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봉으로 레벨업-150화 (150/305)
  • 제150화

    ‘작은 절망’들을 ‘작은 희망’으로 만들어라.

    심지어 퀘스트 내용조차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그 속에 처박았을 뿐.

    세뇌 스킬도 언변 스킬도 없는 내가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생각했겠지.

    ‘다만 신이 인간을 몰랐을 뿐.’

    아우슈비츠에서도 인간은 희망을 품는다.

    굴라그에서도 인간은 희망을 품었다.

    일제 강점기에 창씨개명을 당하고 밥숟가락까지 죄다 뺏겨서 오늘 굶어 죽을지, 내일 굶어 죽을지 몰라도 인간은 희망을 품는다.

    갑자기 희망 회로가 파지직 튀어서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

    당장 가스실에서 사람이 빙글빙글 죽고 있는데 내일은 나아질 거라는 생각이 어디에 있겠나.

    그냥 이 좆같은 현실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태워서 기록을 남기고 태극기 찍어 가며 저항을 하는 거지.

    밑바닥을 한번 찍어본 사람의 경험으로는.

    희망은 곧 저항이다.

    삶에 대한 욕구이고 인간의 본능이다.

    희망을 꺾고 싶으면 사람을 끓는 기름에 퐁당퐁당 튀길 게 아니라 통장에 10억 정도 쥐여 주는 게 더 빠를 거다.

    헌데 신은 그걸 모르지.

    그리고 나는 전형적인 K-반골 한국 놈이고.

    [주군. 손이…… 계속…….]

    “응. 괜찮아.”

    [호흡을 깊이 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아까부터 하고 있는데 쉽지 않네.”

    K-반골이라고 했지 PTSD가 안 온다고는 안 했다.

    어쩔 수 없지 뭐. 나도 사람인데.

    후우…….

    [어떤 모습인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까부터 시도해 봤는데 그 광경을 이상하게 말하기가 어려워.”

    [음…. 그만큼 충격이 큰 모양이군요. 이렇게 하죠. 주군께서 텔레파시 스킬을 익히셨으니 그걸 통해서 과거를 떠올려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영상도 전송돼?”

    [평범한 타인이라면 어려울 수 있으나, 저는 주군의 권속이며 신공정령. 이미 주군과 영체로 연결되어 있는 터라 텔레파시까지 더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다만 힘든 과거를 다시 떠올려야 하니 주군께서 버티실지.]

    “그건 괜찮아. 너도 아는 게 좋겠지.”

    맥주 캔을 우그럭 구긴다.

    그러고는 깊게 심호흡을 하며 오늘의 일을 떠올린다.

    내가 본 ‘튜토리얼’ 이후의 세계를.

    “…….”

    그러다가 어느 순간, 척량이 신음을 내뱉었다.

    “어때. 전달되었어?”

    [자… 잠시…….]

    척량의 꼬리가 뻣뻣하게 선다.

    이윽고 녀석이 고통스럽게 숨을 내쉬고는 이렇게 물었다.

    [주군께서는… 미치지 않으신 게 용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러게 말이다. 정신 방벽이 단단하기 때문일까.”

    […정신 방벽이 단단하다 하더라도 그 풍경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버티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신공정령일 뿐인 저도 지금…….]

    척량이 몸을 부들부들 떤다.

    척량의 모습에 서린 것은 공포.

    [심연의 공포를 본 기분이군요. 아니… 심연의 존재들까지 있는 걸 보니 이것은 그야말로 말세 그 자체였군요. 후우…. 과연 ‘절망’의 시험. 이건 제아무리 레벨이 높은들 그조차도 무가치하게 만들어 버리는 난이도군요.]

    “퀘스트 창도 안 뜨더라.”

    [그렇다는 건 그 또한 ‘절망’의 의지였던 거죠. 악의가 진득하게 느껴지는 시험입니다. 단순히 퀘스트가 실패하길 바라는 걸 넘어서 그 이상을 보고 싶어 했던 거겠죠.]

    “그래. 그게 가장 힘들었어.”

    무겁고 진득한 악의.

    다른 퀘스트들과는 달랐다.

    그동안의 퀘스트들은 던전을 파훼하거나 몬스터를 잡아 과제를 해결하는 게 중요했다면 이건…. 아니, 이걸 퀘스트라고 볼 수 있을까.

    [일단은 주군께서 그걸 이겨냈으니 축하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척량아.”

