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시장 점유율을 가져가려는 것이겠지요.”
“저걸 내버려 두면 손해가 얼마지?”
“D급 포션의 원가를 생각하면 우리가 저들과 같은 가격에 판다고 해도 손해는 나지 않습니다.”
“옛날처럼 벌 수가 없다는 게 문제겠지.”
“예.”
“다른 놈들은 뭐라더냐? 해외 제약 애들은?”
“정하 그룹에 압력을 넣어야 한다…고들 합니다만. 실행에 나서려는 기업은 몇 안 됩니다.”
“그렇겠지. 이 영악한 자식!”
박막기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는다.
“내버려 둬서는 안 되겠어.”
“물론입니다. 허나. 전쟁을 벌일 정도는 아닙니다. 그럴 경우 저희의 손해가 너무 커집니다.”
그냥 개인 공방이거나 중소기업 병아리였으면 엄지로 으깨면 된다.
그런데 영악하게도 정지한을 끌어들였다.
“엄지척 이놈이 정진 그룹 공동 대표가 된 후에 이 짓을 벌이는 게 처음부터 계산해서 짠 판이겠지?”
“네. 애초에 정하 그룹 헌터 보조원으로 시작해서 무슨 수를 쓴 건지 정지한을 꼬셨습니다. 정지한은 홀딱 빠져서 이놈을 비호하는 데 온 힘을 다하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갓튜브에는 스킬로 포션 기계 만드는 과정까지 방송으로 송출했는데 공중파를 탈 정도였습니다.”
-돈 뱉는 자판기! 기계공학&연금술 만들어 볼까요? 부릉부릉!
“자신의 스타성을 그대로 노출시켜서 신뢰성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정하 그룹 다른 후계자들은 견제 안 해? 난리도 아니었잖아?”
“정진 그룹이 너무 커졌습니다. 그리고 말했듯이 정지한이 자신을 건드리는 건 대범하게 놔두는데 엄지척에는 혀끝만 대도 정상이 아닐 정도로 물밑에서 보복을 하고 있어요.”
“미친놈이군. 그거.”
대체 엄지척에게 뭐가 숨겨져 있는 거지?
아니면 세뇌 스킬이라도 익혀서 재벌집 손자 놈을 어떻게 한 걸까?
하지만 그걸 놔둘 정만득이 아니다.
제 손으로 손주 놈의 목을 땄으면 땄지, 세뇌당해서 정하 그룹을 쥐락펴락하게 둘 성격도 아니고.
“결국… 우리 쪽에서 대놓고 전쟁은 못 하는 거군. 철저한 놈이야. 이런 것까지 안배해 놓은 건가!”
전쟁. 은밀하게는 폭력 사태부터, 대놓고 하는 일은 공격적 기업 인수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언제나 대규모의 돈이 들어가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면 조용히 처리해야겠군. 할 수 있겠지?”
“예. 회장님.”
“좋아. 처리해. 되도록 우리 쪽에서 써먹을 수 있도록 하면 좋겠지만……. 안 되면 치워 버려.”
“예.”
SL 그룹의 박막기 회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 * *
돈 들어온다. 쭉쭉! 쭉쭉쭉!
판매는 아주 순풍이다.
처음에는 1,000개 팔고 잠수 탈 줄 알고 되팔이들이 넘쳤는데, 그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찍어서 팔기 시작하니 결국 시장은 안정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몇몇 언론들은 같은 D등급이어도 성능 차는 있고, D등급 중에서 최하급 포션이라고 했지만 뭐 어떤가?
그래 봐야 E급은 따라가지 못할 성능. 그리고 감정 스킬을 썼을 때 보이는 시스템의 보증.
“게임 돈 같네.”
[주군. 게임 같다 하시기에는 목숨을 걸고 계십니다만.]
“아니, 뭐……. 현실감이 있어야지. 옛날에는 상상도 못 할 돈들이 계속 들어오기 시작하니까. 또 상상도 못 할 만큼 돈을 써재끼잖아?”
그만큼 한번 쓸 때 빠져나가는 돈들도 큼직큼직한데 그래서 더 현실감이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 봤던 만화처럼 금화를 잔뜩 쌓아 놓고 거기서 수영을 해보면 달라지려나.
그러고 보니 거기 나온 오리도 이름이 스크루지였지.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금화에서 헤엄치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지금은 돈보다 따봉이 더 현실감이 들어.”
32만 따봉.
