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봉으로 레벨업-154화 (154/305)

제154화

내 질문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튜토리얼이 끝나고 나면 인간 세상은 멸망하긴 할 겁니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은 이미 이것을 감지했죠. 대표적으로 열거하자면 저와 엄지척 씨 그리고 미국의 레인 시커와 A/B, 정비가, 그리고 이미 묵시록을 받아든 오래된 몇몇 폐쇄적인 컬트 집단들이 있겠군요.”

척량이 말했다.

[레인 시커. 미국에서도 강력하기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헌터입니다. 그리고 예지 능력자이자, 강력한 대마법사로 알려져 있기도 하죠. 예지 능력을 이용해서 미래의 마법적 지식을 가져와 강해졌다……는 이야기로 유명합니다.]

나도 들어 본 적 있어. A/B의 팀원이잖아.

본명인지 가명인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유명한 예언가다.

그가 어떤 예언을 했는지는 A/B의 길드 수뇌부 소수만이 알고 있다.

정지한이 손가락을 딱딱 튕겼다.

“정해진 멸망 앞에서 소수의 인간들은 제각기 방식으로 미래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세계를 구원하고자 하는 자들. 세계의 파멸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다른 세계로 탈출하려는 자들. 파멸의 주체에게 영혼을 바쳐 영생을 누리려는 자들 등등……. 여러 형태가 존재하죠.”

[십인십색(十人十色)이군요.]

음…. 튜토리얼이 끝난 후, 단순히 인류가 지구의 지배자가 아닌 수준을 넘어 왜 그리 대규모 멸망이 났는지 알 것 같은데, 이거.

혹시 막판의 막판까지 서로 통수 치다가 와르르 맨션 된 거 아님?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악의 예상이군요.]

그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설마하니 막장 조별 과제 엔딩이라니……?

정지한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엄지척 씨가 말씀하시기 전부터 세계를 파멸로부터 지켜내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아…….”

퍼즐이 조금 맞춰진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제약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말하거나,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지금의 제 사회적 위치는 그다지 ‘진솔한 대화’를 하지 않아도 일을 진행시킬 수 있는 위치니까요. 그 부분이 도움이 되었죠.”

[확실히. 그는 한국의 최상위 기득권 집단인 재벌 가문의 일원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능력을 입증해 보이기까지 했으니, 그 권력과 재력으로 일을 처리했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았을 겁니다.]

척량의 말대로였다.

그가 미래의 파멸을 알고 있다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많지.

정지한이 말을 이었다.

“여기도 그중 하나죠. 미래의 파멸을 막기 위해서는 신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으니까요.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음?”

정지한이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신이라는 것들 중 일부는 이 세계의 파멸을 바라고 있습니다. 일부는 관심이 없고, 일부는 세계가 지켜지기를 바라죠. 그들도 결국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평소와 같은 어조에 평소보다 조금 더 느린 말투.

그런데 왜인지 나는 희미한 분노를 읽었다.

그것과 별개로 사람이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르듯 신도 신마다 생각이 다를 것임을 안다.

당장 신화만 봐도 악신과 선신, 마신과 성신이 있다.

거기에 그리스 신화처럼 불륜과 혼외 자식과 삼각관계와 살인이 버무려진, 요즘으로 치면 케이블식 종편 드라마 신화도 있지 않나.

“그리고 저는 당연히 지척 씨와 협력할 겁니다. 이미 제가 그렇게 해 오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 알아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죠?”

“제가 지척 씨에게 설명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것.”

“제약 때문이군요.”

“…….”

그는 대답하지 않고 나를 본다.

그것이 대답이 되었다.

“하지만. 믿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궁극적으로 미래의 당신을 우선하고 있다는 것을요. 그게 세계를 지키는 방법임을 압니다.”

“미래라. 지금의 제가 아니고요?”

“……그 또한 중요합니다. 과거가 있으니 미래가 있는 거니까요.”

그의 말에 [사소한 직감]이 속삭였다.

뭔가 행간에 빠진 말이 있다고.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그가 내게 호의적이라는 것은 알겠다.

“좋아요. 믿겠습니다. 이제 와서 안 믿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감사합니다.”

“그래서. 튜토리얼은 언제 끝나죠?”

“그 또한 제약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리 멀지 않았다는 점은 확실히 말씀드리죠.”