    [좀 쉬죠. 주군…. 오늘은 수련하지 마시고 그냥 좀 쉬어요.]

    척량의 눈에는 걱정과 연민이 깃든다.

    이 콩만 한 여우를 걱정시키다니, 나도 참 돼먹지 못한 어른이다.

    “걱정 마. 그런데 갈 길이 멀다. 내가 튜토리얼 이후에 생길 일을 막을 수 있을까.”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알아버린 이상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더 나아갈 수밖에.

    [주군께서는 해내실 겁니다.]

    그래, 뭐. 못 하면 죽기밖에 더 하겠냐.

    뭐라도 해야지.

    [저도 한잔해도 됩니까? 주군?]

    정령도 맥주 먹어?

    내 말에 척량이 답했다.

    [도시락도 먹는데 맥주라고 못 먹겠습니까?]

    그리 말하기에 맥주를 하나 더 따서 컵에 졸졸졸 따라 줬다.

    척량도 함께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크으, 인간이 이걸 왜 좋아하는지 알겠군요.]

    “오냐.”

    나는 그리 말하고는 척량과 건배를 했다.

    탕!

    그제야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문득 손의 떨림이 멎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척량은 아무렇지도 않게 넉살스러운 포즈로 다시 맥주를 같이 먹는다.

    ‘여우는 여우라니까.’

    고마운 녀석이다.

    그날 나는 뒤척이며 잠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충동적으로 SNS에 엄지척을 검색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너무 힘들어서 무슨 소리든 듣고 싶었으니까.

    -카레 레시피 먹어보고 엄치척 들었다.

    -역시 변함없는 백년 전통 맛도리 엄지척임. ㅇㅇ

    -(대충 맛집 사진) 엄지척.

    “뭐야. 이거? 괜히 겁먹었잖아? 난 또 뭐라고.”

    내 이야기 같은 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엄지척 포토카드 양도합니다. 머그컵 자선 사업 한정 발매 ver.

    가격 적어서 디엠 주세요.

    찔러보기 X 부분 환불 X

    쭉 내리다가 겨우 하나 찾았다.

    계정을 눌러보니 아이디가 [판매양도계]인가? 보니까 무척이 포토카드도 팔고 있다.

    -엄무척 포토카드 양도합니다. 히든 던전 클리어 기념 ver.

    죄다 판매 양도 글이다.

    ‘회사에서 던전 클리어할 때마다 기념품, 그러니까 굿즈 낸다고는 들었는데 거기에 포토카드도 딸려 줬었나 보구나.’

    가끔 이벤트 식으로 방송에서는 편집된 미공개 샷을 포토카드로 잘라서 판다고 했다.

    다행히 원하는 분들이 있는 모양이야.

    인내심을 갖고 쭉 내려 봤는데 내 이름이 하필 그런 이름이라 이 세상 모든 엄지 들 일만 잔뜩 봤다.

    내 욕이랑 팬덤에 하는 욕도 검색되었는데 워낙 위아래로 다른 검색 건들이 많아서 은근 찾기가 어렵네.

    그래도 남의 집 고양이 사진은 귀여웠다.

    ‘무척이가 괜히 과민반응 했어.’

    나는 그렇게 스크롤 조금 넘기고는 그대로 껐다.

    * * *

    다음 날, 새벽 세 시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저녁이 되자마자 일찍 잠들어서 그런가.’

    창밖은 아직도 어둡다.

    어쩌다 보니 참 애매한 시간에 일어났다 싶지만, 그래도 잠 자체는 많이 자긴 했다.

    집에서 목욕할 때가 아직 석양이 저물 때였으니까.

    [주군. 기침하셨습니까?]

    “하암, 잘 잤어. 무척이는?”

    [동생분께서는 들어오지 않으셨습니다. 아마도 외박이 아닐는지요.]

    “뭐……. 녀석도 다 컸으니까.”

    다 큰 자식을 둔 부모 마음이 이러려나.

    내 동생이지만 누구보다 모범생처럼 살아온 녀석 아닌가.

    공부에 올인하겠다고 다른 데 눈도 돌리지 않은 놈이다.

    나중에는 선생님한테 독하다는 소리도 들었단다.

    ‘하하하, 미쳤어? 형이 돈 벌어다 주는데 다른 데 한눈을 어떻게 팔아?’

    웃고는 있지만 눈은 정색을 했지.