광고용 영상에 이런 따봉이 눌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엄지 내돈내산이 아니라 내돈내광이네ㅋㅋㅋㅋㅋㅋㅋ
-지가 공장 차려서 지가 광고하는 클라스ㅋㅋㅋㅋㅋㅋ乃乃乃乃乃乃乃
-파시는 포션을 병원에서 구비해준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고맙습니다. 포션은 유통기한도 짧고 제가 간 곳이 큰 곳은 아니라서 원래는 구비하기 힘들었는데 가격 덕에 많이 구매해놨다고 하더라고요. 덕분에 급한 목숨도 구명했고 후유증 없이 추가 수술도 잘 끝냈습니다. 고맙습니다.
-점심도 안 돼서 매진되어 있던데 팬이 다 산 거임?
↳급한 머글이 샀지, 저걸 팬이 무슨 수로 매일 사냐. 헌터가 영통, 팬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반응이 생각보다 괜찮은걸?
[대한민국에서 괜히 ‘혜자’라는 단어가 관용어가 된 게 아닙니다. 주군.]
그렇구나. 싸고 많이 들어 있으니 최고인가.
[거기다 포션 사용 리뷰 영상들도 아주 좋습니다.]
척량이 여러 갓튜브 영상을 보여 주었다.
-오늘은 엄지척 헌터가 만들었다고 하는 이 포션의 효과가 어떤지 실험해 보려고 합니다! 포션 명칭부터가 끝내주는데요.
-따봉 포션! 풋. 아… 웃으면 안 되는데, 제정신이 아닌 네이밍 센스라서… 아, 아닙니다. 좋다는 의미입니다!
-좌우지간 이 따봉 포션. 이름만큼 정말 굉장한 건지 한번 사용해 보겠습니다!
“꼭 저 명칭으로 해야 했을까?”
[정진의 마케팅 전문가들이 이 네이밍이 기억에 남을 거라고 했습니다만…….]
전문가의 선택… 과연 옳은 걸까?
속으로 그런 의문을 삼키며, 영상을 쭉 봤다.
일부러 자기 팔에 상처라도 내나 했는데 다행히도 그건 아니었고, 필드 몬스터와 싸운 후, 상처를 포션으로 회복하는 과정이었다.
-와, 이거 봐요. 살 차오르는 게 보여. 이 정도면 같은 D급들 중에서도 중상타? 아니 상타는 칠 거 같은데요?
-너무 싼데? 진짜? 이 가격에? 이렇게 싸도 되는 거야?
-영상 보이시죠? 조작 아닙니다. 이거 다른 헌터분들 리뷰도 똑같을 거예요. 여기 병 정품 인증 보이시죠?
그렇게 하나의 플로우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기존에 알던 포션 가격을 완전히 깨고 나니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
포션은 비싸다. 비싸고, 의료보험도 안 된다.
자살 시도라도 했다가 어설프게 살아나면 포션 빚 때문에 두 번 자살해야 한다.
포션은 만능이 아니니까. 한 병으로 부족하면 수십 병도 써야 하는 상황이 오니까.
한 달 입원해야 하는 재해 사고라도 터지면 그냥 자살하는 게 낫다.
-엄지척 요새 핫하네.
-파주에서 엄지척 헌터님이 저를 구해 주셨거든요? 그분이 만든 포션이니 당연히 좋을 수밖에요!
-엄지척 저 새끼는 무슨 자선 사업하나? 80만 원에 저게 되나?
↳내가 이쪽 업계 있는데, D급을 공장에서 만들려면 원가가 수십만 원은 나감.
↳그걸 200만 원에 팔아먹어? 도둑놈이네…….
↳공장 설립 비용하고, 인건비 투자비 생각 안 하냐.
↳응~ 엄지는 혼자함~
-엄지척이 파주 사태 이후에, 저렴한 포션 만들어서 공급하겠다고 한 영상 있음.
반응은…… 좋네. 아직도 댓글 싸움이야 나고 있지만. 그래도 그동안에 비하면 훨씬 반응이 좋아.
[실로 훌륭한 매출입니다. 업계 이미지도 좋고요. 주군의 머리를 티베트여우에 합성해서 ‘할★인★출★현’ 짤방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 그거 진짜 좋은 거 맞아?
[자. 주군. 이제 마음을 추스르십시오. 무신의 조각상을 사용할 때입니다.]
“그래야지.”
포션을 만들어서 파는 건 이제 어느 정도 정상 궤도로 왔다.
물밑에서 공격이 올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
결국 중요한 건 이미 내 손을 떠났다는 점.
큰 건이야 정지한이 알아서 잘해 주겠지.
‘이제 성장을 해야 할 때.’
