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봉으로 레벨업-97화 (97/305)

제97화

“…….”

공양이 아닌 ‘거래’.

정비가는 정지한이 자신의 계약의 골자를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의 거래는 일반적인 성좌와 피조물의 계약이 아니었다.

인간과 기계의 거래.

그렇기에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결코 건너지 않을 다리를 건넜는데, 그것을 정지한이 알고 있다?

“그래. 위대한 무언가에게 지식도 받고, 뭔가랑 융합도 했다……는 거지? 거기에 너도 이름에 맞는 ‘능력’을 갖추었고. 할아버지는 대체 어느 철학관에 맡겼기에 손주들 이름을 죄다 그렇게 작명을 한 건지, 원.”

정비가는 정지한의 능력을 알게 되었다.

“누나의 공방 안에서 거짓을 말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아.”

“그래. 나한테 이걸 주는 이유는?”

“내가 원하는 건 두 가지.”

패를 열었으니 이제 멈출 수는 없다.

그는 이번 회귀가 마지막이길 바라며 수를 놓았다.

아직도 바둑판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얼굴조차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그저 수를 놓을 뿐.

화점(花點)에서 시작한 행마가 천원(天元)에 닿았다.

“엄지척에게 좀 더 친절하게 대해 줄 것.”

“이미 굉장히 친절하게 대해 주고 있단다?”

“지금 보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

일단 정비가가 엄지척의 뇌를 꺼내는 루트는 엄지척 본인이 소멸시킨 것 같으니까.

‘아무리 내가 힘으로 막는다고 해도, 엄지척이 강해진다고 하더라도, 정비가는 호기심 좀 채워 보겠다고 반드시 뇌를 꺼냈지.’

이번 분기에서 엄지척은 정비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알고 이런 것도 아닐 텐데.

대체 왜 인기 갓튜버가 되려고 몸을 던져 투혼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104번째 엄지척은 역대 엄지척 중에서 가장 병맛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모니터에 목소리가 울렸다.

[정비가 님, 연구실 잘 썼습니다! 진짜 고맙습니다!]

CCTV를 향해 양손으로 K-하트를 만들었다.

옆에서 사막 여우도 그런 주인을 따라 꼬리로 하트를 만든다.

갑자기 화면을 힐끗 본 정비가가 그만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하여간, 착해. 귀여워. 어디서 저런 놈을 주워 온 거야?”

그 매드 사이언티스트를 녹인 셈이다.

그렇게 어이없이 정비가는 엄지척의 머리 뚜껑을 따는 대신 이 미친 분위기를 잠깐 녹이게 되었다.

“그래. 내가 엄지는 아마 오래 예뻐할 것 같다. 남은 하나는 뭔데?”

다행이다.

‘이런 타이밍에 정비가의 기분을 또 기쁘게 하다니.’

저 괴물을 본의 아니게 진정시켰다.

“누이께서 직접 ‘기계장치의 왕’이 되어 줘야겠어.”

까득-

정비가는 사탕을 단번에 씹어 깨뜨린다.

“너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구나?”

죽일까, 말까, 고민하는 기색이 보인다.

적의 위장 속에 들어 있음에도 정지한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이윽고 결정을 내렸는지 그녀는 새 사탕을 드론에게 받았다.

박하 맛.

가장 싫어하는 사탕.

그럼에도 입에 집어넣는 것은 무슨 심리일까.

“좋아. 재미있을 것 같네. 거래하자. 세계의 끝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거기까지 알고 있었나.

하긴, 모를 리가 없지. 던전 그로잉 때 그녀가 보낸 연구 드론의 숫자를 생각하면 더더욱.

정지한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으로 하나의 분기가 완성되었나.

“좋아. 그러면 볼일 끝났으니 꺼져줘. 내 동생.”

그녀는 정지한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것은 살려준다는 뜻이기도 했고, 정지한은 간다는 인사도 없이 곧바로 연구실을 나갔다.

이윽고 그녀가 인터폰을 들었다.

메카닉 마스터로서 원한다면 드론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을 텐데도 꼭 이런 건 구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이윽고 통화음이 울린 이후.

-응, 비가야. 무슨 일이야?

“어. 여기 큰일이 났어~”

-큰일? 전화하자마자 무슨 헛소리야?

