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아무튼 미적거릴 때가 아니다. 정지한을 당장 만나야겠어.
내가 전화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척량이 막았다.
[하루만 더 생각해보는 건 어떠십니까. 주군?]
“하루?”
[예. 정지한의 목적에 대해 알 수 없는 게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문득 손이 떨리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아직 여파가 좀 남아 있습니다. 하루만 더 쉬는 건 어떠십니까. 주군.]
“…….”
어쩔 수 없나.
“좋아. 오늘은 쉬면서 생각해 보겠어.”
[현명하십니다.]
“그러면 수련하러 다녀올게.”
[예?]
척량이 벙 찐 얼굴이 된다.
“이렇게 마음이 복잡할 때는 몸을 움직이는 게 최고야.”
[어… 음……. 그건 휴식이 아니지 않을까요?]
“아냐. 헬린이에겐 헬스가 최고 힐링이라고. 그것도 몰라?”
척량의 여우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여우가 저런 표정도 짓네?
“그럼. 다녀올게. 무신의 수련 공간.”
번쩍!
나는 즉시 무신의 수련 공간으로 이동되었다.
척량에게 말한 것처럼 머리가 맑아질 때까지 몸을 움직이려는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긴 해.
그때 싸웠던 감각.
그게 몸 안에 남아 있거든.
지금 그걸 떠올리며 무공을 수련하면 더욱더 잘 체득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후우…….”
크게 숨을 내쉰다.
“무신이시여! 저는 더 강도 높은 수련을 원합니다! 적들이 나오게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외쳤다.
여기는 무신이 직접 만든 수련 공간. 그리고 수련을 위해서 도움을 주는 공간이다.
그렇다면, 이곳에 적들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안 되면?
그러면 말고.
안 되면 마는 거지, 뭐.
그런데 내 외침에 반응한 것은 무신이 아니었다.
[무신의 수련 공간 업그레이드 이용권 – 1,000,000따봉]
무신이 시간의 신과 협력하여 만들어낸 수련 전용의 공간.
이 안에서 수련하는 동안 외부에서는 시간이 정지한다.
업그레이드를 위해서는 따봉을 지불해야 한다.
*사용 설명서는 별도 구입해야 한다.
100만 따봉? 이 지옥에 튀길 날강도 놈들아!
“여기서 따봉을 받는다고!!!??”
와… 이 새끼들. 진짜 악착같이 장사하네.
아니, 무슨 따봉을 100만이나 달래냐?
무신의 수련 공간 가격이 100만이었어. 이 새끼들아!
“와, 씨. 대단하다. 진짜 대단하다.”
방금 전까지 절망의 시험 후유증 때문에 달달 떨었던 게 싹 날아갈 만큼 충격적이었다.
봐라. 나 지금 손도 안 떤다?
어이가 가출해서 그래요, 지금.
이걸 보고 안 돌아버리게 생겼냐? 특히 이 부분이 더 빡쳐.
사용 설명서는 별도 구입하라굽쇼? 이 새끼들 장난하냐!
“하…. 독과점… 진짜 조… 같다…….”
씨근덕거리며 화를 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상에 두 번 없을 DLC 팔이를 하고 있는 시스템이지만.
이만큼 비싸다는 건 그만한 값어치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해 보자. 100만 따봉 질러! 그리고 사용 설명서 내놔!”
무신의 수련 공간 업그레이드를 구입하자, 수련 공간 주변이 갑자기 ‘드드드드!’ 소리를 내며 변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수련장의 전체 면적이 점점 넓어진다.
본래 몇백 미터 수준의 크기였던 수련장이 끝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어졌다.
이게 끝은 아닐 테고…….
설명서는 얼마야? 빨리 내놔 보라고!!
[무신의 수련 공간 1차 업그레이드 사용 설명서 – 100,000따봉]
업그레이드된 무신의 수련 공간의 사용을 위한 설명서.
10만이나 하냐!!
이 새끼들 진짜 돌았나. 끝까지 따봉을 짜내 보시겠다?
“하아…. 구입.”
그래도 구입은 해야지.
여기서 뒤로 가기 할 수도 없고, 환불도 안 되니까. 그렇게 구입하고 나자, 내 앞에 얇은 책자 하나가 생겨났다.