때문에 나는 눈앞에 놓여진 무신의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일단 이걸 이용해서 무신에게 가르침을 받고, 그다음에 무신의 수련 공간을 이용해서 혼자서도 수련을 계속한다. 좋아, 해 보자고.”
무신의 조각상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무신의 조각상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N
Y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무신의 조각상이 번쩍이기 시작한다.
그 빛은 점점 강렬해지더니, 주변을 전부 뒤덮고 말았다.
이윽고 빛이 끝났을 때. 나는 내 집의 수련실이 아닌 전혀 다른 공간에 앉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일단 하늘은 파랗고 구름이 떠 있다.
바닥은 석판으로 되어 있었는데, 원형의 고대 투기장 비슷한 느낌이다.
아이템을 쓰면 이곳으로 전송되는 건가 본데……. 그것도 딱 정중앙으로 이동됐네.
그리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니, 어느샌가 내 앞에 훤칠한 미남자가 서 있었다.
선이 굵고 키가 몹시 컸는데 190~195는 될 법한 키다.
거기에 근육은 탱커 정지벽 씨가 생각날 만큼 극한까지 단련되어 있었으나 잔근육까지 미려해서 흡사 그리스 조각상 같았다.
허나 복장이 뭔가 좀 이상하다?
추리닝 바지, 거기에 삼선 슬리퍼, 상의에는 아무런 문양도 없는 검은 반팔 티 하나.
체구와 범상치 않은 미모를 제외한다면 그냥 동네에서 볼 법한 흔한 날백수 차림 아닌가.
그는 크고 마디 굵은 손을 뻗어 엉덩이를 득득 긁었다.
설마 저자가 무신(武神)?
실화인가?
이윽고 사내가 입을 열었다.
“외양은 네 무의식을 읽고 만들어진 것에 불과해. 그러니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다.”
내 생각이 읽혔어?
“네 눈앞에 있는 존재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한낱 필멸자에 불과한 네 녀석의 사념 따위는 제약당하는 상황에서도 읽을 수 있으니 호들갑 떨지 말도록.”
그러면 엉덩이를 긁은 건 본인 의지라는 건가? 아니면 내 환상?
“아아, 그건 내가 긁은 게 맞다. 염(念)이 아닌 육체로서 현현한 것은 오랜만이라 말이지.”
그는 자신의 몸과 근육을 몇 번 조율했다.
단지 그게 삼선 슬리퍼로 뒤꿈치 긁기, 두피 긁어서 냄새 맡아 보기라서 문제지.
“처음 뵙겠습니다. 엄지척이라고 합니다. 무신께서 가르침을 내려 주신다기에 찾아왔습니다.”
상대가 무신인 이상 어쨌든 깍듯한 게 좋겠지.
“예의는 밝은 녀석이군. 나는 무신. 그것이 나의 존재이며, 내 이름이다. 앞으로도 계속 무신이라고 부르도록.”
“예. 무신님.”
그가 허공에 손을 뻗자 자연스럽게 머리끈이 나왔다. 이번에는 현대의 머리 고무줄이 아닌, 고풍스러운 재질의 옛날에나 볼 법한 머리끈.
그는 긴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으며 말했다.
“그래…. 네 녀석은 혼원건곤신공을 익혔구나. 거기에 공용 검과 방패술에 무명검식 백암야와 풍운보법이라……. 완전 잡탕이군.”
무신께서는 나를 위아래로 슥 보시더니 혀를 차신다. 이윽고 자신이 입은 옷과 차림을 보고 이렇게 답했다.
“지금 내 모습이 너의 무공 상태다. 그야말로 잡기(雜技), 그 자체지.”
단정하게 무복이라도 입고 나오실 줄 알았나 보다.
체육복이 뭐 어때서? 편하기만 하구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좀…… 안 좋은가요?”
“당연히 안 좋다. 어느 한 가지를 대성하기도 전에 이거저거 잡탕으로 익혀서 자세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너희 세계에 내려진 시스템의 힘 덕분에 억지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지만, 그래 가지고서야…….”
그는 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다가 다시 말했다.
“허나 이상하군. 분명 천무지체의 근골을 가졌는데, 어떻게 이렇게 되었지? 천무지체 정도면 제대로 된 스승이 없다 할지라도 무공의 성장이 올바르게 되었을 터인데… 아. 그렇군. 천무지체를 완성한 건 최근이군. 시스템의 힘으로 억지로 맞췄어. 흐음……. 흥미롭군.”
소름이 돋았다.
그는 마치 눈빛으로 나를 해체하듯 하나하나 파악해 나갔다.
이것이 바로 무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