그 순간, 그의 약지가 터졌다.

팡!

핏물을 뿌리며 손가락 하나가 사라지자 나도 모르게 정신이 멈춘다.

그 어떤 스킬의 자취도 느껴지지 않는다.

정지한은 한숨을 쉬었다.

“이 정도 발언도 제약에 살짝 걸렸군요. 그래도 다행입니다.”

그 순간, 숫자가 떠오르더니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 후.

우우웅-

손가락이 처음부터 있던 것처럼 돌아온다.

“어떻게 한 거죠?”

“매번 쓰지는 못합니다. 여기는 괜찮은 장소라서 가능한 거고요.”

되감기(Rewind).

그는 그렇게만 답했다.

“일단… 어……. 긍정적으로 보면 제약을 어겼을 시에 어떻게 되는지 알게 되었군요.”

“긍정적으로 봐주셔서 기쁘군요. 저희의 관계도 좀 더 미래 지향적으로 변할 수 있겠습니다.”

약지 하나 터뜨리고 미래 지향을 논하니 뭔가 정신이 아득하지만…….

그래. 그런 셈 치자.

일단 이놈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알겠다.

물론, 누구보다 침착하고 또 누구보다 이성적이며, 누구보다 일분일초를 분해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게 사람 사는 건 아니지 않나.

방금 그것도 고통도 당황도 없이 여상한 목소리로 손가락을 복구시키는 게…….

‘사람으로서 중요한 뭔가가 빠져버린 느낌이…….’

하지만 깊게 생각하진 말자.

어차피 헌터 중에 제정신인 놈 별로 없다.

이놈은 자세히 말할 수 없는 미래를 알고 있고 그것 때문에 손가락도 방금 날려 먹었으니 어지간하면 깊이 안 캐묻는 게 좋겠지.

인체 폭파 쇼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

[네. 방금… 그 어떤 스킬도 마력의 기색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신력도 느껴지지 않더군요. 분명 우리는 감지할 수 없는 상위의 힘입니다.]

그래. 이 느낌은 어렴풋이 느낀 적 있어.

[혹시 절망의 시험 때입니까? 주군.]

응. 그래. 그때 본 새카만 어둠이 이런 느낌이었어.

눈은 존재를 인식하고 있으나 청각도 후각도 육감도 거기 없다고 부정했을 때의 감각.

그저 눈 감으면 처음부터 없는 것처럼 존재하는 느낌.

그가 손가락을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

“일단 튜토리얼이 끝나는 건 막을 수 없습니다.”

“음?”

그 순간, 새끼손가락이 우드득 부러진다.

끔찍한 고통임에도 그는 표정 하나 바뀌는 법 없이 차분하게 다시 현상을 되감았다.

“튜토리얼. 지식을 전달하는 방법론이며, 기초적인 것을 가르치는 것. 더욱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정보를 교습자에게 익히게 하는 것을 뜻한다.”

그는 사전에 있을 법한 문구를 또박또박 읊었다.

이번에는 멀쩡하다. 그냥 사전의 내용이기에 그런 걸까.

“이미 오래 전에 튜토리얼이 시작되었으니까요.”

이건 괜찮은 모양이다.

[미래의 이야기가 제약 내용인 것 같군요. 과거의 이야기는 괜찮은 걸 보니.]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판단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일단 그에게 대답했다.

“몬스터 웨이브 사태인가요?”

“네. 수없이 많은 게이트가 생겼을 때, 그때가 첫 번째 튜토리얼의 시작이었습니다. 인류라는 종(種)이 변화된 환경에서 몬스터와 게이트의 상호관계를 이해하고 각성자들이 어떻게 각성하는지를 파악할 시간을 준 거죠.”

“…….”

그 튜토리얼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왠지 주먹이 살짝 떨렸다.

“머리 위에 있는 분들 생각은 알 수 없군요.”

“정원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보통 잔디 한 포기, 한포기의 고통을 이해하진 않죠. 정해진 길이로 잘라낼 뿐입니다. 농약을 뿌려 못 견디고 죽는 개체가 나온다면 뽑아서 버립니다.”

“그래도 정원사는 정원수들이 푸르길 바라지 않나요?”

