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그래서, 시간은 얼마나 지났어?”
[조금도 흐르지 않았습니다.]
“그쪽에서 거의 다섯 시간 정도는 보낸 것 같았는데……. 게다가 저쪽에서는 몸 상태도 말이 아니었거든.”
팔의 혈관이 폭☆발! 했었으니까.
무신이 바로 고쳐 주긴 했지만 두 번은 못 할 경험이야.
덕분에 기(氣)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확실히 알았다.
그 대가가 팔 폭발 쇼라니 진짜 무신은 중간이 없는 놈이다.
거기다 혼원건곤진기.
이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도 확실히 알았고.
[시간이 괴리된 공간이라는 거군요. [무신의 수련 공간]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백만 따봉짜리 스킬 말이지?
[무신의 수련 공간 – 1,000,000 따봉]
무신이 시간의 신과 협력하여 만들어낸 수련 전용의 공간.
이 안에서 수련하는 동안 외부에서는 시간이 정지한다.
하루 1회. 48시간 이용 가능.
수련으로밖에 쓸 수 없지만 이틀을 벌 수 있는 사기적인 공간.
“아마도 그렇겠지. 후, 그러면 다음 일을……. 어라?”
이상했다. 몸에 힘을 줘도 근육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엎어졌다.
쿵!
“어…. 뭐야? 왜 이래. 내 몸.”
진기는 정상적으로…… 돌지 않네!? 내공이 한 줌도 없어?
어? 뭐야?
[이건… 신열 현상 같군요.]
“신열 현상?”
[신과 만나서 대화를 나눈 자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대다수는 모든 힘이 쇠한 채로 하루 정도를 보낸다고 합니다.]
“아니……. 그런 게 어딨어.”
[지금 주군께서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시지 않습니까? 알려진 대로입니다. 사실, 아까까지 기운을 사용하는 행동을 한 것이 더 놀라운 일입니다. 아마도 시간 차가 있는 모양이군요.]
척량이 사람의 형태가 되는 게 보였다.
사람 모습은 오랜만이네.
[주군. 오늘은 푹 쉬시지요.]
그리고 나를 들친 후 그대로 걸음을 옮긴다. 눈이 가물가물하다.
“그래야… 할 것 같네……. 그러면. 나는 좀 잘게…….”
[예. 주군. 좋은 꿈 꾸시기를.]
나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 * *
내가 꿈꾸고 있는 걸 아는 것을 자각몽이라고 하던데.
지금 내가 꿈속에 있네?
자각몽을 이렇게도 꾸나?
내 앞에서, 내 몸뚱이가 혼원건곤신공을 열심히 수련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나를 보는 특이한 경험.
그러니까 이게 꿈인 걸 깨달은 거지.
마치 게임 캐릭터 움직이듯이 내 모습이 보이니까.
그나저나.
본래 내가 하던 수련과는 조금 다른데?
혼원건곤신공에는 본래 보법, 검법, 내공심법 그리고 외공이 포함되어 있다.
그중 보법과 검법은 몇 가지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을 처음부터 끝가지.
하나하나 너울너울 펼쳐낸다.
그 모습은 흡사 검무(劍舞)와도 같다.
칼춤이 정교하게 이어지고, 또 이어져 나간다. 자칫 자신의 몸을 베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격하면서도, 부드럽기 그지없어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저렇게 수련하지는 않았었다.
그렇다는 건… 저게 올바른 수련법이라는 건가?
어쩐지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게 천무지체 효과?
아니면 어제 무신의 조각상으로 가르침을 받았던 여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냥 개꿈일지도.’
하지만 단순히 개꿈으로 여기기에는 검무가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초월적인 무언가를 담고 있어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검무가 끝났다.
동시에 나는 눈을 떴다.
“음…….”
익숙한 내 방의 천장이다.
천천히 손끝을 움직여본다. 방금 전 꿈이 생생히 몸에 남아있다.
보통 꿈이 이렇게 명확하게 기억나거나 하는 일이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역시 보통 꿈은 아닌 것 같다.
꿈속에서 했던 것처럼 수련을 한번 해 봐야겠다.
문득 척량이 보였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여우 상태로, 앞발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게 뭔가 귀엽다.
쓰러지기 전에 사람 모습으로 변했던 게 더 꿈 같네.
[기침하셨습니까?]
