을 주네.

“왜 이 세계에 온 겁니까? 힘을 봉인하고요.”

“찾고 싶은 게 있거든요.”

“그게 뭐죠?”

“악마는 거짓말 안 합니다.”

“그 말은 대답해 주기 싫다는 뜻이겠네요.”

“네.”

문득 그의 왼쪽 손등에 새하얀 칼이 꽂혀 있는 게 보였다.

그것은 손등을 관통해, 손바닥을 뚫고 나와 있다.

“이건 뭐죠?”

“봉인 장치. 이걸 풀면 계약이 성사되고 우리는 한시적인 친구가 될 수 있을 테죠. 어때요? 한시적 친구 사이가 되어 볼래요?”

그러면 이놈은 한 손만으로 이 많은 범죄자들을 와드득까드득한 거야? 분명 이 중에는 각성자들도 있을 텐데도?

심지어 원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그는 비밀스럽게 다 들리는 목소리로 일부러 속삭인다.

“친구끼리는 안 죽이죠?”

내 질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죽입니다.”

“그렇다면 친구의 목표를 도울 수 있겠습니까?”

“지한 군이 데려온 걸 보면 당신은 분명 ‘특이점’이겠군요.”

특이점? 그게 무슨 뜻이지?

정지한을 돌아본다.

정지한은 자신의 약지를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제약’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힘주어 리블의 손등에 박혀 있는 단검을 뽑았다.

“꺄핫! 꺄하하하하하!”

악마는 경망스럽게 웃었다.

소형 원자폭탄이 웃는 소리치고는 참 경망스럽다.

그가 말했다.

“좋아요. 엄지척. 나는 당신의 한시적인 친구로서, 당신을 죽이거나 배신하는 일 없이 당신의 소원을 들어주겠습니다. 그 대가로 얻는 건 이 대지에서 걸을 권리. 이 원 밖을 나갈 권리. 만약 어겼을 시 잃게 되는 건 제 진짜 ‘이름’.”

우우웅-

그 순간 주변을 감싸던 원 모양의 결계가 울리기 시작했다.

“말해 봐요.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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