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염라두 헌터?”
목소리는 오히려 평소보다 낮았고. 어조는 느렸다.
왜일까?
그럼에도 기이하게 소름이 계속 돋는다. 그러나 그 정도에 굴할 거였으면, 개망나니 염라두가 아니다.
“개소리하고 자빠졌네! 너 내가 진짜 가만 안…….”
펑!
염라두는 일순 엄지척의 모습을 놓쳤다.
화염의 파도를 가르고, 녀석이 일 미터 거리까지 다가왔을 때에나 염라두는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끌어모으던 힘을 급히 움직이려고 애썼다.
마침 화염이 모두 쌓였다. 그리고 그 힘이 발동한다.
‘이겼다!!’
염라두는 일부러 크게 소리를 질렀다.
“태-양- 폭-바아알!!”
보란 듯이 힘껏 사용한 것은 다급한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그의 몸을 중심으로 스킬 이름답게 아주 거창한 기세로 응축된 화염의 힘이 폭발했다.
그것은 마치 핵이 폭발한 것 같은 강대한 힘.
단순한 뜨거움이 아니다.
폭발력이라는 물리적 실체를 가져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박살 내서 가루로 만들고 태워 없애 잿더미로 만드는 스킬이었다.
콰르르르르르--!
이걸로 마지막이다.
감히 태양을 넘본 값을 치러 주마!
그러나.
믿을 수 없는 모습을 보고 두 눈을 부릅떴다.
그것은 하나의 선. 선과 선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교차하고, 이내 그것은 하나의 면이 된다.
검기가 흐르는 검이 만들어낸 반구체의 면.
저걸 뭐라고 하더라?
아. 그래. 검기지막(劍氣之幕).
젠장. 근데 저건 레벨 100대쯤 되는 무공 고수나 쓰는 거 아니냐?
검막을 쓰는 엄지척이 다가온다.
태양 폭발의 힘을 분쇄하고 가까이 다가와서는 검을 쑥 찌른다.
서컥!
“끄아악!”
어깨를 완전히 꿰뚫은 검기를 두른 하나의 검.
아예 두부처럼 오른쪽 어깨를 뚫고 들어가는데, 구멍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100%로 발동하는 더블 어택!!
두 배로 아프다!
고통에 찬 비명과 동시에 뒤로 물러나려고 다리를 놀리는데, 마치 유령처럼 하나의 검이 더 찔러 온다.
그건 그대로 왼쪽 허벅지를 쑤셨다.
이번에도 구멍은 두 개.
“아파아아아아아!”
염라두가 고통에 찬 비명과 함께 땅을 구른다.
사실 금이야 옥이야 길러졌던 터라, 이런 상처나 고통은 당해본 적이 거의 없어서 더욱 그랬다.
“이런…. 염라두 헌터. 겨우 그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면 어떻게 합니까? 저는 방금 불에 탔는데 말입니다.”
낮은 속삭임이 밀려왔다.
칼을 빼지 않은 채로, 엄지척이 쭈그리고 앉아서 염라두에게 얼굴을 내민다.
지글지글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염라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려고 발버둥 치려다가 꼬챙이처럼 꿰인 몸 때문에 다시금 고통에 찬 신음을 내었다.
“흐으으으. 이. 미, 미친놈. 너… 얼굴이…….”
“아? 이거요. 괜찮아요. 더럽게 아프지만, 괜찮습니다. 트롤의 재생력이라는 스킬을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그걸 주는 반지를 끼고 있거든요. 화상이든 뭐든. 치료는 금방 되니까 걱정 마세요.”
엄지척의 얼굴 절반이 화상으로 일그러져 있다.
피부가 벌겋게 붓고, 지글거리는 소리까지 난다.
그러나, 엄지척의 말처럼 피부가 꿈틀거리며 새롭게 재생된다.
“얼굴이 재산 중 하나인데… 조금 곤란하긴 하네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사실 걱정할 필요도 없지 않나요? 여기서 나가면 어차피 저희 육체는 말끔해질 텐데.”
싱긋 웃는 그 모습이 퍽 호러스럽다.
“게다가. 이렇게 만든 건 염라두 헌터잖아요. 그래 놓고 놀라시면 안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하며 엄지척은 염라두 어깨에 꽂힌 칼을 뽑는다.
