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주군, 다음에는 4개의 성벽을 전부 혼자 클리어해 보는 것도 괜찮은 콘텐츠가 되겠군요.]
바로, 그거야. 해 볼까?
어차피 따봉충이라고 경쟁 헌터들한테 숨만 쉬어도 욕을 처먹는 판에 못 할 게 뭐 있냐.
뭐, 그런 이야기 있잖아.
적이 나를 싫어하면 싫어할 이유를 꼬옥 만들어 주라고.
나 그런 거 좋아해.
그때였다.
띠링-
-A, B팀 동시 기여도 1위를 최초로 달성했습니다.
-히든 보상이 지급됩니다.
히든 보상?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원래 시스템은 이런 거 찰떡같다부터, 우릴 대로 우린 희망의 성채에 히든 보상이 더 남아있다는 게 놀랍다까지.
챗창이 후끈하게 달아오른다.
허공에서 상자가 나타났다.
상자를 아직 받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까서 공개해 달라는 사람까지 요란하군그래.
[희망의 정수]
등급 : B+
분류 : 정수
다른 세계에서 희망을 모아 만든 정수.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희망은 빛난다.
상자를 여니 고체도, 액체도 아닌 그저 빛의 덩어리만이 안에 들어 있었다.
흡사 에너지로 이루어진 구체 같달까.
그에 비해 설명은 몹시 단출했다.
“어… 재료 템인가?”
일부러 소리 내서 멘트를 치자 다들 재료 템이 맞는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저것과 비슷한 카테고리의 재료 템이 있는지 찾아보는 사람도 생겼고.
그런데 그 순간.
휙!
“엇?”
뭐야. 네가 왜 튀어나와?
그림자 주머니에 고이 모셔 놓은 [수호자의 희망] 방패가 지 맘대로 그림자에서 빠져나와서는 하늘로 솟구친다.
야! 어디…….
스팟!
“헛?!”
방패와 희망의 정수라는 에너지 덩어리가, 내가 손을 써보기도 전에 달라붙는다.
저거 합체도 되는 거였어?
놀라는 사이. 방패는 더 넓어지고 두툼해졌다.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는 되어 보이는, 그야말로 문짝만 한 크기.
전에는 내 얼굴을 조금 가리는 정도였는데, 이거는 아예 내 몸을 전부 가려도 될 정도로 크다.
아니, 뭐 이런…….
[희망의 수호자]
등급 : A
분류 : 방패 (아티팩트)
다른 세계에서 희망을 빚어 만들어낸 강력한 방패.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희망은 빛난다.
기능 : 마음이 꺾이지 않는 한 파괴되지 않는다.
기능 : 사용자의 주변을 맴돌며 자동으로 공격을 방어한다.
기능 : 사용자와 사용자의 동료들이 부정한 정신적 영향에 강하게 저항한다.
놀라서 바라보는 사이. 방패의 정보가 떴다.
아니, 이 누추한 곳에 이런 대단한 물건이?
[히든 퀘스트 클리어 보상 같습니다. 다만, 중첩되어야만 의미가 있는 것 같군요.]
그러게?
[방패 기능은 숨기는 게 어떨까요? 주군.]
내 생각에도 그래. 이건 목숨과 직결되어 있는 거니까.
전처럼 예능용으로 소비하기에는 좀 그렇지.
그리고 궁금한 패가 하나 정도는 바닥에 깔려 있어야 다음 영상도 봐주지 않겠어?
“네? 뭐라고요? 기능 까 달라고요? 아이고, 이건 다음 기회에!”
-엄지 너무하다!!!!!
-엄지야!! 한 번만 까줘!!!
-대충 어떤 능력이 있는지라도!
“그냥 짱짱 센 방어 아이템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요~”
-와, 얄밉다.
-원래 엄지는 자기 손해 보는 건 1도 안 하는 새끼임
↳아니, 템 성능 맡겨뒀음? 아쉬우면 님이 캐서 공개하면 되잖아?
음, 과열되면 다시 척량이 배때기를 보여주어야겠어.
그때 또 다른 보상도 정산이 되었다. 바로 타이틀. 잘됐네.
[성벽 지킴이] [생명 지킴이] [희망의 수호전사] [방화범]
“우와……. 4개나 타이틀을 새로 얻었네요. 아, 아니구나. [희망의 수호자]가 [희망의 수호전사]로 업그레이드된 거고, [방화광]이 [방화범]으로 상향된 거군요!”
