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따봉으로 레벨업-91화 (91/305)

제91화

그래. 살아남고, 하이라이트 장면도 남겼고.

[보통 다른 헌터들은 라이브 하면서 영상까지 생각할 정신은 없을 텐데 말입니다. 주군.]

그치. 라이브는 보통 정신없이 얼레벌레 이뤄지니까.

그래도 보통은 자기 실력보다 낮은 곳을 가서 안전하게 깨는 걸 우선으로 하는 편인데, 그렇게 해도 상대는 이계의 정체불명의 게이트다 보니 어디서 어떤 변수가 터질지 몰라요.

나처럼 최상급 던전에 혼자 들어가서 목숨 걸고 칼질하는 경우는 없지.

하이라이트까지 챙겨 가면서 말이야.

이윽고 내 앞에 포털이 생겨났다.

던전을 올 클리어 한 것을 축하한다는 듯 하얀빛이 아름답다.

그나저나 히든 퀘스트가 뭐길래 내가 클리어한 거지?

이건 나중에 확인해 봐야겠다.

“자, 시청자 여러분. 이렇게 오늘 정예 던전 솔로 킬을 성공했는데요. 즐거운 시간 보냈는지 모르겠네요.”

-엄지야, 오래 살자.

-보느라 치킨 다 식었다. 어떡하냨ㅋㅋㅋㅋㅋㅋㅋ

-乃乃乃乃乃乃모두 구독+좋아요 눌러 주세요乃乃乃乃乃乃

-乃乃엄지 수고했어!! 돌아가서 푹 쉬어!!!乃乃

-즐겁긴 했는데乃乃乃 다음에는 위험한 거 하지 말자, 엄지야乃乃乃乃

그래. 내 목숨값만큼의 즐거움은 준 것 같군.

“그러면 오늘 라이브는 여기까지! 다음 방송에서 만나요! 엄지검지! 구독, 좋아요! 잊지 마세요!”

발랄한, 하지만 어찌 보면 다소 사무적인 멘트를 날리고서 라이브를 껐다.

“후우.”

다시 다리에 힘이 풀린다.

마지막에 지친 기색이 좀 드러났나? 표정 관리는 최대한 한 것 같은데.

[완벽했습니다, 주군. 다른 사람이 봐도 잘 싸우고 여력이 남아 있는 걸로 보였을 겁니다.]

그러면 됐어.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서 벌컥벌컥 마셨다.

포션은 아니다. 그냥 순수하게 물.

아무래도 포션은 아무리 맛있게 해도 결국 감기 시럽 맛이 나거든. 진짜로 갈증을 해소하려면 물밖에 없어.

땀이 계속 쏟아진다.

아, 이거 안 되겠네.

결국 물을 콸콸콸 얼굴에 붓고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던전은 좀 쉬었다 나가실 거죠?]

응. 게이트 리셋까지는 최소 여섯 시간 이상은 걸릴 테니까.

이대로 잠깐만… 잠깐만…….

왜인지 숨쉬기가 힘들군.

한계까지 몸을 혹사시키면 이렇게 되는구나.

이래서 운동선수용 산소 호흡기를 준비하는 건가.

그렇게 잔디밭에 누워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더는 어떤 몬스터도 없는 이 세계는 마치 서버 종료를 기다리는 망한 게임 같아서 기묘한 적막마저 느껴진다.

저벅.

문득 소리가 들려 누운 채로 위를 바라보니 익숙한 정장이 보였다.

“아, 대표님.”

정지한이다.

“쉬고 계셨군요.”

“네. 손가락 하나 못 움직이겠어서 누워서 멍 때리고 있었어요. 대표님은 바쁘신데 뭐 하러 여기까지 오셨어요? 제가 언제 던전을 클리어할 줄 아시고.”

“저도 라이브 시청하고 있었습니다.”

“아하~ 그러셨구나.”

이윽고 그의 등 뒤로 던전의 전리품을 쓸어 담기 위해 헌터 보조 팀이 우르르 들어섰다.

아, 옛날 생각나는걸.

나도 예전에 저랬었지.

“그래서 마력은 어느 정도 남으셨습니까?”

…다 날아갔다는 소리는 못 하겠군. 이거.

“절반 정도요.”

“훌륭하시군요. 그렇게 많은 숫자를 해치웠는데도 마력이 절반이나 남으시다니.”

