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봉으로 레벨업-99화 (99/305)
  • 제99화

    정지한이 말했다.

    “성광, 엄무척, 그리고 저, 이렇게 세 명이 A팀. 나머지 엄지척 씨와 정지벽, 별하나 세 분이 B팀입니다.”

    오우, 정지한도 같은 마음이군.

    나한테 탱커 정지벽을 붙여 주셨어?

    거기에 레인저인 별하나까지 하면 이 팀은 20명의 관심병사들이 달려와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 거다.

    정지벽이 손을 들었다.

    “A팀에는 탱커가 없는데, 괜찮겠어요? 설마 탱커 모두가 관심병사만 걸리지는 않을 거고, 멀쩡한 놈 하나는 있겠죠?”

    “괜찮습니다. 제가 탱커 역할을 수행할 겁니다.”

    아니, 저 양반은 언제 탱커 능력이 생겼대?

    아니면 원래부터 탱커 능력이 있었나?

    [숨기는 게 많은 신하입니다. 충성이 역시 의심스럽습니다, 주군!]

    아니, 월급 주는 호ㄱ…… 아니 고용주라고요. 척량아.

    이윽고 그가 스크린에 손을 댄다. 그러자 긴 목록이 화면에 뜨기 시작했다.

    주르륵 내려가는 목록을 보니 하나같이 타이틀 같아 보였다.

    [참수자], [학살자], [파괴자], [파멸의 화신], [성벽 지킴이], [땜장이], [수리 전문가], [머리통 따개], [압착기], [절단] 등.

    그 아래에는 깨알같이 각 업적에 대한 설명문이 주르륵 붙어 있었다.

    “또한, 우리가 이 던전을 공략하려는 이유이자 이번 던전 클리어의 가장 큰 목적이 바로 이 ‘타이틀’입니다. 타이틀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분 안 계시지요?”

    “우리도 드디어 업적작을 하나 보네요.”

    “후후후, 슬슬 할 때가 되었군요. 이 근육만큼이나 타이틀 욕심도 생기는군요.”

    별하나는 정지벽이 주는 치즈 스틱을, 정지벽은 초록색의 육포를 뜯는다.

    근묵자흑이라고 했던가.

    별하나도 결국 정지벽을 따라 간식 라이프를 즐기게 되는 것인가.

    ‘그나저나 업적작이라!’

    최상위권 헌터가 되기 위한 길목.

    이걸 해낼 수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레벨만 높은 물헌터가 되느냐, 모셔 가려고 안달하는 잘나가는 헌터가 되느냐가 결정된다지?

    [레벨이 높으면 물론 그것만으로도 중간은 가지만 말이죠.]

    그래. 그래도 타이틀 꽉 채운 헌터에 비할 바는 아니지.

    와… 내가 이걸 하게 되는 날이 왔구나…….

    새삼스럽네.

    [확실히 대기업 출신다운 수완입니다. 제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대기업 소속의 촉망받는 인재들은 육성 로드맵을 따라서 업적도 몇 개씩 따 놓는 것이 일반적이니까요.]

    그렇지.

    업적은 제3의 능력치라고 부를 정도니까.

    내가 가진 [리자드맨 도전자]나 [백신百神이 주시하는 자], 그리고 [트윈 헤드 놀을 홀로 잡은 자]랑 [특수 던전 최초 무희생 정복자]도 쏠쏠하잖아.

    그걸 소속 헌터들이 가질 수 있게끔 서포트하는 것.

    이것에 따라서 틀니딱딱 대기업이냐 우당탕탕 중소냐로 나뉜다고 할 수 있지요.

    사람들이 대기업 육성 방식이 진부하고, 고루하다고는 해도 애들 생존율은 거기가 가장 높으니까.

    [중소기업도 육성을 잘하는 쪽은 소수 정예 팀으로 각광받긴 하지만, 그래도 결국 그렇게 키우면 대기업으로 이적하니까요.]

    그렇다.

    그래서 헬이지.

    이 망할 대기업은 중소기업에서 잘 키워 놓은 루키를 거액을 주고 뺏어 와서, 중소기업이 영원히 중소기업으로 구르도록 한다.

    헌터 회사도 결국 피라미드라는 거지.

    어쩌면 이딴 세계 한번 멸망해도 좋지 않을까?

    [진심은 아니시죠? 주군.]

    당연히 아니지.

    이딴 세계라고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차가운 맥주와 치킨을 좋아하고, 내 동생은 신선한 우유를 좋아해.

    그게 얼마나 많은 시스템을 거쳐서 내 식탁에 도착하는지 정도는 이해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음…….

    뭐라고 말하기 어렵네.

    [……?]

    그… 나보고 고맙다고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어.

    [그게 주군께서 이 세계를 지키려는 이유십니까?]