“영희 네가 저번에 연구하던 악마의 체세포. 어떻게 된 거야?”

-으음. 절반쯤 해석했는데. 왜?

그 말에 정비가가 한참 웃음을 터뜨렸다.

“와아, 그 어떤 마생물학자들도 못한 걸 네가 해낸 거네?”

-절반밖에 못했는데 무슨.

“일단 그리로 갈게.”

정비가는 전화를 끊고 방을 나섰다.

그녀의 뒤에서는 아직도 엄지척이 열심히 정비가를 향해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고.

정비가는 기분 좋은지 드론에게 ‘이거 녹화해서 릴스로 편집해.’라는 명령을 남겼다.

덕질은 영양제와 같다.

없어도 살지만 있으면 더 좋지.

* * *

그렇게 정비가 님의 연구실을 잘 빌려 쓰고, 집에 돌아와서 다시 나머지 작업에 매진하려고 하던 차에.

“와, 나. 이거.”

한숨을 푸욱 내쉬고 있으니 무척이 녀석이 네발로 기어 나왔다.

이 녀석도 나 따라서 갓튜브 하며 팬이 좀 생겼는데, 이러고 있는 걸 팬이 알까?

“야, 제대로 걸어 다녀.”

“나… 죽을 거 같단 말이야. 형. 마력을 제어한다는 게 쉬운 줄 아나.”

갔다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 마력 제어 연습을 했던 모양이군.

하긴, 쉬운 일이 아니지. 원 따봉 드립니다.

“형은 왜 그러고 있어?”

“재료가 부족하댄다.”

“재료?”

“그래. 이 녀석, 뿌리를 내리게 해서 어떻게든 성장시킬 수는 있어 보이는데. 재료가 부족하대.”

엘프 비전 성장 촉진제를 아주 기깔 나게 만들어 바쳐 놨더니 왜 먹지를 못하니.

어쩐지 대성공이 자꾸 뜨더라.

[세계수를 키워 보자!]

난이도 : ???

세계수의 아주 작은 가지에 영양제를 공급한 당신!

세계수의 아주 작은 가지는 배가 고프다!

만복도를 올려 뿌리를 성장시켜 보자!

보상 : 세계수의 나뭇잎

추가 보상 : ???

*엘프의 성장 촉진제(만족)

*최하급 악마의 심장(불만족)

*요정의 눈물(불만족)

“퀘스트도 떴어.”

“오, 진짜?”

“그래.”

“와…. 형. 던전 외부에서 퀘스트 뜨면 보통은 대박이지 않아?”

“이게 성공만 하면 대박은 대박이지. 그 세계수가 우리 집에서 자라는 거니까.”

“형이 세계수라고 해서 뭐 대단한 것 같다…고 생각은 하는데. 정확히 뭐가 좋아지는데?”

“이 가지를 계속 얻을 수 있게 되는 거지. 가지 하나에 수십억에서 수백억까지 할 수도 있어. 마력 회복 속도 증가는 어디서나 원하니까. 그런데 세계수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졌잖아? 뭔가 엄청난 게 더 있을 수도 있지.”

“하긴. 세계수…라면 민간 신화나 소설, 영화 같은 데서도 자주 나오긴 하지.”

세계수.

신화와 전승에 따라 가지각색이지만, 일단 대충 세계를 지탱하는 거대하고 신성한 나무라고 이해하면 되려나?

“그나저나… 저 재료들을 어떻게 구한다?”

“따봉 상점에서는 안 팔아?”

[검색해 보았습니다만, 악마의 심장과 요정의 눈물은 없었습니다.]

따봉 상점도 만능은 아니네.

“없어.”

“그러면… 그거 어떻게 구할 거야?”

“흠……. 일단 정진에 문의 좀 해 봐야지. 대기업이니까 구할 수 있는 루트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구하려면 그게 좋긴 하겠지만… 정지한 그 인간이 공짜로 해 줄까?”

동생은 여전히 정지한을 경계한다.

그건 사실 척량이도 마찬가지지. 이렇게 잘해 주는데 왜 잘해 주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나중에 가지를 조금 잘라 주면 되지 않을까? 정지한도 이참에 원예나 좀 취미 삼으라고 하지, 뭐.”

내 말에 무척이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뭉개 버리자.”