믿어주는 건지 믿는 척하는 건지.

따봉이 날아오질 않으니 모르겠는걸, 이거.

“마력 랭크가 올랐거든요.”

템빨까지 채워서 A랭크. 이건 강하지.

“그러면 나가실까요?”

“예.”

나는 순순히 정지한을 따라 밖으로 향했다.

들어올 때보다도 더 많은 기자들이 플래시를 터뜨리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와아아아! 엄지다!”

“최강 엄지--!!”

어라, 그 사이에 일반인들도 들어왔네. 통제 풀렸나.

[꽤 오래 누워 계셨습니다. 주군.]

하하하, 그랬나.

그때는 현기증이 엄청나서 말이지.

[주군. 당당하게 걸으십시오. 무릇 군주의 위엄은 걸음걸이에서 나오는 법. 척추를 꼿꼿이!]

모델 워킹을 해 달라는 뜻인가.

가슴을 쭉 펴고 세상에서 내가 가장 강한 놈이라는 듯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고는 카메라에 잡히기 좋은 각도로 서서 팔을 벌려 과장된 인사를 했다.

연극에서 막이 내리면 배우들이 해주는 그런 인사.

와아아아--!

사람들은 더 흥분해서 열심히 셔터를 누른다.

빛나야지. 별처럼 굴어서 반짝반짝 빛을 내야지.

그렇게 따봉을 쌓고.

강해져서.

천만 따봉을 얻고.

이 빌어먹을 세상의 비밀을 밝혀내자.

* * *

“와. 네 형 나온 거 봤어? 정말이지~ 사람이 이렇게 독할 수가 없어. 표정 하나 안 찡그리는 걸 봐 봐. 저 정도 에너지를 쏟아부었으면 드론도 박살이 나는데 사람이라고 멀쩡하겠니. 그런데도 힘든 내색도 안 해. 물론 그런 점이 팬을 미치게 만드는 거지만.”

마치 SF 영화에 나오는 빌런처럼 그녀의 등에는 기계 팔이 몇 개나 달려 있었다.

“서사도 세지, 외부에서 오는 압력도 있지, 내 최애는 힘들수록 해맑게 웃지. 과몰입하기 딱 좋아. 거기다가 남들 다 안 가려는 곳을 자청해서 가고 있잖아.”

하나는 드릴, 하나는 용접기, 하나는 기계로 된 손, 또 하나는 드라이버, 또 하나는 마법 수식이 잔뜩 그려져 있는 톱니바퀴.

다섯 개의 기계 팔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주변에 가득 쌓인 기계 장치에 다가가 용접하고, 뒤틀고, 자르고 붙이고.

“대체 엄지척은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돈? 쟤 찾는 사람 많아. 가만히 있어도 다들 돈다발을 싸 들고 올 건데 뭐가 문제지? 설마하니 정하 그룹을 하나 더 세우는 게 목적은 아닐 거고. 그렇게 야망이 있는 타입은 아닌 것 같으니까.”

정비가의 연구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그야말로 기계 공학의 정수로 이루어진 실험실이었다.

그 가운데 수술대에는 한 명의 청년이 누워 이를 악물고 있었다.

엄무척.

엄지척의 동생이며, 기록사라는 직업을 얻은 슈퍼루키 중의 하나.

그는 나신으로 누워 있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완전한 나신은 또 아니다.

누워 있는 그의 하반신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장치들이 잔뜩 붙어 있었고, 그의 상반신에도 기이한 기계장치들이 붙어 있었으니까.

누가 봤으면 그야말로 스팀 펑크식 고문 기계라고 했을 터.

그럼에도 엄무척은 이를 악물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너도 이상해. 저런 잘난 형을 두고 너는 왜 이렇게 고생을 사서 하는 거냐는 거지.”

푸쉭! 푸쉭!

마력을 머금은 증기가 기계장치에서 뿜어져 나온다.

정신 나간 과학자의 실험실 그 자체.

엄무척의 표정은 증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그 운무 속에서 엄무척이 정비가의 질문에 답했다.

“희생은… 크으… 당연한 게…… 아닙니다.”

“응?”

“그동안 형의 목숨값으로 살아왔는데 앞으로도… 후욱… 앞으로까지 형의 목숨값으로 살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뿐입니다.”

차라리 자신이 각성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허나, 사람 일이라는 게 마음대로 돌아가질 않는다.

형은 각성 후로 성큼 가버렸다.

