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아주 어릴 때, 그녀는 이른바 신데렐라 이야기의 주인공과 같았었고.
폭력적인 아버지와 피 안 통하는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
신데렐라는 요정 대모님의 뾰로롱 마법 덕에 살았지만, 현실에는 요정 대모님이 없더라.
그저 엿 같은 집구석을 빨리 나가야겠다는 집념과 기이할 정도로 뛰어난 두뇌가 있을 뿐이었지.
그때 정비가는 햄스터를 키웠는데, 엄지척은 약간 그 녀석을 닮았다.
뭔가 매번 행동이 부산스러운 데다 작은 것에 감동하는 것도 그렇고. 하필 덩치도 동생에 비하면 작은 편이라 더 그래 보이는 건가?
“주란이가 왜 그렇게 쟤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어쩌다 보니 그게 그렇게 됐다며 넋을 놓던 그녀의 친우.
약간 그 심정이 이해되기도 하고.
물론 정비가가 과거 한창 놀던 때처럼 엄지척이랑 방탕하게 놀면서 걔 인생을 파탄 내고 싶은 건 절대 아니다.
그때는 정비가도 반쯤 삶을 놓았을 때다 보니 주변 사람들, 특히나 애인들이 그녀의 자기 파멸적인 행보에 족족 휘말렸지.
‘그거랑은 또 다르지.’
이제는 나름 성숙한 어른이 되었달까?
그 말을 주란이한테 하면 웃으려나.
대신 커다란 해씨를 쥐여 주고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고 싶다는 충동은 든다.
폰 배경 화면으로 지정해 놓고 아침에 일어나서 웃는 얼굴 보면서 ‘얘도 힘내는구나. 나도 오늘도 뭐라도 해야지.’ 하고 충전받고 싶다.
‘음, 이게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는 좀 분류하기 어려운데 말이야. 아직 나한테 인간의 조각이 남아 있다는 거겠지.’
그녀의 ‘진짜 연구실’.
이곳은 온갖 기괴하고 이상한 기계 장치로 가득 차 있다.
어찌 보면 스팀 펑크 작품에 나올 것 같아 보이는 아티팩트부터, 아득히 먼 미래에 있을 법한 공상 과학 소품 같아 보이는 물건까지.
이 물건 모두가 그녀가 ‘제작’하거나 ‘발견’한 것들.
그러기 위해서 그녀도 적지 않은 희생을 치러야 했지만, 뭐 됐나?
옛일을 기억하는 건 귀찮으니까.
앞을 보는 것만으로도 할 거리는 너무 많다.
뒤에는 희귀한 몬스터 표본들이 제발 죽여 달라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다.
흥미가 떨어지면 ‘폐기’하겠지만 아직은 연구할 가치가 남아 있으니 보존해 둔다.
그녀는 엄지척을 모니터링하며 말했다.
“저 정도면 연금술사 중에서도 지극히 특별한 몇이나 쓰는 스킬인데. 대체 저 연금술 법을 어디서 얻은 거지? 흐음… 무공 사용자 계열인가? 아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범용성이 넓은 데다가 재료 소모를 극한까지 줄이고 있어.”
가난뱅이의 연금술.
허나,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극에 이른 이 절약이 영지주의 쪽 신비까지 건드리는 것 같다.
이 녀석이 데미우르고스 학파의 연금술을 익혔을 리도 없거니와. 그걸 익히고 사법을 펼친다고 보기에는 고작해야 연금술.
엄지척 본인이 창시했을 리는 없지.
분명 스킬 북으로 습득한 것일 터.
이상한 연금술이 정비가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잘하면 무공과 연관된 연단(鍊丹)술도 가능하겠는데?”
범용성이 극단적으로 넓은 연금술.
정비가는 엄지척의 손끝에 집중한다.
그때, 그런 그녀를 방해하는 소리가 있었으니.
[me, me, me- me too-]
영화 대사와 함께 인터폰이 울린다.
“무슨 일이야?”
거기에는 사람이 아닌 AI의 목소리가 울렸다.
-마스터. 손님이 오셨습니다. 정지한 정진 대표이사이십니다.
“들여보내.”
-예.
인터폰이 끊어지고, 그녀는 문득 화면 속의 엄지척을 지켜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우리 이상해진 동생이 찾아왔다라……. 쟤 때문이려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이에 연구실 문이 열렸다.