타이틀을 까서 보여 주자 챗창은 다시 순식간에 격변했다.
그러면 새로 나온 건 두 갠가? 성벽 지킴이하고, 생명 지킴이. 이 두 개의 능력은 나중에 알아봐야겠지?
[예. 주군. 이제 시간이 되었습니다.]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척량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들리는 시스템 메시지.
드디어 포털이 열렸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전투가 끝난 것이었다.
“자, 그러면 아쉽지만 라이브는 여기까지!”
모두가 조금만 더 해달라고 아우성이군그래.
하지만, 나도 쉬어야지? 그리고 내가 얻은 게 정확히 뭔지도 알아야 할 거고.
메일도… 보상인 ‘그 헌터’의 메일도 봐야 할 거고.
* * *
방송이 끝나고 한참 지나니 라이브로 들어오던 따봉도 멈췄다.
대신 녹화본에 누르는 하트만 들어온다.
이거 참 모르겠단 말이지.
라이브가 끝난 직후 어느 정도까지는 하트가 들어오는데, 그 ‘직후’가 정확히 몇 분 정도인지.
[시스템 마음 아닐까요?]
척량아, 네가 그런 소리를 하니까 참 생소하다.
어찌 보면 결국 이놈은 시스템이 낳은 존재 아닌가.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냉정한 걸지도.
헌터들 중에는 시스템 그 자체를 종교시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뭐, 바위 모양에다가도 신앙이 생기는 게 인간이니 뭐든 못 하겠냐마는.
폰을 보니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형, 나 PT하러 갈게.
정지벽 씨도 상당한 헬스 마니아인데 이놈도 한 쇠질 한다.
하기야, 우리네 인생. 몸이 재산이지.
단련을 게을리했다가는 죽으니까 말이지.
나야 무공 수련자니 단련도 초식을 연습하면서 하고 있지만, 스킬 수련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뭐지? 이 구시대적인 단련법은?’이라고 할 거다.
애초에 헬스는 전기가 통하는 쇠사슬 위를 걷고, 불타는 공 사이를 보법 연구하겠다고 걷진 않잖나?
저게 정상이고 무공이 미친 거지.
집에 도착해 장비 보관함에 대충 점퍼와 옷을 벗어 넣고, 무기도 꽂아 넣어서 세척하라고 시키고.
빠르게 샤워를 하고 나왔다.
곧바로 얇은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으니 살 것 같다.
이대로 수련실로 직행!
좌선을 하고 곧바로 내공 수련에 돌입하시고요.
[한국 사람들은 참 열심히 사는 것 같습니다, 주군.]
어쩔 수가 없단다.
이 자원도 없는 좁은 땅에서 혹한과 폭염을 반복하다 보면 살려고 부지런해지는 수밖에 없어.
예전에 잠깐 왔다 간 외국인 친구도 낮에는 헌터 보조원 하고 밤에는 이태원에서 케밥 자르고 있더라.
거기다가 주 2회는 외국어 강사도 해요.
얘가 모국에서는 이렇게 열심히 살아본 적이 없다던데 안 죽으려고 어떻게든 하더라고.
그래도 여름에 냉방비, 겨울에 난방비는 있어야 생존할 거 아니야.
[그렇군요. 주군.]
자기 계발서 읽을 것도 없어.
이미 한계까지 다들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있다고.
거기에 던전에 이능력 각성까지 열리니까 더 큰 지옥 속에서 모두가 몸을 맷돌처럼 갈기 시작한 거고.
[냉난방비가 엄청 올랐죠?]
그래. 한때는 태양광이니 풍력이니 했는데, 게이트가 열리고 삼켜진 공간에서 친환경 에너지는 무리니까.
심지어 원자력발전소도 몇 개는 가동을 멈춰 놨어요.
외국은 폭발하고 난리 났다던데, 우리나라는 발전소 직원들이랑 이름 모를 사람들이 희생해서 막았지.
그들은 어딘가의 축구선수도, 아이돌도,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아니었다.
그냥 옆집 형, 뒷집 누나, 지하철에서 스쳐 지나가는 그런 얼굴들.
결국 나라가 위험에 빠지면 달려가는 건 늘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세상이 어두워지면 불현듯 나타나서 혜성처럼 스스로를 태우고 다시 아침을 불렀지.
그때는 각성자도 귀해서 대피소 지키기도 막막했었다고 하니까.