“응. 잘 잤네. 얼마나 잤어?”
[3시간 정도 지났습니다. 지금 시각은 오후 1시입니다.]
얼마 지나지는 않았군.
몸이 몹시 개운하다.
몸 안의 내가진기가 제대로 흐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그럼 나는 수련하고 올게.”
[예. 주군.]
척량을 뒤로하고 수련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모노블레이드를 뽑아들었다.
손에 닿는 쌍검의 감촉이 서늘하다. 깊게 숨을 들이쉰다. 꿈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호흡.
후우-
맞게 했나? 잘 모르겠다.
허나 느릿느릿 검법을 펼쳐 나갔다.
국민체조를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국민체조는 빠르게 하는 것보다 느리게 하는 게 훨씬 힘들다.
이건 태극권 같은 실전성이 없다 폄하되는 아주 기본적인 무예도 마찬가지.
그리고 그것은 혼원건공신공도 마찬가지다.
느릴수록 검술을 펼쳐 나가기 힘들다.
그렇기에 고작 일 초식을 펼치는데도 땀이 송글송글하다.
‘와, 이거 지루한데?’
하지만 왜일까. 이게 맞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일부러 느리게 휘두르며 내 검로를 점검해 본다. 다시 느리게 휘두르며 또 수정한다.
‘이걸 이제야 하고 있다니.’
웃긴 이야기였다.
나름대로 기초를 연습하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천운이었다. 척량이야 책사일 뿐 무예 스승은 아니다.
그런 내가 스승도 없이 장님 코끼리 만지듯 나아가던 나날들.
‘이러니 무신이 신기해하지.’
무언가 제대로 되어 가는 감각이 든다.
찌르고, 베고, 휘두르고, 다시 되돌리고. 그에 맞춰서 느리게 발을 움직이고, 허리를 움직인다.
감각이 제대로 깨어나는 느낌이 든다.
좋아. 제대로 해 볼까?
“무신의 수련 공간.”
-10초 후에 진입합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심호흡해 주세요.
-10, 9, 8…….
-진입합니다.
번쩍!
스킬을 사용하자, 10초 후에 무신에게 수련받았던 바로 그 공간이 나타났다.
뭐야. 여기가 수련 공간이었던 거야?
다른 점이 두 가지.
첫 번째. 무신이 없다.
두 번째. 무기 진열대가 생겼다.
무기는 다종다양.
전 세계의 모든 무기가 다 있는 기분이 들 정도다.
일단 그중에서 검을 가져다가 수련을 시작했다.
제일 식. 제이 식. 제삼 식.
초식을 하나둘 순서대로 펼쳐낸다. 단지 따라 하는 것뿐이지만, 그리고 꿈에서 본 것보다는 한없이 느린 동작이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 초식은 어떤 의도로 만들어졌고, 이 초식은 어떤 의도고…….
그런 게 자연스레 머릿속을 채운다. 그렇게 첫 초식부터, 끝 초식 까지 전부 펼쳐내고 나서 멈추어 섰다.
“이게 천무지체…….”
천재가 된 기분이다.
아니, 이미 천재가 된 거네. 무공이 뭔지, 초식이 뭔지를 본능적으로 알게 해 주다니…….
와…. 끝내주는데?
따봉을 백만 정도 부으면 이렇게 되는구나.
아니, 정가는 오백만이었지.
스킬 [인간] 덕에 사백만이나 할인된 거고.
오백만 따봉 스킬 어마어마하구나. 평범한 사람을 무공 천재로 만들어 주니까 말이야.
좋아. 계속 해보자.
48시간.
시간은 내 편이다. 소중한 이틀을 얻었다. 그러니 일단 계속 해보는 거다.
검법 백 번 느리게 펼치기. 간다!
나는 그렇게 검을 꾸물꾸물 느리게 휘둘렀다.
사지가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렇게 느린데도 기이하게 단전에서 시작된 기가 멋대로 전신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멈출 수는 없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고, 휘두른다.
순서대로.
건곤검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느리게 정제하고, 다시 수정하고, 다시 느리게.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나는 그 순간만큼은 잔잔한 불꽃이 되었다.
어느 순간, 이 미친 짓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점차…….
“후욱…. 후욱…….”
재미있다.
이상하다. 이 느린… 검법이라기보다는 체조에 가까운 이 짓이 즐겁다니.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갔다.