그걸 손으로 잡아채서 열어 보자, 그곳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무신의 수련 공간 사용 설명서]
무신의 수련 공간 내부에서 수련할 수 있는 시간은 48시간이에요. (๑╹ワ╹)
무신의 수련 공간 내부에서는 굶주림이 없어요!ƪ( ˘ ⌣˘ )ʃ
무신의 수련 공간 내부에서는 수면도 사라지지요. (*^▽^*)
무신의 수련 공간 내부에서는 상상하는 적이 나타나는데. 이때 구현되는 적은 직접 만나 보았던 적들만 나타난답니다! ( ˃⍨˂̥̥ )
그래도 무신의 수련 공간 내부에서는 죽지 않으니 안심이죠?
거기다 무신의 수련 공간 내부에서는 그 어떤 부상이라도 치료된답니다.◝(⁰▿⁰)◜
무신의 수련 공간 내부에서는 수련을 위한 도구와 기계 장치를 상상만으로도 구현할 수 있다는 점도 잊지 마세요! \ \ \٩(。•ㅅ•。)و/ / /
“이여……. 임티 참 귀엽다. 10만 따봉에 한 페이지도 안 되네, 이거? 그냥 가르쳐 줘도 되잖아, 이 새끼들아아아!”
이럴 것 같았다.
하지만 익숙한 블로그 알바 포스팅 말투가 여기서도 나올 줄 몰랐다.
이거 쓰는 놈은 뭐하는 놈인지 모르겠지만 무신과 연계해서 사업 좀 하는 게 틀림없다.
그야말로 기만 오브 기만의 독과점 세상에서.
신들이 얼마나 따봉에 눈이 돌아버렸는지 알 것 같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새끼들은 기어이 나한테서 백만하고도 십만 따봉을 또 받아 갔고.
내 따봉은 또다시 바닥을 향해 내려갔으나… 어쨌든 뽕은 뽑아야 하지 않나.
일단 이 얇디얇은 10만 따봉짜리 A4 종이를 그림자 주머니에 팔랑팔랑 넣고 책자에 쓰인 대로 해보기로 했다.
상상하기.
‘일단 내가 만났던 적들을 상상해 보면 되겠지.’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저 상상을 시도하는 것만 해도 손끝이 다시 떨려오기 시작했으니까.
“끼끼끼끼끼끼끼끼.”
“카아아아아아아아.”
절망이 보여 주었던 끔찍한 촉수 괴물.
높이가 빌딩만 하고, 촉수 하나하나가 집채만 한 크기를 자랑한다.
“하……하하하하.”
압도적인 공포 속에서 정신이 나갈 것 같다.
차라리 진짜로 정신이 나가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미치고 싶어도 미칠 수 없으니까.
“이 집 따봉값은 제대로네.”
역시 무신. 이 정도는 해 주신다 이거지?
“그러면 땀 좀 흘려 보자고.”
억지로 모노 블레이드를 움켜쥐었다.
#가보자고.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촉수가 떨어져 내렸다.
콰과과광!
재빠르게 보법으로 피해 내면서, 감각을 되살린다.
눈으로 놈의 움직임을 보고, 본능적으로 그걸 피할 방법을 깨우친다.
자. 본격적으로 수련을 시작해 보자고.
* * *
“허억… 허억…….”
내공을 전부 썼다.
온몸의 근육이 파르르 떨린다.
모든 힘을 쥐어짜 냈다는 신호. 하지만 무시한다.
서컹!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도망 다니고, 몸을 굴렸다.
이 공간에도 슬슬 익숙해져 간다.
그… 짭 블로그 포스팅……의 설명대로 수련 공간에서 절대 죽지 않는다.
부상을 입어도, 곧 나아 버린다.
말 그대로 [무신의 수련 공간]인 셈이다.
하기사 수련 중에 죽으면 그것도 이상하지.
대신 통증과 마력 소모까지는 어쩔 수 없다. 그리고 피로 누적도.
그대로 지쳐서 주저앉자, 괴물 녀석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전투를 멈추고 내가 사라지길 깊이 바라기만 하면 놈은 사라진다.
“그래도 성과는 있네.”
놈을 이기지는 못했지만 공포를 이겨 내는 것까지는 내 힘으로 가능했다.