뽑을 때의 고통 때문에 염라두가 발광을 했다.
“으아아악! 미친놈아! 그만해에에에!”
“글쎄요. 제가 생각해 봤습니다만, 염라두 헌터. 이대로 당신 목을 자르고 제가 이긴다고 끝날 문제가 아닐 것 같아서 말이죠. 아까 뭐라고 하셨죠? 제 동생을 뭐 어째요?”
“너… 너… 이러고……. 힉!”
손가락 하나가, 염라두의 눈동자 바로 앞에 다가왔다.
“대체 어떻게 교훈을 드려야 할까 생각해 봤는데요. 상처는 회복돼도 고통은 남을 테니. 그래요. 제가 방금 산 채로 불타는 감각을 느꼈는데. 평생 기억될 거 같더라고요.”
엄지척의 흰 손이 염라두의 눈가를 쓸었다.
“눈알을 산 채로 뽑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그래도 괜찮겠죠? 어차피. 이 [결투장]에서 나가면 멀쩡해질 테니까.”
“미… 미친…….”
“그러게 가족 이야기는 하지 말았어야죠.”
기어코 눈이 눈꺼풀 안쪽을 파고든다.
염라두가 공포에 발버둥 치려고 하지만, 어느샌가 다른 손이 그의 목을 잡고 있었다.
뭐가 문제인 건지, 몸이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점혈이라는 겁니다. 혈도를 눌러서, 전신 마비처럼 만드는 건데… 움직이지만 못하고 고통은 그대로 느끼게 된다는 게 다르죠. 자, 그러면.”
꾸욱. 눈동자에 손가락이 닿고 지그시 내리누른다.
“그, 그만해! 그만! 그마아아안! 어흐허으허허허헝. 으허허헝. 그만해에. 미친놈아아. 그만하라고오오.”
기어코 염라두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추잡스럽게 울기 시작한다.
그제야 엄지척은 손가락을 눈알에서 뗐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지금 방송 중인데, 그럴 수는 없죠! 하지만 말이죠.”
엄지척이 전신 마비 상태의 염라두의 귀에 가까이 입을 가져다 댔다.
“던전이 아니더라도, 네 녀석을 찾아가서 눈알 파버릴 수가 있어. 그러니까. 나대지 말자. 알았지, 염씨?”
두려움이 몸 전체를 지배한 것 같았다.
고통과 공포 속에서, 염라두는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 * *
BJ초코는 잠깐 말을 잃었다.
“…….”
이 결과가 이런 식으로 뜰 줄은 몰랐다. 채팅창 역시 한동안은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와, 씨. 나 지금 뭘 본 거야?
-카리스마 쥑이는데…….
-엄지 사패 이럴 줄 알았다. 소패인 줄은 알았는데 사패기도 했네.
↳응. 니 새끼 가족 협박당하고도 가만히 있길 바랄게.
↳엄지 산 채로 불태운 건 염라두 아닌 줄?
-솔직히 염라두 가족 발언 선 넘었는데 사이다다.
-염라두 할아버지, 엄빠 빽 믿고 그딴 소리 한 거 아님? 대한민국에 발도 못 붙이게 하겠다? 그 소리 듣고 눈 안 돌아감??
-됐고. 염라두는 생각 이상으로 찌질했고, 엄지는 생각 이상으로 강했음.
그냥 구경 온 사람들부터.
-엄지야아아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
↳우리 엄지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
↳최강 엄지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乃!!
-엄지 쓴 거 검막 맞지?
↳맞음. 리우가 쓰는 거 봤음.
↳리우면 그 중국의 무공 사용자인데 레벨 100 넘는 고렙?
↳무공 사용자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헌터.
-미쳤다, 미쳤어! 엄지 저 녀석 헌터 된 지 1년도 안 됐는데 벌써 저 정도야? 뭐 이렇게 빨리 강해져?
↳원래 슈퍼 루키는 빠르게 강해져. 몇 년 안에 고레벨 금방 찍어.
↳그건 아닙니다. 헌터도 직업과 스킬에 따라 금수저와 흙수저가 있습니다. 루키가 되는 것도 기초 스킬이 좋고 본인이 근성이 독해야 됩니다…….