“이야~ 우리 상한가 치는 동생 오셨어요? 바쁘실 텐데 여기는 웬일이래니? 아, 마실 거 필요해? 마력 머금은 사과 주스 한잔 어때? 유기농이야. 이번에 신형 드론이 몬스터 피로 재배해서 만든 건데 좋더라고.”
“내 직원을 염탐하는 일은 그만두면 좋겠는데.”
냉기가 풀풀 날리는 얼굴.
혹시나가 역시나.
이 녀석은 엄지척 앞에서만 웃어 준다.
그 외의 모든 인간들에게는 언제나 비슷한 표정일 뿐.
이럴 거면 차라리 배구공과 대화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손바닥 잘 찍어 줄 수 있는데,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염탐이라니, 보안이란다. 내 물건을 빌려주는데 그 정도는 해 줘야지. 내 연구실의 가치를 생각하면 CCTV 모니터링이 그리 어렵지도 않을 텐데?”
정지한의 눈썹이 살짝 까딱인다.
왜일까. 이놈은 엄지척을 육교 밑에서 산 병아리처럼 여긴다.
삼 일 후면 뒈질 병아리를 끌어안고 울면서 마이신 먹여 가며 버티는 어린애가 생각난단 말이지.
아아, 이거 괴롭히고 싶네.
엄지척에게는 해바라기씨를 주고 싶고, 저 사촌 동생 놈은 괴롭히고 싶으니 이거 참 진귀한 날이다.
이렇게 여러 감정들이 한꺼번에 오다니.
하나같이 달달해서 뭐부터 먹어야 할지 고민이 되는군.
그녀가 손을 뻗자 드론이 사탕을 랜덤으로 뱉는다.
레몬 캐러멜 사탕이군.
지금 기분에 딱 맞아.
‘역시 신은 내 편인 걸까? 내가 하는 연구를 보면 절대 내 편은 안 들어 줄 것 같은데?’
까득.
그녀는 이빨로 사탕 껍질을 벗기고는 한 번에 입 안에 넣는다.
시디신 사탕을 한번 돌리니 이제는 달콤한 맛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이 괴이한 맛을 끊을 수 없단 말이지.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니, 우리 동생?”
“우선 이걸 받아.”
그가 손등을 매만진다. 그러자 그 손등에서 기묘한 보석이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흡사 게임의 인벤토리 같은 공간, 그것도 손등에서 물건을 꺼내는 것을 보았음에도 정비가는 별 감흥이 없다.
대신 그녀의 흥미는 허공에 떠오른 기괴한 보석에 있었다.
빛나는 부등변다면체.
“이걸 구해 내셨어? 어떻게?”
“잘.”
“호오, 우리 동생. 너무 놀라운걸? 보아하니 제대로 이성이 유지되는 모양인데, 이걸 구하고 ‘계몽’을 안 당했다고? 그리고 이걸 가지려는 것도 아니고, 공포에 젖은 것도 아니고. 그냥 내게 바친다고?”
“……받지 않을 건가? 그러면 치우도록 하지.”
“아니아니아니, 그게 아니야. 주는 건 먹어야지. 하지만 그간 사실 별로 궁금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우리 동생께서 어쩌다가 이렇게 변했는지 갑자기 너무너무너무 알고 싶어져서 말이지?”
딱-
그녀가 마정석이 박힌 네일을 딱 튕기자 방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흡사 거인의 심장처럼 맥동하는 소리가 울린다.
그것은 안 좋은 신호였다.
정교한 수천여 개의 장치가 동시에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뜻이고, 그녀가 그를 ‘연구’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내 정체가 의심되는 건 알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그래 봐야 나오는 건 없으니까.”
“호오?”
정비가의 눈이 서늘하게 빛난다.
“그런 건 갈라 보면 대충 알지 않을까? 걱정하지 마. 동생. 잠깐만 해체해서 원래대로 조립해 줄 테니까. 동생은 해체했던 것도 모를 거야. 기억에 없을 테니까.”
정지한은 떠올렸다. 정비가에게도 ‘계몽’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빛나는 부등면다면체에 홀릴 일도, 먼 이계의 공허한 망향(望鄕)에 휩쓸릴 일도 없다.
애초에 그녀는 사람의 껍데기를 쓴 무언가.