우우웅-

그때 나와 무척이 두 명의 폰에 동시에 진동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해 보니 메시지가 와 있다.

[지금쯤이면 팀원들 모두 회복되셨겠군요. 내일 미팅이 있으니 오후 1시까지 미팅 룸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베리 굿 타이밍이시군요.

“타이거네, 타이거야. 본인 말 하는 줄 어떻게 알고 이렇게 연락을 했어?”

“잘됐지, 뭐. 움직이자. 형.”

그렇게 우리 형제는 나갈 채비를 했다.

* * *

“안녕하십니까!”

“형제님,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오랜만이에요! 표정을 보니 다들 잘 쉬셨나 보네요.”

이산가족이라도 상봉한 듯 모두가 격하고 반갑게 맞아 준다.

아니, 나도 한 30분은 먼저 도착하긴 했는데……. 다들 뭐 이렇게 빨리 오신 거지?

“안녕하세요. 와아. 다들 일찍 오셨네요?”

“안녕하십니까.”

무척이는 다소 거리감 있는 목소리로 꾸벅 인사를 했다.

“우물우물, 저는 여기서 계속 훈련하고 있어서요.”

정지벽.

이번에도 그녀는 정체불명의 육포를 씹고 있다.

색이 괴이한 것치고는 맛있는 냄새가 나서 식욕을 자극하는데, 별하나는 식은 눈으로 정지벽을 바라본다.

비위가 약한 별하나가 정지벽이 육포 뜯는 걸 보고도 참아 주는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

심지어 성광은 정지벽의 육포를 얻어다가 뜯고 있다.

“하나 드시렵니까?”

그리 말하며 하나 건네준다.

음, 매콤한 닭고기 맛이 나는군.

“최고급 태양초 고춧가루로 만들었지요.”

정지벽이 그리 말하는 게 아닌가.

태양초 고춧가루라.

한국에서도 농가가 줄어듦에 따라 점차 사라지고 있었던 데다가 드론이 농업을 대체하게 되니 더욱 귀해진 그것 아닌가.

“그걸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제게 특별한 커넥션이 있지요. 아침 5시에 방앗간 앞으로 가면 팔아 주십니다.”

그녀는 주변을 돌아보더니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그렇군. 요즘은 마트에서도 못 구하는 진퉁 태양초 고춧가루를 이용한 몬스터 육포. 이것은 매우 귀하군요.

“그나저나 다들 마력 회복은 다 하셨습니까?”

각자 안부 인사를 나누고 나니 이제 남은 건 본론인가.

“그래서 오늘 미팅은 다음 사냥은 어디로 갈지를 의논하는 걸까요?”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던 도중 성광이 말했다.

“엄지척 형제님, 지난번 영상 보았습니다. 기도 중이라 라이브는 볼 수 없었는데 녹화본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하더군요. 대체 레벨 제한 던전을 어떻게 돌파한 겁니까.”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모이는군.

역시 이 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답변을 드려야 하려나.

“음. 일단은 다른 직업보다 느리게 올라갑니다. 대신 스킬이나 스텟치는 거의 비슷하니까 민폐가 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형제님. 우리 중에 형제님의 실력을 의심하는 자는 누구도 없습니다.”

“탱커로서 말하는 거지만 엄지척 씨는 최고의 순간 딜러이자 저와 같은 육포 마니아니까요.”

그렇군. 육포로 다져진 전우애인가.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도중 시간은 오후 1시…가 되기 3초 전.

째깍, 째깍, 째깍.

달칵-

“안녕하십니까.”

오, 이번에도 1초도 어긋남 없이 들어오는군.

정지한에게 있어서 시간은 금이 아니라 아타만티움 같은 게 아닐까?

언제나 더 빠르지도, 더 늦지도 않은 시간과 시간의 찰나 사이로 사내는 자연스럽게 걸어 들어온다.

칼날같이 잘 벼려진 셔츠와 과하다 싶은 쓰리피스 정장, 겨울이다 보니 위에는 최고급 코트에 함께 던전을 돌파하며 얻었던 브로치까지.

가끔 사람이 아니라 ‘현상’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지.

이제는 모두가 익숙하다.

정지한이 ‘반드시 시간 약속을 지킨다’는 건 ‘깰 수 없는 던전은 없다’ 같은 불문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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