    ‘이제 와서 삶의 여유를 찾은 걸 수도 있고.’

    친구도 만나고 연애에도 관심도…… 그건 안 되지. 이 새끼가 형도 못 한 연예를 자기가 하려고 해? 콱 씨, 그냥.

    넌 내가 먼저 연애할 때까지 너도 강제 모솔이야. 인마.

    세상이 곧 멸망하는데 어딜 연애질을!

    “자… 그러면…….”

    그대로 수련실로 향했다.

    무신의 수련장으로 향하는 대신, 그냥 그곳에 앉아 깊이 심호흡하면서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세계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다.

    세계수 + 마법진 + 듀얼 코어. 거기에 내공심법까지. 과연 생각대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공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 상태로 척량에게 말을 걸었다.

    “어제 본 풍경을 막으려면, 아주 제대로 굴러야겠지?”

    [예. 확실히 그렇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라는 판단이 듭니다. 왜 그동안 정지한이 일분일초까지 아껴서 움직였는지 알 것 같더군요.]

    “그래. 충격적이더라고. 그러니까. 내버려 두면 세계가 그 모양 그 꼬라지가 된다는 건가?”

    [미래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군. 예지 능력자의 예언도 완벽하지 않은 것이 그런 이유에서지요.]

    그건 뭔가 이상한데.

    “그러면 예언 능력이 의미가 있어? 이상하잖아. 미래를 아는데, 그 미래가 완벽하지 않다니……. 그러면 아무짝에 쓸모가 없잖아?”

    그럴 거면 미래 예지가 왜 존재하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언 능력을 정확히 설명하자면……. 가변적 운명 중에서 가장 높은 확률의 미래를 읽어 내는 능력이니까요.]

    “음? 그런 거였어?”

    [네. 미래는 바뀔 수 있습니다.]

    척량이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주군께서 배가 고파서 식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라면, 스팸 계란 구이, 냉동 만두의 선택지가 있다고 해 보지요. 예언자는 그들 특유의 능력으로 주군의 정보를 읽어내고, 그중 가장 높은 확률의 미래를 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정확하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변수가 끼어들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그들의 능력은 확실히 강력합니다. 미래에 대한 정보를 부정확하게라도 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권능이겠습니까? 적어도 천재지변 같은 정보는 거의 틀릴 일이 없죠.]

    “그리고 그걸 이용해서 주식을 하든, 부동산을 하든 뭔가 할 수도 있고 말이지.”

    [그 외에도 활용법은 무궁무진합니다.]

    나는 헌터 쪽 외에는 그리 쓸모없긴 하지만 말이야.

    “역시. 그러면 정지한은 내가 가진 [사소한 직감]을 넘어 더 명확한 예지가 가능하다는 거니까. 한번 이야기를 해 봐야 하는 건가…….”

    그 말에 척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군의 최대 후원자가 바로 그 정지한이니까요.]

    세계 멸망까지 보고 왔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는 없겠지.

    그래도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

    [뭐죠?]

    그래도 인류가 존속은 된다고 했잖아? 더 이상 지구의 지배자는 아니지만.

    그 말에 척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관해선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한데…….]

    척량은 몇 가지 가설을 세워서 말해 주었다.

    첫째로는 떠날 수 있는 인간은 이미 떠났다.

    각성자들 중에 수호성좌가 있거나 또는 다른 차원으로 이동이 가능한 스킬을 가진 자는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로는 튜토리얼 이후 지구가 제대로 삽질을 해서 예상보다 더 나빠졌다.

    원래라면 그래도 존속은 가능했을 터인데 마지막까지 인류가 서로의 발을 붙잡으며 진보를 막아 결국 개판이 난 게 내가 본 그 광경이라는 뜻이다.

    “둘 다 가능성 있잖아. 이거.”

    [……후자는 아니길 바랍니다.]

    후자도 가능성 높아!

    이상기후 문제만 해도 결국 조별과제 파탄 내듯 파탄시켰다며?

    이제는 던전이 나와서 그런 얘기는 쏙 들어갔지만 어쨌든 결국 이상기후가 없어진 건 아니니까.

    [한여름에 눈 내리는 거 보고 이게 이상기후 현상인지 던전의 영향인지 모르는 수준이긴 합니다. 그래도 탄소 배출량이 확실히 줄기도 했습니다.]

    그건 사람이 많이 죽어서 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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