-엄지 고생했다ㅠㅠㅠㅠㅠㅠㅠ 기 안 죽고 진짜 잘 싸웠어bbbbbbbb
-반전매력 쩔었어, 엄지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우리 엄지 동생 가지고 협박하지 마로라ㅠㅠㅠㅠㅠㅠㅠㅠ 눈알 확 뽑아불랑게ㅠㅠㅠㅠㅠㅠㅠ
채팅창이 난리네. 그치, 척량?
지르고 나서 아차 싶었는데 말이지.
[헌터는 결국 힘의 논리로 돌아갑니다. 철저하게 winner takes all이죠. 승자 독식입니다. 만약 염라두가 승리했으면 가족 가지고 뭐라고 한 것도 무마되었을 겁니다.]
염라두가 화가 나서 한 소리 가지고 뭐 그리 까다롭게 구냐고 했겠지?
[네. 주군께서 이긴 이상 누구도 반문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진짜로 눈을 뽑으신 건 아니니까요.]
그래. 그 순간만큼은 머리에 피가 몰렸으니까.
그놈이 기절하지 않았다면 정말 파 버렸을지도 모르지.
[화상의 고통에 분노까지 합쳐져서 순간 주화입마가 올 수도 있었습니다. 평정을 찾으신 건 초인적인 자제력 덕분이었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군요.]
그런가?
나도 운이 좋았어.
결과적으로 놈이 기절하지 않았다면 나도 좀 위험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내공 사용자는 주화입마라는 리스크도 달고 살아야 하는 거구나?
[네. 그런 셈이죠. 하지만 보통은 작열통을 견디며 적을 향해 살기를 뿌릴 일은 많지 않으니까요.]
교훈이 되었을까?
[염라두에게는 평생의 트라우마가 될 겁니다.]
다음에는 진짜로 눈을 뽑을 거야.
[네. 이미 경고했으니.]
미친 세상이다.
내가 이상한 건지, 세상이 이상한 건지.
아니면 던전과 각성이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래.
[소인배인 저 성정을 보아하니, 이 정도면 앞으로 주군을 귀찮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다만 뭐?
[저자의 가문에서 어떻게 할지가 문제로군요. 일가(一家)라는 것은 결국 집단이며, 소국(小國)입니다. 그들이 나선다면 계속해서 귀찮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저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사이 주군께서도 자구책을 마련하셔야겠지요.]
돌려? 어떻게? 그리고 자구책이라는 건 뭐야?
[일단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수법을 써야 합니다. 정지한의 조력을 받아, 정하 그룹과 분쟁이 나도록 만들어 보시지요.]
그거 이이제이보다는 호가호위(狐假虎威) 아냐?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정하 그룹은 주군께서 현재 속한 세력이지만, 사실 확실한 아군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긴. 정지한이 나에게 우호적이라고 해도, 그 집안 전체와 내가 친밀한 것도 아니니까.
그러면 네 생각은?
[답은 스킬입니다. 유사시 사회적인 시선을 끊어내고, 적들을 참살해야 할 경우도 생길 것이 확실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통신 차단, 은신 등의 능력들이 있으면 도움이 될 겁니다.]
즉, 궁극의 잡캐가 되어야 한다 이거구나…. 좋아. 그렇게 하자. 우선은… 방송 마무리하고.
마침 지금 경기 종료 멘트도 나오는군.
[참가자 엄지척 승리.]
[경기 종료.]
들었던 대로 깔끔하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가, 다시 주변 풍경이 보인다.
[결투장]에 있던 내가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얼굴에 있던 부상도 사라졌고, 아프지도 않다. 역시 신의 힘이야.
-‘전쟁을 좋아하는 심장’께서 당신을 주시합니다.
-신들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1,100따봉을 받았습니다!
-1,100따봉을 받았습니다!
-1,100따봉…….
신들이 보내는 따봉.
예전보다 확실히 신의 이명이 자주 노출되기 시작했다.
그때 그 [죽음을 거부하는 자]가 직접 접촉한 이후로 조금씩 시스템 창이 변화해 가는 게 느껴진다.
[시스템도 성장하고 있으니까요.]
메시지 간소화해 놨던 거 뒤져보면 알겠지만, 안 봐도 버전 업이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게 느껴져.
나중에는 따봉을 주고 있는 신의 이명을 하나하나 다 알게 될까?
어쩌면 ‘진명’, 즉 진짜 이름도 노출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