“아, 내공을 다 썼다.”
몸의 근육도 비명을 지른다. 그대로 텅, 하고 쓰러졌다.
“와…….”
사지의 근육이 파들파들 떨렸다.
천재도 노력해야 하는 거였네. 노력하는 방법을 평범한 사람보다 빨리 체득하고 익히는 속도 역시 빠를 뿐.
어쨌든 노력해야 한다는 건 똑같다.
토할 것 같은 현기증 속에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보려다가 포기했다.
이 공간 안에는 시계가 없다.
아니, 그 전에 밖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 아닌가.
이걸 시계로 측정할 수 있…….
“아…….”
정지한이 선물해 준 손목시계.
[정확한 손목시계]
등급 : S
분류 : 아티팩트
초월적인 대장장이가 만든 평범하고 튼튼한 손목시계, 방수 처리가 되어 있어 심해에 들어가도 안심이다. 어떤 상황에도 완벽하게 시간을 표시한다.
그저 시간을 완벽하게 표시한다는 것.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아이템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는 웃음만 나온다.
정지한의 시간 정지 능력에도, 무신의 수련 공간 속에서도 째깍째깍 잘만 돌아가고 있으니까.
“열네 시간? 열네 시간을 꼬박 수련했다고? 이게 말이 되나?”
아, 알았다. 이 공간 속에서는 허기도 수면도 오지 않는다.
지치기는 하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이것만으로 어디인가 싶다.
“후우, 일어나자.”
말 그대로 수련에 미친 놈이나 가능한 짓.
“하지만… 방금 검로로 좀 뭔가 알 거 같아.”
손에 쥔 검을 내려다본다.
검이라는 게 뭔지. 검법이라는 게 무엇인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아.
그간 해 온 칼질은 전혀 제대로 된 게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다시 검을 휘두른다.
‘아, 좀 더 꿈과 가까워졌나?’
알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그때의 동작을 완벽하게 따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제야 겨우.
무공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건가?
“좋아.”
한 걸음, 한 걸음 느리지만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간다.
튜토리얼이 곧 끝날 세상에서.
나는 나를 구할 수 있을까?
* * *
무신의 수련 공간을 나오고 나니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죽을 것 같아.
밖으로 나오니 척량은 계속해서 뭔가를 공부하고 있었다.
수련장 안에 있는 동안은 밖의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 내가 들어가기 직전에 마침 공부하는 중이었겠지.
짧은 앞발로 열심히 키보드를 치며 뭔가 검색하고 있다.
[주군, 다녀오셨나요?]
[내가 갔다 온 건 아는구나?]
[네. 저는 주군과 이어져 있으니까요.]
세계수 화분을 놓은 거실로 가서, 소파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혼원건곤신공의 오의를 깨달은 지금의 나는 이렇게 누워서도 운기조식을 할 수 있다.
오늘 하루 엄청 빡세게 살았네.
“후우우우.”
세계수 덕분에 육체적 피로도 풀리고, 내공도 빠르게 회복되는 게 느껴진다.
이야…. 세계수 없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냐?
그나저나 [천무지체]에 [무신의 수련 공간]까지 합쳐지니 상승 효과가 어마어마하다.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면 무척이 녀석에게도 무공을 가르쳐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오늘 무신에게 몸으로 고통을 받으며 알게 된 게 있다.
대주천이고 소주천이고 스킬은 스킬일 뿐, 스스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게 중요하다.
또한, 무공 사용자가 무공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타인에게도 그것을 전수해 줄 수가 있다.
즉.
일반인도 기를 느끼고 단전을 쓸 수 있다면 각성자가 되는 게 가능하다는 것.
‘물론. 어릴 때부터 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말이지.’
그리고 또 돈이 있으면 각성석을 살 수 있지 않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없는 사람도 각성자가 될 수 있다는 거고!
무공 사용자인 각성자가 된다는 거지.
‘이건 아마 나만 알고 있는 건 아닐 거야.’
최근에는 스킬로 기조가 바뀌어 간다지만 무공 사용자가 많은 중국에서 이걸 몰랐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런 정보는 다 재산이니 외부에는 숨겼겠지.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거 잘하면 될 것도 같은데?’
나는 곧바로 폰을 들어 전화를 했다.
성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