나는 시험 삼아 검기를 훅 휘둘렀다.
그러자 검기가 흡사 초승달처럼 날아가 먼 곳에 박혔다.
콰과과광!
그뿐이 아니었다.
예전보다 훨씬 더 세밀하게 검사(劍絲)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몸 안에서 기를 기화(氣化)시켜서 일순 폭발적인 힘을 내는 것도 가능해졌다.
그 빌딩만 한 촉수 놈에게 서른 번쯤 죽으니 가능하게 되더라.
‘내공심법 하나 제대로 배운 다음, 실전을 빡세게 하니까 이런 성장 속도가 나오네.’
놀라워라.
아니. 이게 전부 천무지체 탓이겠지만. 성장 속도에 이렇게까지 보너스를 주나? 대단하네.
“이제 슬슬 시간이 다 되었나?”
그렇게 무신의 수련 공간에서 밖으로 나왔다.
척량이 내가 들어가기 전과 똑같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주군?]
“다녀왔어.”
[확실히 감각이 조금 이상해지는군요. 그래서 마음은 편해지셨습니까?]
“나름대로는.”
나를 지글지글 끓이고 나니 희망이라는 게 생겼다.
뒤지지 않으려면 뭐라도 해야지 어쩌겠나.
원래 그렇지 않나.
삼일절에 태극기 들고 왜놈 상대로 시위하던 일러스트는 모든 교과서에 실린다.
다들 멋있고 대단하고 의기 있었다.
그 속에서 보이던 희망은 언제나 희고, 순수하고, 강하고, 의연하지 않았나.
허나,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미래를 알아서 조국 광복을 100% 확신했겠나.
일단 이 상황이 엿 같고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변하니까 달려가는 거지.
여기까지 갈 것도 없어요.
회사에서 자살하는 대신 이직할 곳을 찾아보는 것도 그런 거고, 빚 때문에 파산하고 회생 신청 찾아보는 것도 그런 거고.
아무튼 뭐라도 해야지.
[장난스럽게 말씀하시는 것치고는 너무 스스로에게 가혹하신 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만.]
나는 척량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천무지체 대단하더라. 이거면 어떻게든 될 것도 같다는 용기가 나요.”
[그건… 잘되신 것 같군요.]
역시 척량은 여전히 나를 걱정하고 있다.
“그리고 역시 생각해 봤는데.”
[예.]
“시간 끌 거 없어. 정지한과 상담을 해 보자고.”
척량에게는 한순간이지만 나에게는 이틀이다.
이틀을 수련 공간에서 미친놈처럼 칼만 휘두르다 나온 셈.
척량은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주군의 눈빛이 조금은 변하신 것 같습니다.]
“왜. 이제 좀 안심돼?”
내 말에, 방금 전의 내가 그랬듯 척량도 답하지 않았다.
[주군의 뜻대로 하소서.]
역시 걱정은 되는 거겠지.
* * *
일단 급한 일이니까… 시간은 좀 늦었지만 연락해 볼까?
전화로 하기는 조금 그렇고, 메신저로. 메신저도 안 읽는다 하면, 다른 일을 하면 되니까.
-정지한 대표이사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연락드립니다. 이걸 보신다면 혹시 대화를 나눌 수 있으실까요?
그러자. 놀랍게도.
보내기가 무섭게 1이 사라지더니 답신이 바로 왔다.
뭐야. 이 인간. 안 자고 폰 보고 있었나?
-제가 일이 있어서 임진강 쪽에 나와 있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임진강? 이 새벽에? 거기 군부대가 주둔 중인 데잖아?
-만나 뵙고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제가 그쪽으로 찾아뵈어도 될까요?
-좋습니다. 주소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인간은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링크를 보내네. 그런데 이 새벽에 임진강 쪽에는 왜 가 있는 거야?
[인적이 드문 곳입니다. 위험한 것은 아닐지…….]
솔직히 거기 가서 서류 정리하고 주주총회 할 일은 없잖아.
아마… 정상적인 일은 아니겠지.
이 인간 꿍꿍이 많은 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뭐 어쩔 수 없나.
자리에서 일어나서 마법으로 몸을 씻고, 곧바로 옷을 챙겨 입었다.
모노 바이크G가 도로를 질주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