    그래. 여전히 노을은 끝내주게 붉고, 누군가가 부르는 새 유행가가 거리에 흘러나오고.

    그래도 내년은 올해보다 낫겠지 싶어서 사주나 뽑아 보는 일상이 좋아.

    그런 사람들이 좋아.

    [어렵군요.]

    그냥. 어른이 된 거지.

    반찬을 먹을 때 싫어하는 깻잎도 집어 먹는 나이가 된 거.

    인간은 더럽고, 이 사회는 썩었으니 모두 죽어 마땅하다고 외칠 나이는 지난 거지.

    더럽지 않으면 그건 사람이 아니야.

    [오버마인드의 명령 아래에서 모두가 협력하는 곤충계 차원과 인간이 다른 점이군요.]

    그래. 인간은 통합되지 않아.

    인간은 계속 이기적일 거야.

    이 사회는 썩었고, 또 누군가는 고통받지만, 또 누군가는 맥주의 차가움을 즐기겠지.

    입주한 아파트는 누군가의 공동묘지를 밀어서 지어진 곳일 거고.

    그곳에서 아이들은 사랑을 배우며 크겠지.

    [주군은 어른이군요.]

    그래. 세상은 치사하고, 계속 더럽겠지만 그래도 맥주를 포기할 이유는 되지 못하지.

    그게 사랑이야. 척량.

    현자들이 말하는 피스인 거고.

    포기와는 달라. 오히려 그 반대.

    이딴 세상에도 좋은 점이 있으니 던지는 대신 끝까지 싸워 보겠다는 어른의 결의 같은 거지.

    “자, 그러면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여기서 레벨 55까지 찍고 가는 분들도 꽤 계시고 정하 그룹 산하 헌터들도 그쪽을 추천합니다.”

    “저 촬영해도 되나요?”

    내가 묻자 그가 엷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네. 얼마든지.”

    탱커 정지벽이 말했다.

    “저 멋지게 찍어 주셔야 합니다.”

    확고한 캐릭터로 레슬링 마니아들과 걸 크러시를 좋아하는 여성 사이에서 인지도가 높아지고 있는 그녀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 허락 이후로 정지한 이사는 본격적인 강의에 들어갔다.

    그건 수능 특강을 방불케 하는 혹독한 이론 지식들.

    하지만 소홀히 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형제님들, 다들 건강하게 다친 곳 없이 클리어합시다.”

    성광은 갑자기 뭔가 복받쳐 오르는지 눈물을 찔끔 흘렸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어려서 그런지 여린 데가 있다.

    [특히 사제 클래스는 동료가 죽거나 다치면 자책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그래서 자살률이 가장 높지.

    내가 조금만 더 빨리 회복 마법을 걸었으면, 그때 마력이 좀 남아 있었으면 하고 끊임없이 머리에서 후회가 돌아가게 되니까.

    “끝나면 시원하게 맥주나 한잔해요.”

    내 말에 성광이 눈을 쓱쓱 닦았다.

    “형제님. 저 아직 미성년자입니다만.”

    “그러면 성광 님은 동생이랑 같이 우유를 드시면 되죠.”

    “형, 대체 왜 날 끌어들이는 건데?”

    화기애애해진 분위기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의 진흙구덩이 속, 헌터들은 오늘도 헤엄쳐야 한다.

    내일을 살아남기 위해.

    ‘그나저나… 영상 어떻게 찍을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오, 벌써 말이십니까?]

    그래. 아주 그냥 끝내주게 #가보자고!

    * * *

    [희망의 성채에 입장하셨습니다.]

    [당신은 정지벽, 별하나와 한 팀입니다.]

    [희망의 성채에 몰려드는 이계의 존재들을 제거하고 성벽을 수비하십시오.]

    [희망의 성채를 보호하는 모든 행동에 점수가 부여됩니다.]

    [당신의 팀은 북쪽 성벽에서 시작합니다.]

    갇힌 공기가 코를 찌른다.

    다른 냄새들 속에서 오래된 책 냄새가 희미하게 묻어난다.

    그래. 이곳은 던전이다.

    정지벽. 별하나.

    두 명과 함께 던전 포털에 들어가자마자 주변 풍경이 변한다.

    우와. 이거 높이가 30미터는 되는 거 같네. 폭은… 10미터 정도려나?

    “여기가 희망의 성채군요.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확실히 높고 단단한 성벽입니다.”

    무릎 한쪽을 꿇고, 성벽을 탁탁 두드려 보는 정지벽 씨.

    과연 방어의 스페셜리스트다운 행동.

    [우수한 탱커일수록 발밑을 먼저 본다고 들었는데 진짜네요.]

    응, 교본에 나오긴 하지만 FM대로 하는 사람이 드물지.