그를 쫓아가기 위해서는 보통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오오~ 귀여운걸? 응. 나 역시 이런 이야기에 약해진단 말이야. 우리 집은 정반대라 그런 걸지도?”

그녀는 마정석이 붙어 있는 손톱 끝으로 무언가를 빠르게 치더니.

이윽고 손가락을 딱 튕긴다.

환기 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안개가 사라지고 엄무척의 모습이 드러났다.

기계장치들 역시 철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엄무척의 몸에는 마치 기계장치의 회로처럼 빛나는 문양이 아로새겨져 있었는데, 그조차도 이내 불이 꺼지듯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좋은 데이터가 나왔네~ 너의 협력에 감사할게. 이제 더 ‘잘 조준하고’ ‘빠르게 생각하고’ ‘수월하게 회복할 수’ 있는 데다가 ‘유사시에 폭주’할 수 있을 거야. 대신… 네 육체 중 22%는 기계가 됐지만. 뭐. 괜찮지 않아? 요새 그런 일은 흔하잖아?”

광기에 찬 목소리와 함께 미소 짓는 정비가를 보면서, 엄무척은 지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갈 시간이다.

* * *

인터뷰를 대체 몇 번이나 한 거야?

죽을 거 같아.

[여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 대형 폭탄을 처리한 전문가가 되셨으니 어쩔 수 없지요. 주군.]

그건 그래. 나는 이제 폭탄 처리 전문가 된 셈이지.

파란 선 자를까, 빨간 선 자를까 고민할 일은 없겠구먼그래.

정지한이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연금술 길드에서 나온 초콜릿입니다. HP나 MP를 회복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피로 회복에 좋다는군요.”

한 입 먹으니 생각보다 씁쓸한 게 음, 틀림없는 어른의 맛이군.

기력이 샘솟는 맛이다.

미래의 수명을 바치고 오늘 살게 만들 아이스아메리카노의 맛이야. 한겨울에 쭈압쭈압 빨아주면 아주 위장까지 끝내주지.

즉석으로 기자들에게 질답을 하고, 정지한이 그런 나를 옆에서 서포트했다.

위험하다 싶은 질문은 정지한 선에서 컷을 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한바탕 행사를 치르고 나니 이윽고 전문가가 조사 결과 ‘단발성 던전’이라는 말을 했다.

이제 이 게이트가 닫히면 두 번 다시 여의도에 이 망할 식물 던전은 안 열린다는 뜻.

다행이네.

또 생기면 그거대로 귀찮아지겠다 싶었는데 말이지.

그렇게 남은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집에 오니 하늘은 이미 진청색으로 물들었고.

먼 곳에서 흐린 벽색이 보이는 걸 보니 새벽도 끝나 간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삐삐삑-

비밀번호 누르시고 달칵!

“무척아! 형아 돌아왔다아아!”

밝은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얼라리요.

휑하네. 이놈 아직도 안 왔나?

이 형님은 뼈 빠지게 일하고 돌아왔는데 말이야.

장비를 대충 벗어서 장비 보관함에 넣고, 옷은 벗어서 세탁기에. 그리고 몸만 욕실로 들어가 탕에 물을 받…….

굳이 이런 걸 할 필요가 있을까요?

“물 생성.”

촤아아아악!

스킬이 발동하자마자 허공에 물이 생겨 그대로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이야… 처음 써 보는 건데 되게 신기하네.

“이래서 다들 스킬, 스킬 하는구나. 생활 마법 진짜 편한데?”

[주군께 권해 드린 보람이 있군요.]

“그러게. 찬물인 게 아쉽다.”

[온도는 제가 올려 드리겠습니다.]

척량이 꼬리를 물에 담근다. 그러자 물이 순식간에 뜨끈뜨끈해지는 게 아닌가.

과연 척량!

내 만능 여우, 원 따봉 드립니다.

[별거 아닙니다. 저는 주군의 소환수, 주군의 아이템 능력도 어느 정도는 끌어 쓸 수 있으니까요. 흑염의의 불길을 조금 재현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거야 알지. 그래도 신기하네.”

내 말에 척량이 젖은 꼬리를 흔들거린다.

이 요망한 여우 놈.

아닌 척해도 내 칭찬이 기분 좋다 이거죠?

내 말에 척량이 애써 시선을 피한다.

[그, 그러면 주군. 보상을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0