근원의 도서관에 도달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자니까.
“동생 있잖아? 옛날부터 생각은 많이 해 왔거든. 내 가설 좀 들어 줄래? 우선 첫째. 이미 내 동생이 아닐 수도 있다.”
“듣겠다는 허락을 나는 하지 않았을 텐데?”
천장이 열리며 기계로 만들어진 팔이 수십 개가 내려온다.
팔 하나하나에는 이름 모를 마법 장치부터 무슨 약이 들어 있는지 모를 주사기까지 가득했고.
그녀는 말을 이어 나간다.
“드문 일이지만 불가능하진 않지. 신적 존재나 고위 정신체가 내 동생의 몸을 차지하고 들어앉은 거지. 그 가설이라면 지금 상황이 성립되지 않아? 그렇게 술과 마약을 빨아대던 우리 망나니 동생께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개과천선을 하고, 능력까지 짱짱 세졌다는 것도 말이 되고 말이지.”
왜 그리 엄지척에게 집착하는지는 아직 여전히 모르겠지만 말이야.
기계 팔 중 하나가 빛나는 부등변다면체를 잡아 그녀에게 가져왔다.
그리고 점점 다가간 기계 팔들이 정지한의 몸을 하나, 둘 잡아챘다.
의외인 것은.
정지한은 일부러 능력을 쓰지 않고 저항하지 않고 있다는 점.
공포에 질린 기색도 아니라서 정비가는 신기한 눈으로 본다.
“두 번째 가설은?”
정지한이 구속된 채로 묻자 그녀가 답했다.
“신적인 존재가 너에게 위대한 지혜를 내려주었다~ 정도려나. 물론 이건 먼 외신의 ‘계몽’ 같은 건 아니고. 인간 형태의 문명을 이룬 신의 계시 같은 거겠지. 그 정도는 전 세계 기준으로도 제법 있잖아? 그걸로 정신 차릴 수도 있겠지.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들려줄까?”
위이이잉-
치과 드릴보다 세 배는 족히 섬뜩한 무언가가 정지한의 미간을 향해 다가온다.
“해 봐.”
“융합. 다른 어떤 존재와 하나가 된 거지. 그러면 인격 변화도 말이 돼. 능력이 생긴 것도. 자, 그래서 어느 쪽? 참고로…… 이건 나만 의심하는 건 아니란다? 힘 좀 쓴다 싶은 놈들이라면 엄지척을 조사한 후에 너를 조사하는 건 당연할 테니까.”
게이트가 생기고 인류는 이종족과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종족이라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판타지적인 존재도 있겠지만, 개중에는 인간의 이지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러한 사실은 철저한 비밀이며, 극히 조심스럽게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아는 이들이 별로 없다.
어쩌면 영혼적인 차원의 존재와 융합이 된 걸 수도 있지.
“다 틀렸지만 완전히 틀렸다고 하기도 그렇군.”
정지한은 그렇게 말하더니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그의 몸 주변으로 어떠한 힘이 번져 나갔다.
이윽고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흡사 영상을 돌리듯 그 주변의 모든 것들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마침내 열렸던 천장이 매끄러운 형태로 다시 되감겼다.
“두 번째 가설과 세 번째 가설이 조금씩 섞여 있는 상태. 거기까지만 말해 주지.”
“우리 동생 볼수록 재미있네. 용케도 그런 걸 숨겼어?”
“과연, 벌써 감을 잡은 건가.”
더욱 섬뜩해진 눈빛에 정지한은 침음을 삼켰다.
누이는 왜 자기보고 그렇게 엄지척에게 잘해 주냐 묻지만, 엄지척을 특별 대우 해주는 건 누이도 마찬가지 아닌가.
적어도 누이는 엄지척을 해체하고 싶어 하진 않으니까.
피가 이어진 사촌의 뇌수를 갈라 보고 싶어 하면서, 레벨이 오르지 않는 이상한 직업을 가진 엄지척은 ‘우쭈쭈, 우리 엄토리. 새 쳇바퀴가 맘에 들어요? 해씨 줄까?’ 하면서 보고 있다.
이 무슨 놈의 차별 대우!
“아무튼 내 뇌수를 여는 것보다 내가 준 아이템이 훨씬 가치가 있을 터. 그게 있으면 누이와 연결된 기계장치의 신과 새로운 거래를 틀 수 있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