    하지만 그녀는 진짜로 그렇게 해.

    땅에 발을 박고 제대로 접지해서 전선을 유지해야 한다.

    그게 탱커의 첫 번째.

    하지만, 보통은 신발 아이템에 투자하고 말지 오자마자 땅 상태부터 점검하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을 거다.

    한참이나 그렇게 두드려 보고, 만져 보고. 심지어 손가락으로 짚어서 흙 맛까지 보는군.

    저건 교본에 없는데 말이야.

    반면 별하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각을 쟀다.

    정지벽이 FM대로 하는 탱커라면 별하나는 FM이 없는 레인저다.

    어떤 식으로 일을 시작할지는 그녀가 결정한다.

    별하나가 먼저 한 것은 구름을 보고, 바람의 세기를 계산하고, 등과 허리에 있는 화살통에 화살을 각각 집어넣는 것.

    서로 다른 화살인 것을 봐서는 변수를 계산해서 넣고 있는 모양이다.

    [주군은 뭘 하시겠습니까?]

    음, 일단 주변을 둘러볼까?

    성벽에 NPC라고 불리는, 던전에 속한 병사들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의 수는 수백 명이나 된다.

    후열에는 화살을 든 병사들이, 전열에는 방패와 한 손 도끼를 든 병사들이 서 있군.

    [방패와 한 손 도끼를 든 병사들이 밀려오는 적들을 막고, 그다음 궁병들이 활을 쏘겠군요.]

    사실 NPC는 별 도움이 안 돼.

    진짜 생명도 아니고, 던전의 마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람보다 머리가 나쁘거든.

    자동 사냥을 시키기에는 AI가 멍청하다고 해야 하나?

    [결국 중요한 건 헌터들이군요.]

    그래. 각성자들이 이 판을 주도해 나가지 않으면 사상자 제대로 보지.

    요즘은 그래도 다들 공부 빡세게 하고 가서 대형 사고는… 잘 안 나지. 완전히 손 놓고 분열하는 팀이 아니고서야.

    [소형 사고로도 죽을 수 있으니까요.]

    음, 그렇지. 그게 이 헌터 세상이고.

    사람들이 이 타워 디펜스형 던전에 열광하는 이유니까.

    갓튜브는 로마의 콜로세움이 되었고, 타워 디펜스는 그중 가장 큰 이벤트다.

    [그러면 곧 ‘검투사’들이 입장하겠군요.]

    척량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빛이 팟팟! 일어나면서 주변에 헌터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각자 번호를 고르면 같은 번호를 고른 사람들끼리 20~30명 랜덤하게 배치된다고 했었지?

    [팀전이다 보니 팀마다 숫자가 딱 25명으로 맞춰지지는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그리고 늦게 누르면 원하는 팀에 배정이 안 될 수도 있고.

    헌터들의 의향도 체크하지만, 결국 최종 변수는 시스템이다.

    시스템이 보았을 때 한쪽에 과하게 몰리거나 한쪽이 늦게 차게 되면 또 제멋대로 넣는다.

    그때 별하나가 나를 향해 훅 내려왔고.

    “다행히 대표님 쪽 팀은 다른 성벽으로 갔나 보네요.”

    “그러게요. 순조롭게 셋, 셋 잘 갈렸어요. 참, 저 그러면 슬슬 방송 시작해도 될까요?”

    “저희도 나오는 거죠?”

    “네. 아무래도 같이 하시니까 당연하죠.”

    그 말에 별하나가 화급하게 머리를 뒤로 묶었다.

    그런 거 안 하셔도 이미 멋있으신데 괜히 더 프로처럼 보이려고 하시는군.

    “카메라 의식하실 거 없어요. 하시던 대로 싸우시면 됩니다.”

    “네! 저는 잘할 수 있어요.”

    그렇군. 정지벽도 인기를 좋아하지만, 별하나도 마찬가지겠지.

    [별하나는 아직 고정 팬층이라고 할 게 없습니다. 탱커 정지벽이나 힐러 성광은 이미 비주얼적으로 눈에 띄어서 인지도가 있는데 그녀는 레인저니까요.]

    레인저가 눈에 띄면 어쩌자는 거여. 위험하잖아.

    [네. 그래도 사람 심리가 나만 안 뜨면 기분이 좀 그렇습니다. 주군. 부디 헤아려 주시옵소서!]

    그, 그래.

    나는 별하나 씨에게 엄지를 척 들었다.

    “멋지게 잘 나올 겁니다.”

    “네!”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아… 이제 깨달았는데, 그녀는 당연히 위장복을 입고 있다.

    레인저니까.

    …큰일……이군.

    이 그림을 뭔 수로 살리지?

    어깨가 천근만근으로 묵직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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