“적어도 저희는 정원수는 아닙니다. 지금은 잡초인지 잔디인지 솎아내는 과정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부모님은 ‘튜토리얼’에 솎아진 건가.

[주군…. 심마가 오고 계십니다. 조금만 깊게 심호흡을…….]

알아. 척량.

내기를 안정시키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지금의 나로서는 ‘정원사’는커녕, 그 아래의 아래의 아래의 아래인 빌딩만 한 촉수조차도 이겨낼 수 없다.

강해졌다고 으스댔지만 결국 개미의 으스댐일 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군요.”

“예. 오래 전부터 시작한 튜토리얼이니 슬슬 끝날 때도 오는 셈이죠.”

하, 나 막차 탄 거였네.

튜토리얼 끝나기 전에 각성한 거였어. 내 동생도 각성석을 먹어서 됐다고는 해도, 각성시켰고.

“지금은 그나마 안전하게 레벨 업을 하는 구간이라 할 수 있겠죠.”

속 시끄러운 정치 뉴스 몇 개가 떠올랐지만 왠지 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다음 대선에 투표는 할 수 있을까.

인류는.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엄지척 씨는?”

그 말에 나는 편법을 느꼈다.

자신은 제약 때문에 말할 수가 없으니 내게서 답을 유도하려는 셈이다.

“저도 많은 걸 알아내진 못했습니다. 굳이 생각한다면 앞으로 늘어나게 될 던전을 소멸시키고, 몬스터들을 몰아내고, 인류가 자생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든다 정도?”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옛날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렇지. ‘그 광경’을 본 이상.

원숭이라도 옛날로 못 돌아가게 된다는 걸 안다.

“네. 그렇죠.”

“그렇다면 어떻게든 해봐야겠죠. 방법이 있을 겁니다. 엄지척 씨는 어디까지 괜찮았으면 좋겠습니까?”

“음…….”

이건 어렵군.

일단 절망이 보여준 그 광경 속에서 나랑 무척이 딱 둘만 무사하다고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

나는 욕심 많은 놈이라 먹을 것도 입을 것도 필요하다.

거대 촉수 괴물 스테이크를 구워 먹으며 산다고 한들 후추도 없으면 어떻게 밑간을 해먹겠나.

“일단 눈에 닿는 데까지는 어떻게든 해보고 싶습니다.”

“막연하군요. 하지만… 의외로 정답에 근접하긴 했습니다.”

“방법이 있나요?”

내 질문에 그가 고개를 젓는다.

“아직은……. 아직은 말씀드릴 수 없겠군요.”

“음.”

답답하다.

하지만 폭파 쇼는 그만 보고 싶으니 이 정도로도 충분히 괜찮은 진전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생각해 둔 게 있다는 거니까.

[네. 거기다 재생을 무한하게 하진 못할 겁니다.]

힐러도 회복하는 데 마력을 쓰고 한계가 있다. 이건 현상을 되돌리는 스킬이니 무한하게 쓰지는 못할 터.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그가 이렇게 일분일초를 쪼개가며 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면 지척 씨. 이번에는 제가 중요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

“지척 씨의 능력은… 직업을 무시하고 능력을 구매해서 익히는 것. 맞습니까?”

확실히 거기까지는 추측하고 있었나 보다.

하긴 그간 내가 너무 여러 가지 능력을 보여주긴 했지.

“맞습니다.”

내 말에 그는 예상대로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그러면 지금 당장이라도 언제 어디서든 능력을 구매할 수 있습니까?”

으음, 그래도 따봉을 받아서 능력을 업그레이드한다는 것까지는 예상 못 한 것 같네.

[그것도 미심쩍긴 합니다만…….]

“지금도 구매할 수 있죠.”

“그렇군요. 아주 좋습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수단과 방법을 별로 가리지 않는 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척 씨에게도 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저를 믿어 주시겠습니까?”

그는 서서 나를 본다.

“믿어야죠. 하지만, 꼼꼼히 따져 볼 겁니다. 아셨어요?”

달이 어두워진다. 그의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시죠.”

“예?”

“세계를 구하기 위한 첫 번째 퀘스트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퀘스트?

그러고서 그는 어둠 속으로 걸어가 버렸다.

따라가 봐야겠지?

[예. 주군. 그러나 각오는 필요합니다.]

좋아. 가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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