이 작은 반도는 수없이 많은, 이름 없는 별들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삶이란 게 그렇다.
영화에서는 해피 엔딩으로 모두가 예쁘고 아름답게 끝나지만, 현실은 또 다르지.
그렇다고 겨울과 여름이 안 오는 건 또 아니고.
전기세를 기적처럼 내리는 마법도 없다.
오히려 한정된 공간 속에서 이 정도 전기를 끌어내는 것만으로도 신기술의 혁명이라더라.
결국 모두가 벌이의 대다수를 냉난방비와 식비와 월세에 쓰고.
누구 하나 노후가 어찌 될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 내 집을 갖는 건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엔터테인먼트는 민중의 마약이 되었다.
그게 갓튜브 속의 헌터들이 목숨을 걸고 달리게 된 토양이 된 거지.
누구나 헌터의 죽음을 볼 수 있다.
물론 죽는 장면은 보지 못한다.
대체 무슨 수를 쓰는 건지 모르겠지만 갓튜브 A.I가 끊으니까.
하지만 이 뒤는 원숭이라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지 않나.
[모두가 부지런할 수밖에 없군요.]
그렇지.
이미 죽을 만큼 일하는데 더 하라고 하니까 자기 계발서가 욕을 먹는 거고.
그런데도 더 잘 살고 싶으니까……. 읽는 거고.
“후우.”
천천히 마음을 정리하며 맑은 수면을 떠올린다.
어느 정도 잡생각이 줄어들자, 이제 이 수면에 오늘의 경험을 떠올린다.
기감(氣感)을 얻고 나니까, 이런 뇌 내 시뮬레이션이 무공의 수련에 아주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덕분에 이렇게 시간을 내서 좌선(坐禪)을 하고 있는 거고.
깊은 무아지경의 참선 상태에서 천천히 내가 했던 일들을 떠올렸고.
‘무공을 지난 전투보다 많이 쓴 건 아니야. 그래도 활약은 훨씬 컸어.’
확실히.
일 대 다수는 무공보다는 마법 같은 스킬이 훨씬 위력적이었단 말이지.
흑염의를 통해 [블레이즈 워크]를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역시 아이템에만 의존해서는 모자라는군.
아니, 사실 보통의 헌터를 기준으로 하면 차고 넘치지.
하지만 그 이상을 바라니까 결국 더 나아가야 하는 거고.
[블레이즈 워크]의 상위 스킬이 필요해.
척량의 말대로 화염 공격력을 증가시켜 주는 다른 종류의 상위 스킬까지 획득하고 [블레이즈 워크]보다 더 좋은 게 있다면 배우는 게 좋겠지.
지금 입고 있는 화염의보다 더 좋은 무구를 맞추게 되면 그때 생길 빈틈을 메꾸는 게 좋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일 대 다수를 상대할 만한 가장 폭력적인 속성은 역시 화염.
염라두 녀석, 신경 엄청 쓰이겠는걸?
‘그나저나…….’
‘그 헌터’가 내게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는데.
내가 아무리 라이징이라고는 해도.
구독자 1억 5천만의 갓튜브 최고 최대의 인기 스타.
평균 조회 수는 200~400만을 왔다 갔다 하지만, 최고 인기 동영상은 무려 조회 수 3억!
그 3억짜리 조회 수 영상의 따봉이 1,400만 정도로, 그야말로 갓튜브 최고의 스타라고 할 수 있는 인간.
illlllilililllllll.
자꾸 ‘그 헌터’라고 부르니 왠지 4와 3분의 1 승강장에서 온갖 맛이 나는 젤리를 먹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걸.
어쨌든 이쪽 세계의 최강자 중 하나로 늘 손꼽히고 있다.
정확하게 최고라고 딱 못 박기 어려운 이유는 딴 게 아니지.
다른 최강자들과 교류를 전혀 안 해요.
이놈이 올리는 동영상은 제대로 된 게 없다.
언제나 솔로 플레이.
혼자 들어가 몬스터를 썰고, 절대 공략 불가능하리라 믿어 온 수많은 보스 몬스터들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잡고.
욕을 하고, 욕을 하고, 또 욕을 하지.
이 인간이 내게 관심을 둘 줄은 상상도 못 했네.
덕분에 그가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팬들이 라이브에 쏟아지기 시작했으니까.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저 100만 원 박고 쓰는 한 문장을 보기 위해서.
그 아이디가 진짜인지, 사칭인지 확실치 않은데도 그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